덮어 놓고 미루다 보면 거지 꼴 집을 못 면한다

19.09.21(토)

by 어깨아빠

부모교육이 있는 날이라 바쁘게 움직여야 했는데 늦게 일어났다. 더군다나 어제 치우지 않고 잤더니 거실은 전쟁터였다. 밥도 없었다.


"여보. 애들 아침은?"

"그냥 빵 사서 토스트 해줄까 했는데"

"그래, 그러자"


일단 거실부터 치웠다. 아내도 애들도 같이. 매일 죽어라 치우는데 진짜 죽으라고 어지럽히는 게 괜히 짜증 나서(아니지, 괜히는 아니지) 저기압이었다. 한두 번 애들한테 분출했다가 다시 마음을 다스렸다. 그럴 거면 차라리 애들한테 아빠는 지금 너희가 집을 너무 어지럽혀서 기분이 안 좋다고 말하는 게 나았다. 아니면 혼자 잘 삭이든가. 후자를 택했다.


거실 정리를 마치고 편의점에 가서 식빵을 사 왔다. 계란에 적셔서 프렌치토스트를 만들어 줬다.


"소윤아, 시윤아. 맛있어?"

"네, 아빠 맛있어여"

"네에, 아빠아"


아내도 토스트를 먹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아침을 먹을 동안 설거지를 하고 주방을 정리했다. 시간상으로는 다른 건 다 멈추고 나갈 준비부터 하는 게 맞았지만 이따 집에 들어왔을 때 집이 이 모양 이 꼴인 건 상상하기도 싫었다. 다시 한 번 바쁜 아침에 그릇을 붙잡고 설거지를 하는 아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과거의 나를 반성했다. 누군가 나에게 선물을 사 줄 테니 딱 하나만 골라보라고 하면 플레이 스테이션도 아니요, 축구화도 아니요, 옷도 아니요, 신발도 아니요 오직 식기세척기를 고를 거다.


설거지를 끝내고는 샤워도 했다. 후회의 아침이었다. 어제 치울걸, 어제 닦을걸, 어제 씻을걸. 당연히 늦게 출발했다. 눈 뜨자마자 계속된 노동으로 인해 쌓인 내면의 불순물은 집 앞에 새로 생긴 카페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털어냈다. 마침 1+1 행사 중이라며 두 잔이나 줬다. 썩 맛은 없었지만 어쨌든 카페인이 들어가니 새 힘을 얻었다.


소윤이는 비염이 너무 심했다. 10을 최고 단계라고 하면 거의 8-9 사이였다. 코는 꽉 막히고, 맑은 콧물은 줄줄 흐르고, 눈은 간지럽고. 연신 코와 눈을 비벼대며 힘들어했다. 아내도 나도 만성 비염 환자라 그 고통을 너무 잘 안다. 안쓰러웠다. 시윤이는 큰 일탈 없이 잘 앉아 있었다.


점심 먹고 나서 시윤이에게 말을 걸었다.


"시윤아"

"네, 아빠"

"시윤이 이제 좀 잘까?"

"왜여어?"

"아, 원래 지금 시윤이 낮잠 잘 시간이니까"

"누나늠여?"

"누나는 원래 낮잠 안 자잖아. 아빠가 안아줄게. 자자"


시윤이는 순순히 와서 안겼다. 고개를 어깨에 기대는 모양새가 졸리긴 한 것 같았다. 문제는 내 체력이었다. 금방 팔이 아팠다. 서서 안고 있다가 슬쩍 엉덩이를 붙이며 앉았다. 이건 뭔가 불편했는지 계속 뒤척였다.


"아빠아"

"어, 시윤아"

"저거여. 저거여"

"뭐?"

"아, 쩌거 쩌거"


시윤이가 가리키는 곳에는 방석이 있었다. 방석 두 개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눕혔다. 순식간에 잠들었다. 소란스럽고 밝은 와중에도 잘 잤다. 소윤이도 시윤이도 자는 게 예민하지 않아서 정말 감사하다. 시윤이는 그렇게 한 시간을 넘게 자고 일어났다.


부모교육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데 시윤이가 물었다.


"아빠. 어디가여어?"

"어디 가긴. 집에 가야지"

"왜 집에 가여어?"

"집에 안 가면 어딜 가. 부모교육 끝났으니까 집에 가야지"

"아빠. 오눌은 낮잠 자쯔니까, 어, 어, 이따가 아빠랑 많이 놀자여어?"

