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을 버틸 힘

19.10.02(수)

by 어깨아빠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침 일찍 깨서 둘이 놀았다. 엄청 시끄럽게. 잠결에 조용히 하라고 하려다가 엄마, 아빠 안 깨우고 자기들끼리 노는 게 어찌 보면 기특한 일이 아닌가 싶어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둘이서 집이 떠나가라 웃어대며 놀았다.


잘 놀던 시윤이는 아내와 내가 일어나서 이것저것 준비하니까 괜히 떼를 썼다. 요즘 아침에 자주 있는 일이다. 내가 가지고 나갈 커피를 타는 아내를 보며


"엄마아. 어음 주데여어. 어음"


고구마를 싸는 아내를 보며


"고구마 주데여. 고구마"


계란이 있으면


"계란 머거두 되여어?"


아내와 나의 답은 늘 같다.


"응, 밥 먹고"


시윤이도 안다. 알지만 매일 시도한다. 깨끗하게 뒤돌아서면 문제 될 게 없지만 어떤 날은 아침부터 징징대는 소리로 아내를 괴롭히곤 한다. 오늘도 약간 그런 조짐이 있었다. 곧 네 살이 되는 시윤이에게 찾아올 [질풍네도]의 시기를 미리 알려주는 복선이라 여기고 있다.


태풍이 온다더니 아침부터 날씨가 스산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틈틈이 전화해서 아내와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봤다. 아주 무난했다. 감사하게도. 아내는 입덧도 피로도도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엄청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일상을 살아내는 데는 무리가 없는 수준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아내를 크게 힘들게 하거나 정신을 무너뜨리거나 하지 않았다.


오후까지 비가 오지 않길래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득 품었다. 퇴근하려고 차에 탔을 때부터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더니 집에 도착했을 때는 금방 옷을 적실 만큼 내렸다. 축구는 취소됐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비가 아니요, 나의 눈물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무척 졸려 보였다. 둘 다 낮잠을 안 잤다고 했다. 시윤이는 문을 열고 "아빠 왔다"를 외쳐도 달려오지 않았다. 멍하니 앉아서 손가락을 빨았다. 바로 달려와서 안긴 소윤이를 안아 올려서 놀아줬는데, 시윤이는 그걸 보더니 엉덩이를 떼고 나에게 왔다.


"아빠아. 나도 해주제여"


최대한 시윤이가 울거나 떼쓰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조금 짜증 내거나 징징거려도 웃으며 듣기 좋게 구슬렸다. 그러다 바닥에 있는 장난감을 치우라는 나의 얘기에 옴짝달싹하지 않고 제자리에 앉아 고집을 부렸다. 그러다 시윤이도 그만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이성의 끈은 놓치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넘었고. 나와 함께 방에 들어가서 따끔한 훈육의 시간을 보내고 나왔다. 피곤함이 극에 달한 것처럼 보여서 싫다고 하면 저녁은 안 먹이려고 했다.


"시윤이. 저녁 먹을 거야?"

"네"

"먹을 수 있어?"

"네. 엄마랑"

"그래 엄마랑"


의외로 앉겠다고 했고 약속한 대로 잘 먹었다. 물론 내가 밥을 쥐꼬리만큼 떠주긴 했다. 소윤이에게도. 덕분에 소윤이와 시윤이는 오늘도 밥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아빠. 숨바꼭질 조금만 해도 되여?"

"그래. 그러자"

"얼마나여?"

"다섯 판?"

"아니여. 열 판"

"그래. 열 판"


시윤이의 목에는 까맣게 때가 껴 있었다. 머리는 땀으로 범벅이고. 내일이 휴일만 아니었으면 당연히 씻겼을 테지만, 내일로 미뤘다. (어제도 오늘로 미뤘던 것 같은데)


"내일은 아빠 출근 안 하니까 낮에 샤워하자"


졸려서 당장이라도 쓰러져 잠들 것 같던 시윤이는 숨바꼭질할 때는 멀쩡하게 정신을 차렸다. 애고 어른이고 놀 때는 새 힘이 솟는 법이다.


"엄마도 양치해여"

"아니야. 엄마는 너희 재우고 나올 거야. 그때 할 게"


양치를 하고 자라는 소윤이의 말에 아내는 그렇게 대답했다. 오늘은 둘 다 엄청 금방 잘 테니 아내의 생환도 가능해 보였다. 아내와 아이들이 자리에 누운 뒤, 방에서 나왔다. 축구를 못해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대신 헬스장에라도 갔다.


한 시간 정도 운동하고 왔는데 집은 불이 하나도 안 켜져서 캄캄했다. 아내는 아이들 사이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아내나 나나 요즘 이렇다. 그 5분을 버틸 여력이 없을 때가 많다.


오늘은 아내를 깨웠다. 엄청 피곤해 보이거나 기운이 없어 보이지 않았으니까 육아 퇴근 후의 여유를 좀 즐기라고.


"여보는 이제 뭐해? 할 거 있어?"

"아니. 아무것도"

"내일 휴일이라 한가하겠네"

"응. 난 빈둥거릴 거야"


아내는 각오를 다졌다. (각오를 다지지 않는 평소에도 크게 다르지 않긴 하지만.)


"여보. 뭐해?"

"나 임부복 봐"


"여보. 뭐해?"

"그냥 이것저것"


"여보. 뭐해?"

"네이버 보고 있어"


"여보. 지금은?"

"드라마 기다려"


아내는 자신의 말을 충실히 이행했다.


아쉽다. 아내가 입덧을 하지 않았으면 뭐라도 야식을 시켜 놓고 같이 수다를 떨든 영화를 보든 했을 밤인데. 아내의 상태가 아직 그정도는 아니다.


대신 난 고민하고 있다. 휴일 전날이니 싱크대에 있는 설거지를 내일로 미룰 것인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얼른 후딱 해 놓을지. 얼마 전만 해도 이런 상황에 마음은 지금 해야 한다고 말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았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마음은 미루라고 하는데 자꾸 몸이 들썩인다.


역시 인간은 변화와 적응의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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