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23(월)
오전에 소윤이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
"어, 소윤아"
"이따 아빠 오면 놀이터 가도 돼여?"
"놀이터? 그래. 갔다 오자"
"알았어여"
소윤이에 이어 전화를 받은 아내의 목소리는 짜증이 가득 묻어 있으면서도 매우 지친 목소리였다.
"여보. 힘들어?"
"아, 애들이 말을 진짜 안 듣네"
"그래? 둘 다?"
"어. 원래 낮에 놀이터 가기로 했었는데 둘 다 말 안 들어서 못 가게 된거거든"
"아, 그렇구나"
아내는 나와 통화할 때도 애들이랑 씨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아. 누워 있으면 말을 안 들어"
"그래?"
"잠깐 피곤해서 누웠는데 "
다시 소윤이를 바꿔 달라고 해서 엄마 말을 잘 들으라고 당부했다. 아빠가 퇴근해서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계속 말 안 들었다고 하면 놀이터도 안 갈 거라는 약간의 협박과 함께.
퇴근했더니 집에 장모님이 와 계셨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나를 보더니 집 떠난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길길이 뛰고 난리였다. 주로 그런 편이지만 오늘은 유독 더했다. 아이들이 반겨주는 건 정말 기쁜 일이지만 부작용도 있다. 신발을 벗기도 전부터
"아빠. 얼른 와 봐여. 우리 놀자여"
"아빠아. 가이가이가이(가위바위보) 하자여엉"
"아빠. 숨바꼭질 하자여"
"아빠. 마따기 마따기(말타기) 하여어"
정신없이 몰아친다. 마음이야 늘 그에 걸맞게 호응하며 받아쳐주고 싶지만 그러지 못할 때도 있다. 다행히 오늘은 장단을 잘 맞췄다. 장모님은 애들 밥을 차려주시고 나서 가셨다. 아내는 장모님을 지하철역까지 바래다 드린다고 함께 나갔다. 원래 같았으면 아내도 그대로 나가서 자유 시간이겠지만, 오늘도 자유시간은 넘기겠다고 했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아직은 모든 상황에 대처가 가능한 집이 편한가 보다.
소윤이와 시윤이의 저녁을 먹이는데 시윤이가 첫 술을 뜨기도 전부터 심상찮은 낌새를 보였다. 몸을 배배 꼬면서 힘들다고 난리였다. 여러 번, 정말 정말 여러 번 참고 기회를 줬지만 시윤이는 개선의 의지가 없어 보였다. 결국 밥그릇과 숟가락을 회수했다.
"강시윤. 밥 먹지 마세요. 아빠가 계속 얘기했지. 시윤이는 오늘 놀이터도 못 가는 거야. 알았어? 감사히 밥 먹지 않으면 시윤이가 원하는 건 할 수가 없어. 놀이터도 못 가고 장난감도 못 가지고 놀아. 가만히 앉아 있든지 들어가서 자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해. 알았어?"
시윤이는 구슬프게 울었다. 한 번씩 분노를 첨가하기도 했다.
"시윤아. 우는 건 괜찮지만 소리 지르거나 화내지 말라고 했어요"
그다음이 고민이었다. 시윤이가 놀이터 못 가게 됐다고 소윤이까지 그 피해를 볼 수는 없으니 소윤이는 데리고 나가야 했다. 그럼 시윤이와 아내가 집에 남게 되는 건데 아내가 너무 힘들어지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됐다. 시윤이는 여전히 울며 엄마를 찾았다. 장모님을 모셔다드리고 온 아내가 돌아왔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엄마, 시윤이는 밥을 안 먹어서 놀이터도 못 가고, 장난감도 못 가지고 놀고, 엄마한테 안아달라고 하지도 못해요. 앉아 있거나 잘 수만 있어요"
시윤이도 들을 수 있도록 한 번 더.
시윤이의 반응이 아내를 힘들게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현실을 수긍하는 눈치였다.
"시윤아. 지금 이건 시윤이가 밥을 제대로 안 먹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이런 일들이 생긴 거야. 알았어?"
"네, 아빠"
소윤이를 데리고 집에서 나왔다. 어쩌다 보니 요새 맨날 소윤이랑 데이트네. 해가 짧아져서 나왔을 때 이미 어둑어둑했다. 오늘은 그네를 한참 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살 밀라고 난리던 녀석이 오늘은 계속 세게 밀어 달라고 했다. 정말 온 힘을 다해 밀어서 그네가 90도 가까이 치솟아도 깔깔대며 즐거워했다.
"소윤아. 안 무서워?"
"네. 너무 재밌어여"
또 컸네.
잘 놀았지만 왠지 외로워 보였다.
"소윤아. 시윤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치?"
"맞아여. 시윤이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밥 좀 잘 먹지"
소윤이는 중간 중간 시윤이 얘기를 많이 했다. 뭐 하고 있을지, 자고 있을지, 엄마랑 잘 있을지, 누나는 안 보고 싶어 하는지.
"소윤아. 구슬 아이스크림 사 줄까?"
"오, 네. 좋아여 좋아여"
소윤이는 정말 맛있게 먹었다. 마지막에는 무슨 국밥 먹는 것처럼 후루룩 거리며 털어 넣었다.
"소윤아. 그렇게 맛있어?"
"네. 너무 너무 맛있어여"
"그래도 맨날 사달라고 하면 안 돼. 알지?"
"그럼여. 맨날 먹고 싶기는 하지만 말은 안하져"
집에 돌아가니 아내와 시윤이는 평안하게 지내고 있었다.
"시윤이 똥 쌌어. 방금"
"아직 안 닦은 거야?"
"어. 방금 쌌어"
"그래, 내가 닦아줄게"
"시윤아. 아빠랑 똥 닦자"
"엄마랑"
"엄마가 지금 입덧 때문에 똥 닦는 게 너무 힘드시대. 그러니까 아빠랑 닦자"
"엄마라아아앙"
"시윤아. 그럼 엉덩이 닦는 건 아빠랑 하고 얼굴이랑 손, 발은 엄마가 닦자?"
"시더어어어엉. 엄마라아아아아앙"
짜식이 말이야. 절충안을 내놨으면 어느 정도 수용을 하고 그래야지. 계속 고자세로 나오면 협상에 진전이 없지.
시윤이는 그렇게 스스로 달구다가 결국 화와 떼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나와 방에 가서 한참 동안 훈육의 시간을 가졌다. 똥 닦을 때마다 억울하다. 손금 사이사이로 스며들면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똥꾸렁내까지 묻혀가며 닦아주는데 사정 사정을 해야 하다니.
아내는 나에게 애들을 재워달라고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실제로 그런지, 체감상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랑 자면 왠지 다 빨리 자는 느낌이다. 오늘도 거의 눕자마자 둘 다 곯아떨어졌다. 소윤이야 당연하겠지만 시윤이까지. 자기 나름대로 저녁 시간에 몸과 마음의 힘을 많이 소모해서 그런가.
라고 생각한 건 나의 착각이었다. 재우고 나와서 시계를 보니 아홉 시였다.
잘만 한 시간이었구나. 아유, 되다.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