"그래, 알았어"


돌아가며 아내와 저녁을 뭘 먹을지 얘기했다.


"여보. 저녁 뭐 먹지?"

"그러게. 여보는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난 아무거나 다 좋지. 여보는?"

"글쎄 딱히 생각이 안 나네"


별로 소득은 없었다. 집 문을 여는 순간 기쁨이 밀려왔다.


'아, 아침에 치우고 가길 정말 잘했다'


아내는 소파에, 나는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아우, 좀 쉬자"


꼭 필요한 요청(대/소변을 본다든가, 물을 마시고 싶다든가)이 아니고서는 애들한테도 좀 기다리라고 했다. 엄마, 아빠도 좀 쉬어야 살 수 있다면서.


"여보. 저녁 진짜 뭐 먹지?"

"그러게. 파스타 해 먹을까?"

"파스타?"

"어. 아, 근데 재료가 없다"

"면은 있어?"

"면은 있지. 소스가 없어"

"사 오면 되지"


사실 집보다는 밖에서 먹고 싶었다. 바깥 음식을 먹고 싶었던 건 전혀 아니었고, 집에서 먹으면 또 설거지할 그릇이 생기고 지저분해지는 게 싫었다. 그렇다고 밖에서 먹자니 뭔가 돈이 아깝고, 귀찮기도 하고.


"아, 갑자기 묵은지 김치찌개 이런 거 먹고 싶다"

"집에 김치 있나?"

"아니, 김치가 없어"

"김치가 없다니. 얻을 데도 없고"

"아니면 찜닭?"

"찜닭? 재료는 다 있나?"

"응. 감자, 양파, 당근 다 있어. 닭만 사 오면 돼"

"그럴까"


아내는 한참을 더 고민했다.


"여보 그럼 김치찌개랑 파스타, 찜닭 중에서는 뭐가 제일 먹고 싶어?"

"지금은 김치찌개"

"그럼 그거 먹자. 부대찌개도 괜찮아?"

"어, 좋아"


집 근처 부대찌개집으로 갔다. 아내는 춥다고 느낄 정도로 선선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킥보드를 타고 갔다. 아내랑 함께 먹을 수 있는 싸고 맛있는, 몇 안 되는 음식이다. 다만 애들은 먹을 게 없었다. 밑반찬도 다 어른 맞춤형이었다.


"옆에 반찬 가게에서 애들 반찬 좀 사 올까?"

"그래도 되나? 그럼 사장님한테 말하고 갔다 와"

"그래야겠다"


다행히 사장님은 흔쾌히 그러라고 하셨다. 아내는 함박스테이크를 사 왔다. 시윤이는 몇 개 집어먹더니 매운맛이 난다며 먹지 않았다. 내가 먹기에는 매운맛이 전혀 안 느껴졌는데 아직 자극적인 맛에 빠지지 않은 시윤이한테는 분명히 느껴졌나 보다. 시윤이는 맨밥만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나서는 소윤이와 시윤이를 동네 광장에서 좀 놀라고 풀어줬다. 킥보드를 열심히 타던 소윤이가 와서 얘기했다.


"아빠. 그런데 아빠가 저번에 구슬 아이스크림 한 번 사 준다고 했잖아여. 그건 언제 사주실 거에여?"

"아, 맞다. 아빠가 그랬지. 그럼 지금 있나 한 번 가 볼까?"

"오, 좋아여 좋아여"


바로 옆 롯데슈퍼에 갔더니 팔고 있었다. 하나를 사서 소윤이와 시윤이를 번갈아 가며 먹여줬다. 나도 먹어봤는데, 솔직히 맛있었다. 식감도 재밌고. 아내도 먹어 보더니 인정했다. 우리도 이러는데 애들은 얼마나 맛있을까. 먹이 물고 온 어미 새한테 입 벌리는 것처럼 크게 입을 벌렸다. 쉬지 않고. 혹여 자기 순서를 빼먹을까 봐 꼭 자기 차례라는 걸 알려주면서.


"아빠. 이번에는 저에여"

"아빠. 누나 먹고 나두 줘여어?"


꽤 한참 놀고 들어왔다. 나가기 전에 다 씻겨서 나간 덕에 소윤이, 시윤이 모두 양치만 하면 됐다. 역시 미리 하고 나가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모름지기 집안일이든 육아든 미루지 않고 재깍재깍 해야 화를 면한다.


아내와 아이들이 들어가고 나도 잠깐 소파에 앉았는데 졸음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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