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28(토)
9시 30분에 일어났다. 이런 놀라운 일이. 더 놀라운 건 소윤이도 9시 넘어서까지 잤다.
"아빠아. 배고파여어어"
어제저녁에 밥을 조금 먹기도 했고(난 밥을 꽤 조금 주는 편이다. 많이 주고 남기는 게 너무 아깝다.) 아침 시간이 그만큼 늦어서 그랬나 보다. 시윤이는 요즘 즉문즉답문 화법을 구사한다.
"아빠아. 배고파여어"
"어, 밥 먹자"
"아빠아. 왜 밥 암 줘여?"
"어? 방금 말했는데 어떻게 줘. 조금만 기다려"
"아빠아. 배고파여어어"
"어,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줘"
"아빠아. 밥 왜 암 줘여어"
내가 무슨 집안일 버튼인 줄 아나.
"여보. 오늘 아침은 뭐 먹이지?"
"오늘 빵 사서 토스트 먹이자"
"알았어"
"내가 사 올게"
"그래"
"엄마. 나도 엄마랑 같이 갔다 올래여"
"엄마아. 나두우 나두우"
아이들의 성화에 아내는 애들을 데리고 나갔다. 머리 아픈 게 좀 낫긴 했지만 여전히 두통이 있어서 바깥바람이라도 쐬면 좀 나을까 싶었던 외출이었다. 식빵 한 봉지 사 오는 거니까 고작해야 20여 분이었는데도 너무 좋았다. 그 해방감이란. 소파에 질펀하게 누워서 음량을 최대로 하고 휴대폰으로 짧은 영상(주로 웃긴 거)을 봤다.
띠디디디띠디디디.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어찌나 달갑지 않던지.
"여보"
"어, 잘 갔다 왔어?"
"어"
"여보는 좀 힘들어 보이네?"
"어, 막상 나가니까 힘드네. 기운이 너무 없어"
"어제저녁을 안 먹어서 그런가 봐"
"그런가"
"여보는 아침 뭐 먹어?"
"어제 여보가 만들어 놓은 밥 먹으려고"
"아, 그러면 되겠다"
애들은 버터에 빵 구워서 잼을 발라주고 영양학적인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계란 프라이를 하나씩 넣어 주려고 했다.
"아빠. 저는 그냥 빵 안 구워주는 게 좋아여"
"아, 그래? 그럼 소윤이는 그냥 잼 발라줘?"
"네"
"아빠. 나늠 구워주세여어"
"그래, 그럼 시윤이 것만 구워줄게"
은근히 둘이 취향이 다르단 말이야.
어제 설거지며 집 정리며 다 미루고 잤더니 역시 아침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아내와 애들 밥을 다 차려주고 나서 설거지를 하려고 하니까 아내는 앉아서 좀 쉬라고 했다.
쉰다고 사라지면 모를까 그대로 남아있을 텐데, 어차피 내가 할 일이었다. 다 끝내고 소파에 앉아서 마시는 아이스아메리카노의 첫 모금은 정말 천상의 맛이다.
"아빠아. 왜 거기서 먹어여어?"
"그냥"
"여기 앉아여어"
"아니야. 아빠 여기 좀 앉아서 먹을게"
그 와중에도 물 달라, 오줌 마렵다, 떨어뜨렸다, 어찌나 요구 사항이 많은지 몇 번을 앉았다 일어났다.
늦게 일어난 탓에 아침 먹고 간식 좀 줬더니 11시였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놀이터에 가고 싶다고 했고 그러자고 했다. 혼자 나가면 삼류, 같이 있으면 이류, 데리고 나가면 일류가 아닐까. 아내는 집에 두고 애들만 데리고 나왔다. 날이 많이 더웠다. 놀이터에는 사람도 없었다. 덕분에 소윤이와 시윤이는 그네를 실컷 탔다.
"아빠. 세게 밀어주세여"
"아빠아. 미여주데여어"
주말 이 시간에는 아이들의 흥을 맞춰주기 어렵다는 걸 새삼 체감했다. 그래도 아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마음 같아서는 '너네는 놀아라. 아빠는 좀 쉴게'하고 정자에 대자로 눕고 싶었지만, 삐질삐질 땀을 흘려가며 애들의 놀이 도우미 역할에 충실하게 임했다.
어제부터였나 오늘 아침부터였나, 아무튼 아내가 애들한테 요거트를 사주기로 약속했다. 아침에 빵 사러 갔을 때는 마트가 문을 열기 전이라 못 샀다.
"소윤아, 시윤아. 우리 이제 한살림 가서 요거트 살까?"
내 입장에서는 썩 재밌는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어느덧 시간이 훌쩍 지나 거의 1시였다. 요거트 먹이고 들어가서 시윤이 낮잠 재우면 적당하겠다고 생각했다.
