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02(화)
"진짜 괜찮겠어?"
"어 그럼. 괜찮다니까"
아내의 저 호연지기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하긴 가끔 아내 혼자 소윤이 시윤이 데리고 (사무실도 있고, 친정도 있는) 파주에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올 때가 있는데 따지고 보면 파주 가는 게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애 둘을 양 옆에 끼고 천안까지 간다니 거듭 대단하다.
자고 일어났더니 허벅지가 뻐근해서 걱정했는데 막상 자전거를 타니 괜찮았다. 신나게 페달을 밟아 원흥역에 도착했다. 계단을 내려갔는데 플랫폼으로 이어지는 통로의 셔터가 3분의 2쯤 내려와 있었다.
'뭐지'
가만 보니 옆에 안내문이 있었다.
[백석-대곡 구간에 야간 공사 차량이 고장으로 멈춰 있어 양방향 운행이 중단..]
?
나 겨우 이틀째인데? 진짜 이런 일이 생겼다고? 금방 정상 복구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고객센터에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여보"
"어. 잘 가고 있어?"
"대박"
"왜? 왜?"
"지하철 운행을 안 한대"
"왜? 뭐 때문에?"
"백석역에 고장차가 서 있대. 대박이지?"
"진짜? 헐"
다시 열심히 페달을 밟아 집으로 돌아갔다.
"아빠? 지하철이 고장 나서 멈췄대여?"
"어 소윤아. 지하철이 멈춰버렸대"
덕분에 소윤이 시윤이 얼굴 한 번 더 보고 (아 참, 아내 얼굴 더 본 게 제일 좋았는데) 차를 가지고 출근했다. 신기한 건 자전거를 두고 차로 출근하려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운전하는 게 더 피곤하게 느껴졌다. 사실 나 스스로도 자전거로 출근하는 게 얼마나 가겠나 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여전히 가득했다.
'이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묘한 매력에 점점 끌리는 느낌이다. 이러다 진짜 자전거 출근족 되는 거 아니야?(누가보면 한 1년 자전거 탄 줄 알겠네)
아내는 행신역에서 11시쯤 천안행 기차를 타야 했다. 내가 차를 쓰는 바람에 택시를 타는 불편을 겪긴 했지만 무사히 KTX역에 도착해 잘 가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저번에 제주도 다녀올 때도 그랬듯 시윤이만 협조 잘 해주면 큰 문제가 없을 거다. 소윤이는 이제 1-2시간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흘러 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다행히 시윤이는 가는 동안 아내 품에 안겨 잠든 사진을 받았다. 소윤이는 역시 예상대로 아무런 방해나 짐이 되지 않고 잘 있었고.
아내는 무사히 천안에 도착했고 천안역까지 데리러 나온 현정이의 도움으로 무사히 현정이네 집까지 갈 수 있었다. 이제 소윤이는 예전만큼 낯가림을 하는 아이가 아닌가 보다. 처음 가보는 현정이네 집에서도 전혀 낯선 기색 없이 평소처럼 놀고 있는 사진을 받았다. 시윤이야 뭐 원래 만인이 자기 친구인 애니까.
아내랑 애들이 행신역에 도착하는 시간은 7시쯤이었다. 부리나케 퇴근해서 헬스장부터 갔다. 1시간 정도 운동하고 행신역으로 데리러 가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았다. 행신역 근처 골목길에 주차를 하고 부지런히 행신역으로 갔다. 행신역은 타고 내리는 길이 딱 한 곳이라 어긋날 일이 없기 때문에 아내를 만날 때까지 타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통로에서 플랫폼으로 내려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까지 갔다. 잠시 기다리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아내가 먼저 나랑 눈을 맞췄다. 잠깐의 눈맞춤이었지만 아내의 고단함이 충분히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소윤이가 나에게 달려와서 안겼다.
"소윤아. 잘 갔다 왔어? 재밌었어?"
"네에"
"여보. 괜찮아?"
"어 괜찮아. 힘들긴 하지만"
역시 고단함의 가장 큰 원인은 시윤이었다.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가만히 있지 않고 내려가겠다고 엄청 몸부림 치고 졸려서 짜증내고. 소윤이는 아내의 말도 잘 듣고 아주 얌전하게 공공질서를 유린하지 않았다. 아무튼 천안에서 행신까지 한 시간밖에 안 되는 거리였지만 아내는 많이 지쳐 있었다. 물론 열차 안에서의 한 시간은 물론 하루 종일의 피로가 누적된 결과였겠지만. 마지막 한 시간이 고농축 피로를 유발하는 아주 고된 구간이었다. 내 애를 쫓아다니며 수발드는 것만 해도 참 힘든 일이지만 내 애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방해를 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할 때는 피로도가 배가 된다.
아내는 또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애들은 현정이네서 출발하기 전에 간단히 씻기고 옷까지 갈아 입혀놓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행신역에 내렸을 때, 소윤이 시윤이 모두 내복 차림이었다. 둘 다 차에 태우면 바로 잠들 테니 먼저 저녁을 먹여야 했다. 행신역 근처 분식집에 들어가서 국수와 오므라이스를 시켰다. 둘 다 졸려서 제정신이 아니었고 시윤이는 몇 숟가락 먹더니 밖에 나가겠다고 울어재꼈다. 시윤이는 먼저 데리고 나가서 소윤이가 밥 다 먹을 때까지 밖에 있었다. 요즘 차에 빠져 있는 시윤이는 거리를 오가는 차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원래 내가 자전거를 가지고 출근했으면 행신역으로 오는 게 불편하니까 아내 혼자 애들 저녁 먹여서 집으로 돌아오려고 했었다. 물론 상황이 그랬으면 아내는 꾸역꾸역 감당했겠지만 엄청 힘들었을 거다. 아침에 3호선 열차가 고장이 난 건 다 이때를 위함이었나 보다. 애들 끼니를 거르지 않기 위한 형식적 절차에 가까웠던 저녁식사를 마치고 드디어 차에 탑승. 당연히 그대로 안녕이었다. 시간상으로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체감상으로는 몇 배의 육아를 한 아내도 애들을 떨어뜨려 놓고 나니 약간 기력을 되찾는 듯했으나 소파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그랬다. 그래도 막상 다녀와 보니 또 못 갈만 한 거리는 아니라고 아내는 말했다. 시윤이만 맡기고 가도 한결 더 나을 것 같고. 만약 둘 다 떼어 놓고 가면 두 말할 것도 없고.
아무튼 아내는 언젠가 또 천안에 가야겠다며 후속 편을 예고했다. 참 대단하다. 이러다 울산도 당일로 갔다 오겠다고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