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겁지만 싱겁지 않은

19.10.05(토)

by 어깨아빠

일찍은커녕 제일 늦게 일어났다. 아마 소윤이와 시윤이가 가장 먼저 일어난 듯했는데 잠결에 들리는 소리로는 소윤이가 아내를 깨웠다.


"엄마. 엄마. 일어나서 나와 봐여"

"어. 알았어"

"엄마. 빨리여 빨리"

"어, 왜"

"아 그냥여"


잠결에 들은 거라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난 소윤이의 이런 센스와 눈치가 참 좋다. 아마 다 읽어냈을 거다. 이게 누가 한 일이고 왜 그랬는지. 거실에 나간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오"


'음, 성공이군'


매년 똑같은 생일, 비슷한 구성(미역국 + 반찬 + 꽃 + 선물 + 편지)으로 어떻게 매번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일단 받는 자의 마음이 열려 있는 게 제일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아내는 참 고마운 사람이고. 그다음의 핵심은 편지다. 난 주머니가 가볍기 때문에 매년 증액, 혹은 증폭시켜서 선물을 할 수가 없다. 대신 편지에 진심을 담아서 정성껏 쓰면 뭐 최소한의 방어(?)는 가능하다. 올해는 롬이가 함께 하니 또 남다르기도 했고. (롬이야 고맙다. 니 역할이 컸다.)


다행히 아내와 아이들 모두 미역국과 콩비지 전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어제, 아니 오늘이기도 하지. 아무튼 수고를 보상받는 느낌이었지만 피로는 여전했다.


아내의 생일이었지만 부모교육받으러 가야 했다. 부모 교육이 끝나면 신림동(나의 부모님 댁)에 가야 했다. 엄마의 생일(음력)도 오늘이었다. 원래 밖에서 밥을 먹으려다가 그냥 집에서 먹기로 했고, 음식은 다 엄마가 준비했다. 아내가 육개장이 먹고 싶다고 해서 육개장을 끓였다고 했다. 미역국과 콩비지 전을 싸서 가지고 갔다. 이런 걸 두고 꿩 먹고 알 먹고, 일타이피, 도랑 치고 가재 잡는다고 하는 거다. 한 가지 걱정은 나의 약진(?)이 있을 때마다 반사 손해로 아빠가 피해를 본다. 아빠, 저는 살아야죠.


내 동생이 생일인데 둘(나와 아내)이 오붓하게 보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내)엄마에게 뭐라고 했다는 걸 엄마가 나에게 전했었다. 아내에게도 얘기하고. 애 둘하고 오붓하면 얼마나 오붓하겠냐고 아무렇지 않게 답했는데, 문득 아내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보고, 곱씹어 보고, 다시 봐도 아내는 정말 상관없는 눈치였다. 오히려 엄마가 해주는 육개장을 더 기다리는 듯했고.


부모 교육 중간에 아내에게 물어봤다.


"시윤이 어떻게 하지? 재울까?"

"잘까?"

"안 자려나?"

"그냥 두지 뭐"

"여보. 너무 이중적인데?"

"뭐가?"

"오늘 신림동 간다고"

"크크크크크"


엄마, 생일 선물이에요. 손주들과 원 없이 놀 수 있는 [손주 야간 이용권]. 그래도 양심상 시도는 했다. 대신 빠른 포기를 전제로 했다. 조금이라도 안 잘 거 같으면 애쓰지 않기로 혼자 마음을 먹었다.


"시윤아. 잘까? 아빠가 안아서 재워줄까?"

"네"


의외로 순순히 안겼다.


"아빠. 저기서. 저기서"

"방석?"

"네"


방석을 깔고 눕혔다. 졸린 듯 보였고, 자려는 의지도 있었다. 한 5분 토닥이니까 잠들었다. 엄마, 죄송해요. 선물이 좀 줄었네요.


부모 교육을 마치고 신림동으로 갔다. 소윤이는 낮잠을 안 잤으면서도 전혀 졸린 기색 없이 한 시간 동안 즐겁게 웃고 떠들며 갔다. 도착하니 딱 저녁 시간이었다. 엄마가 차린 수많은 반찬 사이로 나의 미역국과 콩비지 전이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모두에게 반응이 좋았다. 예상한 대로 아빠는 엄마와 동생에게 타박 폭격을 한 바가지 맞았다.


저녁 먹고 앉아서 쉬는데 동생이 얘기했다.


"오빠. 오늘은 데이트 안 가?"

"가야지. 그래도 생일인데"


안 그래도 아내랑 저녁에 영화 볼까 하는 얘기가 오갔었다. 아내도 피곤해 보이고 나도 꽤 피곤했지만 이렇게 생일을 마무리하는 건 너무 찝찝했다.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든가 해야지.


아내와 엄마의 생일 축하 의식을 하며 소윤이가 편지를 전달했다. 직접 생각해서 쓴 편지를. 할머니 편지를 먼저 썼는지 내용도 길고(두 문장) 그림도 훨씬 다채롭고 성의가 있었다. 아내 편지를 쓸 때는 집중력이 떨어졌는지 내용도 짧고(한 문장) 그림에도 다소 성의가 없어 보였다. 요상한 그림도 하나 있었다.


"소윤아. 그런데 이건 뭐 그린 거야?"


사람의 형상과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이상한 무언가가 그려져 있었다.


"롬이"


역시 소윤이. 반전이 있다.


소윤아, 아빠가 이걸 어떻게 기록해야 니가 나중에 보고 느낄지 모르겠다. 아무튼 다들 놀랐어. 니가 엄마의 생일 편지에 롬이를 기억하고 그렸다는 사실에. 넌 정말 귀한 첫째 딸이자 언니, 누나가 될 거야. 진심으로.


나가기 전에 시윤이 머리를 잘랐다. 매제와 동생이 잘랐는데 나름 괜찮았다. 역시 이맘때 아이들은 바가지 머리를 하면 기본은 간다. 어쨌든 지저분하던 옆머리도 좀 정리가 됐고. 시윤이는 좀 애매하다. 두어 번 미용실에 가서 잘랐는데 뭔가 아깝고 손해 보는 느낌이다. 물론 전문가의 손길과 많은 차이가 나긴 하지만 아직은 집에서 자르는 어설픔이 용납된달까.


소윤이와 시윤이의 샤워까지 하고 아내와 나는 퇴장했다. 영화관까지 가는 동안 연신 하품을 해댔다. 둘 다. 무사히 볼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둘 다 졸지 않고 완주했다.


아내의 생일이면 가장 큰 가경일(가정의 경사스러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정한 날)인데 너무 싱거워서 아쉽기도 하지만 내년에는 이 싱거움이 그리울지도 모른다. 싱겁다는 건 여유롭다는 거니까.


여보,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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