"시윤아. 요거트 먹고 나면 들어가서 낮잠 자자?"
"누구양여어?"
"아빠랑"
"네"
한살림에 가서 요거트를 사고 롯데슈퍼도 들렀다. 달고 시원한 게 마시고 싶었다. 평소에 잘 먹지 않는 마운틴듀를 하나 샀다. 물도 하나 사고.
"아빠. 그건 뭐에여?"
"이거? 음료수"
"나도 먹을 수 있어여?"
"아니. 소윤이는 아직 탄산음료 안 먹잖아"
"그래도여"
"아니야. 이건 아빠 거니까 넘보지마"
볕이 뜨거워서 어디 그늘에 앉아서 먹으려고 다시 놀이터로 가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소윤아. 저거 하람이 아니야?"
"어디여? 어디여?"
"저기"
"어, 맞다. 하람아아아아아아"
"하얌이 누나아아아아"
하람이(505호 사모님 딸, 처치홈스쿨 같이 함)에다 또 다른 처치홈스쿨 친구도 만났다. 그들은 이제 막 나온 거였다. 어쩔 수 없이 좀 더 놀게 뒀다. 30분은 놀았나 보다.
"소윤아, 시윤아. 이제 우리는 10분만 있다가 들어가자"
"아아아아아. 아빠 더 놀래여"
"소윤아, 우리는 벌써 두 시간이나 놀았잖아"
"아, 그래도여"
"들어가서 시윤이 낮잠도 재워야 돼. 딱 10분만 더 놀고 갈 거야"
"아빠 그런데 친구들을 만나니까 같이 노는 게 너무 재밌어여"
"맞아. 그래도 오늘은 시간이 안 맞았잖아. 그리고 원래 만날 일도 없었는데 이렇게 우연히라도 만나서 같이 논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야"
소윤이도 시윤이도 충분히 놀았기 때문에 큰 저항은 없었다. 집에 들어가면서 아내에게 소윤이가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보. 내가 시윤이 재우는 동안 여보는 소윤이랑 다시 나갈래? 소윤이 더 놀고 싶어 했거든. 여보 바람이라도 쐬고 싶으면"
"그럴까"
일단 나는 시윤이의 손과 발을 씻겨서 방에 데리고 들어갔다. 시윤이는 열심히 놀아서 졸렸는지 바로 잠들었다. 거실에 나와 보니 아내와 소윤이는 없었다.
"여보. 나간 거야?"
"어. 놀이터야. 시윤이는 바로 잤어?"
"응"
"다행이네. 여보도 좀 쉬어. 집안일하지 말고"
"알았어"
아침 20분에 이어 정말 꿀같은 휴식시간이었다. 아침처럼 소파에 누워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1시간을 그렇게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화장실 청소를 했다.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나서는 샤워도 했다. 2시간이 흘렀다. 시윤이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시윤이를 흔들었다.
"시윤아. 시윤아"
못난 표정을 한껏 지으며 기지개를 켜더니 눈을 떴다.
"잘 잤어?"
"네"
한동안 잠에서 깨지 못하고 이리저리 뒹굴었다.
"아빠는 거실에 나가 있을 게. 시윤이도 잠 깨면 나와"
잠시 후 터벅터벅 거실로 걸어 나온 시윤이가 물었다.
"누나늠여?"
"엄마랑 잠깐 나갔어"
"왜여?"
"잠깐 뭐 사러"
"나두 같이 갈래여"
"엄마 금방 오신대"
"아, 나두우. 나갈래여"
"그럼 엄마한테 전화해보자. 언제 오시는지"
"여보세요?"
"엄마아"
"어, 시윤아. 지금 일어났어?"
"네. 엄마 언제쯤 오질 꺼에여어?"
"엄마 지금 들어가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
아내와 소윤이는 금방 들어왔다. 소윤이는 무려 4시간을 밖에서 논 거다. 얼굴은 벌겋게 익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아내의 손에는 커피가 들려 있었다.
"이건 뭐야?"
"아. 남옥 언니가 사 줬어"
"그냥?"
"어. 스타벅스 갔었거든. 여보 갖다 주라면서"
"고맙다고 전해드려"
아침 소파에서의 커피 못지않은 시의적절한 해갈의 커피였다. 설거지하면서 홀짝홀짝 마셨다.
"여보. 저녁에는 뭐 먹지?"
"여보는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나? 나야 뭐 다 좋지"
사실 아침에 영상을 보는데 오리 로스 먹는 게 나왔다. 계속 그게 먹고 싶었다.
"여보. 진짜 먹고 싶은 거 없어?"
