듣기 좋은 잔소리

19.09.19(목)

by 어깨아빠

"아빠. 잘 자떠여엉?"

"응, 시윤이는?"

"잘 자떠여엉"


방에 누워 미처 떨쳐내지 못한 잠과 싸우고 있는데 아내가 쌀 씻는 소리가 들렸다. 어제 쌀 씻어놓고 자는 걸 깜빡했다. 쌀 씻는 게 그리 어렵고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지만 긴박한(요즘은 시윤이가 눈 뜨자마자 배고프다고 할 때가 많다) 아침에는 굉장히 번거로운 일이라고 아내가 그랬다. 여보, 미안.


아내와 아이들은 하루 종일 집에 있다가 오후 늦게, 내 퇴근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 집 근처 카페에 갔다. 하람이네랑 함께. 퇴근해서 중간쯤 왔을 때 아내에게 전화가 왔는데 모기가 너무 많아서 일찍 들어가려는 중이라고 했다.


통화할 때마다, 카톡 할 때마다 아내의 상태를 묻는데 요즘은 큰 변화가 없다. 약간(이라지만 멀미 수준)의 울렁거림과 더부룩함을 기본으로 안고 때에 따라 조금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한다. 생각해 보라. 최상의 몸 상태일 때라도 애들이랑 내내 지지고 볶으면 지치고 퍼지기 마련인데 거기에 입덧이라니. 괜찮냐고 물어보는 게 잘못됐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안 괜찮아]라고 묻는 게 차라리 낫겠다.


집에 갔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없었다. 원래 내가 태우러 가려고 했는데 그보다 빨리 출발할 거 같다고 해서 집에 온 건데 좀 늦어졌나 보다. 잠시 후 아내가 집에 왔다. 애들은 없었다.


"애들은?"

"어, 잠깐 하람이네 집에. 소윤이가 너무너무 하람이네 집에서 놀고 싶대서"

"여보는 어때?"

"속이 안 좋아"

"누워서 좀 쉬어"

"괜찮아. 여보, 우리 오늘 저녁 시켜 먹을래?"

"그럴까? 뭐?"

"쌀국수"

"갑자기 웬 쌀국수?"

"먹고 싶어서"

"그래. 어디 아는 데 있어?"

"어, 저번에 한 번 시켜 먹었던 곳인데 괜찮더라고"


저녁을 주문하고 아내는 애들을 찾으로 5층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아이들과 아내가 돌아왔고 쌀국수도 도착했다. 소윤이는 어제처럼 정말 맛있게 먹었다. 처음에는 면발을 흡입하더니 나중에는 밥까지 말아서 후루룩 비웠다. 바닥에 상을 펴고 먹었는데 안 그래도 식사 태도가 불량한 시윤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꼴이 되었다. 아내와 나 모두 꾹꾹 참았다. 앞으로 시윤이의 식사 태도를 개선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공유했다. 소윤이가 더할 나위 없이 잘 먹어준 게 고마웠다. 밥상머리에서 둘 다 깨작거리고 뭉그적대는 것만큼 울화통 치미는 일이 또 없다.


축구하러 나가기 전에 어떻게든 하나의 과정이라도 더 마치고 나가려고 애를 썼다. 좋게 말하면 속성 나쁘게 말하면 건성으로 애들 씻기는 것까지는 해놓고 나왔다.


"소윤아, 시윤아. 잘 자. 여보도"


사타구니와 종아리의 근육이 살짝 뭉칠 정도로 운동장에 모든 걸 쏟아내고 왔다. 개운했다. 몸도 마음도. 축구하고 왔더니 아내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방금 나왔어"

"잤어?"

"응"

"애들은 금방 잤고?"

"시윤이가 좀 안 잤지. 그런데 내가 먼저 잠든 것 같아"

"좀 푹 자긴 했어?"

"어"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탓인지, 아내는 비염까지 심해졌다. 연신 훌쩍거리고 재채기하고. 아내는 소파에 앉아서 할 일(카톡 및 통화, 처치홈스쿨 준비 등)을 하고 난 자러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소윤이가 깨서 나왔다.


"소윤아, 왜 나왔어?"

"그냥 엄마, 아빠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서여"


그럴 때는 나오지 말고 그냥 자라고 얘기하려다가 말았다. 잠에 취해 비몽사몽이라 별로 새겨듣지도 않을 테고, 또 기왕 나온 거 싫은 소리 해봐야 뭐하나 싶기도 했다.


"소윤아. 엄마 씻고 나올 테니까 기다려"

"네"


소윤이는 거실 바닥을 뒹굴뒹굴했다. 나도 설거지를 마치고 소윤이 옆에 가서 알짱거렸다.


"소윤아. 엄마 나올 때까지 아빠가 안아줄까?"

"아앙"(싫다는 뜻이다)

"그래, 알았어"


어찌나 새침한지. 이럴 때는 딸이 아니라 여자로 대해야 한다. 무턱대고 들이댔다가는 가차 없이 내동댕이쳐진다. 옆에 누워서 손끝으로 살살 건드려 보고 그랬는데 그마저도 거부하길래 얌전히 있었다. 아내가 씻고 나와서 다 함께 방에 들어가서 누웠다. 아내는 소윤이와 시윤이 사이에(바닥에) 누웠고 난 홀로 매트리스 위에 누웠다.


"아빠. 휴대폰 보지 말고 얼른 자여"

"알았어"


세상에 듣기 좋은 잔소리도 있다는 걸 딸을 낳고 알았다. (아닌가, 축구하고 와서 만물이 아름다워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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