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24(화)
"여보. 난 오늘 새벽에 놀라운 경험을 했어"
"뭐?"
"자는데 꿈속에서 졸졸졸 시냇물 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래서 이게 무슨 소릴까 하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려서 소윤이 엉덩이에 손을 댔는데 소윤이가 오줌을 싸고 있었어"
"진짜?"
"어, 그래서 얼른 이불 걷고 그래서 매트리스는 지켜냈다"
아내의 초인적인 능력으로 매트리스는 오염되지 않았다. 그거면 됐다. 다른 이불이야 집에서도 빨고 말릴 수 있으니까. 역시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한한 능력을 주셨다. 꿈을 지배하는 능력까지.
새벽에 잠을 설쳐서 그랬을까. 오늘은 출근할 때 소윤이와 시윤이 모두 자고 있었다. 아침에 처치홈스쿨 가느라 바빴는지 애들이 일어나고 나서도 연락이 없었다. 퇴근할 때가 되어서야 연락이 됐다.
"여보. 어디야?"
"나 200번 타고 가는 중"
"알았어"
잠시 후 아내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여보"
"응"
"소윤이가 하도 삼촌 집에 가고 싶다고 그래서 오빠한테 연락해봤는데 지금 민방위 끝나고 집에 왔다네. 아예 오빠네로 가서 오늘 장 열었으면 거기서 뭐 사서 먹을까?"
"그래. 그러자"
원흥역에 내려서 형님네 집으로 걸어갔다. 막 도착했을 때 소윤이와 시윤이도 형님과 함께 놀이터에 나왔다. 시윤이가 처음 보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핑크색으로. '누군가 물려주거나 사 준 옷이 있었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시윤아. 예쁜 옷 입었네?"
"아빠"
"응"
"이거 쩌찌홈즈쿠에서 입었떠여"
"처치홈스쿨에서?"
"네"
"왜?"
"져져떠여(젖었어요)"
"왜 젖었어?"
"어, 어, ㅁ;ㅣㅏ엄;ㅣ아넒;ㅏㅣㄴ얼;ㅁㅇ너ㅏㄹ"
뭐라고 말을 열심히 하긴 했는데 못 알아들었다. 통역사를 불렀다.
"소윤아. 뭐라고 하는 거야?"
"아, 아까 처치홈스쿨에서 손을 씻다가"
"아 그랬구나"
소윤이와 시윤이는 그네를 열심히 탔다. 저녁 먹으러 가기 전에 잠깐 논 거라 오래 있지는 않았다. 저녁은 형님네 아파트에 화요일마다 서는 장에서 먹기로 했다. 애들이랑 먹을 게 마땅치는 않았지만, 뭐 맨날 먹는 건 아니니까. 떡볶이, 튀김, 순대, 어묵을 샀다. 소윤이는 저번에는 순대와 간을 잘 먹더니 오늘은 한 입 먹고 나서는 맛이 없다며 입에도 안 댔다. 시윤이는 순대와 간을 잘 먹었다. 대신 소윤이는 어묵을 잘 먹었다. 시윤이는 어묵을 입에도 안 댔고. 튀김은 둘 다 잘 먹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를 위한 메뉴가 아니었고, 천막 아래 플라스틱 의자와 식탁을 놓고 포장마차 같은 분위기에서 먹었음에도 아주 평화로운 식사 시간을 보냈다.
"소윤아, 시윤아. 이제 너네랑 이런 곳에서도 밥 먹는 게 가능하구나"
물론 그때그때 다르겠지만. 분명한 건 내년 4월(롬이 탄생 예정)이 되면 다시 불가능해질 일이라는 거다. 뭐지 이 끝없이 미끄러지는 언덕을 오르는 듯한 느낌은. 열심히 오르고 또 올랐건만 2-3년에 한 번씩 제자리로 돌아가는 느낌이네?
저녁 먹고 나서는 근처 카페에 잠시 갔다. 차로 한 5분 정도 거리였다. 요즘 소윤이와 시윤이는 (소윤이야 늘 그랬지만) 뜬금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참 많이 한다.
"아빠"
"응?"
"사랑해여"
"아빠. 따랑해여어"
오늘도 운전하고 있는데 뒷좌석에서 아내와 나에게 사랑 고백을 하더니 갑자기 삼촌에게 질문을 했다.
"삼촌"
"응?"
"삼촌도 엄마 사랑해여?"
"그럼. 엄마가 삼촌 동생인데 사랑하지. 그런데 한 번도 사랑한다고 말 한 적은 없어"
"왜여.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해야져"
"삼촌도 소윤이 나이일 때는 많이 했을걸. 커서 안 한 거지"
"그럼 얼른 지금 해 봐여"
"지금?"
"네. 해 봐여"
"사랑해"
"아니, 가영아 사랑해. 이렇게 해야져"
"가영아 사랑해"
다른 건 몰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도록 한 건 잘 한 일이다.
"소윤아. 나중에 아빠랑 고모 있을 때도 그렇게 얘기해 봐"
"알았어여"
소윤아. 아빠랑 고모는 괜찮아. 마음으로도 충분해.
마침 구석지고 독립된 자리가 있었던 데다가 다른 손님이 없어서 제법 얌전히 앉아 있는 게 가능했다. 물론 끊임없는 군것질 공세를 퍼붓기도 했지만. 요즘은 소윤이나 시윤이가 먼저 집에 가자고 할 때가 종종 있다.
"아빠. 얼른 집에 가고 싶어여"
"왜?"
"너무 졸려여. 그리고 집이 제일 편해여"
다섯 살이 되니 내 집이 최고라는 걸 좀 깨달았나 보다. 시윤이는 누나가 그러니까 괜히 따라서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애나 어른이나 다 똑같지. 집에 있을 때는 나가고 싶고, 나가면 들어가서 쉬고 싶고.
잽싸게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다. 처치홈스쿨 하는 날은 평소보다 더 피로가 쌓이는 아내는 오늘도 매우 피곤해 보였다. 아내는 애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육아 퇴근의 관점에서 보면 꽤 늦은 시간이지만 취침 시간으로 따지자면 엄청 이른 시간에 눕는 거다. 한 9시부터 다음 날 7-8시까지 자는 거니까 결코 적은 시간은 아니다. 우리 애들한테 그거 하나는 참 감사하다. 어쨌든 일찍 자는 거.
방에서 기침 소리가 많이 들렸다. 소윤이, 시윤이, 아내까지 모두 기침을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콧물이 많아져서 그런 거고, 아내는 천식 때문이겠지만 내심 걱정은 됐다. 느낌상 조만간 열이 한 번 오를 때가 됐다. 언제 열이 났었나 싶을 때 꼭 열이 오르는데 요새가 딱 그렇다.
아내는 짜증을 가득 담아 소리도 질렀다.
"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들어간 지 한참 지났을 때라 진짜 짜증은 아니었을 테고, 아마도 잠꼬대였을 거다. 그래, 여보. 그렇게라도 풀어야지. 더 질러. 팍팍 질러. 꿈은 지배하지만 잠꼬대는 아직 못 하나 보네. 내 욕도 해도 돼.
"강지훈. 이 나쁜놈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