"난 사실 오리고기가 먹고 싶어. 로스"
"아, 그래? 그럼 원당시장에서 사 와야 되잖아"
"여보 못 먹잖아. 다른 거 먹어도 괜찮아"
"아니야, 나도 먹으면 되지"
"냄새날 텐데"
"조금만 먹으면 되지. 먹자. 여보가 사 와"
"그럴까? 그럼. 그런데 얼마나 걸릴까?"
"그래도 한 시간은 걸리겠지? 왔다 갔다 하면"
"아 그래? 귀찮긴 하다. 한살림에는 그런 거 안 파나?"
"찾아볼게"
(잠시 후)
"여보. 파네. 오리롤로스 라는 게 있어"
"아, 그래? 여기도 재고 있나?"
"전화해 볼게"
(잠시 후)
"여보. 있대. 사 와"
"알았어"
소윤이와 시윤이를 데리고 한살림에 가서 오리고기를 샀다. 부추도 사고. 깻잎도 사고. 고추도 사고. 행복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점심을 건너 뛴 탓에 배고프다고 난리였다. 양파, 파, 부추, 마늘과 함께 넣고 맛술과 후추로 밑간을 해서 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야채에서 물이 나와 불고기처럼 끓여지는 듯하더니 나중에는 오리 기름이 잘 나오며 적절하게 구워졌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잘 먹었고, 아내도 잘 먹는 것처럼 보였다.(나의 흥을 깨지 않기 위한 연기였을지도 모른다.) 난 뭐 말할 것도 없고. 오늘 하루의 피로가 오리고 기 한 방으로 다 사라지는 듯했다. 배가 너무 불러서 남은 기름에 밥을 볶아먹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오늘은 내가 애들을 데리고 들어가서 재웠다. 소윤이는 금방 잠들었는데 시윤이는 그렇지 않았다. 예상은 했다. 낮에 두 시간을 푹 잤으니 밤에 일찍 잘 리가 없었다. 시윤이도 장난치거나 그러지 않고 눈 꼭 감고 자려고 하긴 했다. 한 30분 정도 기다려 주다가 시윤이한테 얘기했다.
"시윤아"
"네, 아빠"
"아빠 이제 나갈게"
"으아아아아아앙. 시더여어어어엉"
"아, 시윤이가 뭐 잘못해서 그런 건 아니야. 아빠도 나가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시윤이가 잠드는 데 너무 오래 걸리니까. 이제 나가야 될 것 같아"
"시더여어어어어엉"
"울지 말고 아빠 말 들어 봐. 시윤이가 안 자서 그러는 게 아니라 아빠 할 일이 있어서 그런 거야. 시윤이 잠들면 이따 엄마 시윤이 옆에 누우시라고 할 테니까, 시윤이 혼자 자. 알았지?"
"시더여어어엉"
"옆에 누나도 있잖아. 아빠는 이제 나갈 거야. 시윤이가 울어도 어쩔 수 없어. 오늘은"
"아빠아. 같이 자고 시퍼떠여어어"
"그랬지. 그래, 이따 다 같이 자면 되지. 아빠 나갈 테니까 눈 꼭 감고 자. 알았지?"
"네, 아빠"
시윤이를 두고 방에서 나왔다.
"시윤이는?"
"그냥 눕혀놓고 나왔어"
"잘까?"
"글쎄"
"여보. 그럼 난 일단 샤워 좀 할 게"
"그래"
아내가 씻는 동안 시윤이가 한 번 나왔다. 방문을 아주 조금 열고는 그 틈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시윤아, 왜 나왔어. 들어가서 자"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아무 말 하지 않고 들어가서 시윤이를 안아줬다. 꽤 답답한 자세로 꽉 안아줬는데 그대로 안겨 있었다.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이 포옹이 먹혔다는걸. 양념을 더했다.
"시윤아"
"네"
"아빠랑 같이 자고 싶어서 나왔어?"
"네"
"그랬구나. 아빠가 시윤이 싫어서 혼자 자게 하는 거 아니야. 아빠가 할 일이 있어서 그런 거야. 아빠도 엄마도 이따 들어와서 같이 잘 거잖아. 엄마는 시윤이 옆에 눕고. 그러니까 아빠한테 조금만 더 안겨 있다가 가서 누워. 알았지?"
"네, 아빠"
그 뒤로 시윤이는 나오지 않았다.
순간순간에는 매우 피곤하고 힘들었는데 하루를 다 보내고 나니 참 아름다운 추억을 또 여러 개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커녕 무척 피곤했다.
소윤아, 시윤아. 진담이지만 농담이야. 피곤하긴 했지만 즐겁기도 했어. 이게 건강한 쾌락이지. 대가 없는 쾌락은 뭔가 비정상이거든. 물론 아빠는 요즘 쾌락의 크기에 비해 대가가 너무 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아주 가끔, 아주 가끔, 아주 가끔 하기는 하지만 말이야.
내일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