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살의 누나 노릇

18.10.03(수)

by 어깨아빠

하늘이 열렸다는 개천절인데 하늘은 안 열리고 방 문이 먼저 열렸다. 일찍부터 일어나서 나와 아내를 깨우려고 애를 쓴 소윤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나는 꽤 한참을 버텼다. 아빠 엄마를 부르는 소윤이의 목소리에 점점 짜증이 섞이고 불쾌함이 스미는 것이 잠결에도 느껴져서


'얼른 일어나야지'


생각은 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엄마, 아빠 깨우는 걸 포기한 소윤이와 시윤이가 문을 열고 밖에 나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됐다'


잠시 후 소윤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우리 배 먹고 있어여"


배라 하면, 어제 자기 전에 아내가 깎고 잘라서 락앤락 통에 담아 식탁에 올려둔 그 배를 말하는 건데. 그걸 어떻게 알고 꺼내서 먹고 있다는 건가 궁금해서 살짝 봤는데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냉장고 앞에 상(아주 자그마한)을 펴고 소윤이는 토끼 소파, 시윤이는 뽀로로 의자에 나란히 앉아 배를 나눠 먹고 있었다.


"소윤아. 소윤이가 상 편 거야?"

"응"

"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냥 보였는데?"


상 펴서 의자까지 갖다 놓고 시윤이를 앉혀서 배를 나눠 먹었다는 그 자체가 참 기특하기도 하고. 또 훌쩍 큰 게 느껴지기도 하고. 며칠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시윤이랑 놀던 소윤이가 기분이 상해서 시윤이한테 막 뭐라고 하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강시윤. 너 누나가 아침에 포도주스 흘린 것도 닦아주고 그랬는데. 어!"


포도주스? 아내와 나 둘 다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고보니 현관에 포도주스가 튄 흔적이 보였다. 먹고 남은 포도주스 통을 시윤이가 주워서 가지고 놀다가 현관 언저리에서 흘렸고 소윤이는 물티슈를 가지고 그걸 열심히 닦아냈던 것 같다. 우리한테는 말하지도 않고. 이렇게 요즘은 소윤이가 누나 노릇 할 때가 많다. 오로지 첫째만이 누릴 수 있는 그 첫사랑의 농도를 시윤이는 느낄 수 없겠지만, 그 대신 소윤이는 경험할 수 없는 누나의 사랑으로 채우는 느낌이라고 하면 너무 감상적인 건가. 오늘 아침의 광경은 나에게 그런 느낌이었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아내의 생일을 맞아 장인어른, 장모님과 식사를 하기로 했다. 아내는 출발하기 직전까지 장소를 정하지 못하다가 겨우겨우 골랐다. 처갓댁 근처에 있는 갈빗집에 가려고 했는데 없어졌다고 해서 운정건강공원 근처에 있는 다른 갈빗집으로 장소를 바꿨다. 굳이 파주를 장소로 잡은 건 밥 먹고 나서 롯데아울렛에 들르기 위해서였다. 내 옷을 좀 사야 했다. 애들을 데리고, 특히 시윤이를 데리고 가면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서 시윤이라도 맡기려고 했다. 소윤이에게도 동의를 구해놨다. (둘 다 맡기는 건 뭔가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니까)


일단 둘 다 점심을 아주 잘 먹었다. 역시 소윤이 시윤이 모두 고기 파인가보다. 물론 오늘도 강시윤이 가장 먼저 식사를 마치고 내려가겠다고 떼를 써서 기어코 할머니 할아버지를 일어나게 했다. 소윤이는 그런 거 없다. 오히려 안 먹고 뺀질뺀질 밍기적거리며 오래 앉아 있어서 속 터질 때가 많다. 식사 후 바로 옆 카페로 자리를 옮겨서 케이크에 촛불 켜고 미리 생일 기념 의식을 치렀다. 차에 빠진 시윤이는 생일이고 뭐고 지나다니는 차를 보겠다며 자꾸 차도 쪽으로 나가려고 했다.


주로 할아버지가 시윤이와 함께 다녔는데 어쩌다 보니 소윤이도 할아버지에게 갔고. 장인어른 혼자 둘을 보기에는 힘드니 자연스레 내가 따라붙었다. 그러다 바로 앞에 있는 건강공원 산책로로 들어갔고 장인어른과 시윤이 소윤이와 나는 반대쪽까지 걸어갔다. 공원이 워낙 잘 되어 있고 날씨도 화창해서 좋기는 했는데 햇볕이 조금 뜨겁긴 했다. 거기에 소윤이는 자꾸 안 걷고 안아달라 그러고. 동생한테는 그렇게 누나처럼 의젓하면서 내 앞에만 오면 걷는 방법을 잊은 아이처럼 그렇게 안아달라고 그런다. 자신을 사랑하는 1급 가족들 가운데 아직 유일하게 자기를 안아도 힘이 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다.


소윤아. 사실 아빠도 힘들어 너 거의 16kg 야


시윤이는 뭐 하나에 꽂히면 안 가고 계속 보겠다고 떼쓰고. (이를테면, 물고기나 까치 같은) 거의 한 30-40여분을 걷고 나니 (그냥 걸은 것도 아니고 두 녀석을 안고 매고 하면서)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장인어른도 마찬가지였다. 실컷 시간을 보내고 아울렛으로 이동했다. 마침 시윤이는 잠들어서 그대로 유모차에 눕혀서 넘겨 드렸다. 소윤이도 놓고 가라고 하시길래 어쩔 수 없이(?) 떠나보냈다. 아내와 여기저기 둘러보며 쇼핑하며 얘기했다.


"여보. 애들 데리고 왔으면 큰 일 났겠다"

"그래. 맞아"


[큰 일=시간만 버리고 소득이 없는 상황]


휴일이라 가뜩이나 사람도 많은데 애들까지 끌고 왔으면 어땠을까.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그래도 두 녀석과 씨름하고 있을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생각하며 느긋하게 쇼핑하지는 않았다. 애들은 잘 놀고 있었는데 장인어른은 많이 피곤해 보이셨다. 왜 그럴까. 우리 아빠도 그렇고 장인어른도 그렇고. 엄마나 장모님은 힘들어도 그렇게 티가 많이 나지 않는데 유난히 남성 조부모님들은 확연하게 눈에 띌까. (물론 요즘에는 엄마나 장모님도 힘에 겨워하는 걸 자주 목격하지만) 아내와 내가 다시 합류했을 때 실컷 자고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시윤이는 한창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소윤이는 아이스크림 하나 먹고 싶대서 사주기로 했다. 소윤이는 약속을 체결하기 전까지는 엄청 저자세인데 체결하고 나면 아주아주 대쪽 같기가 그지없다. 아이스크림 사주는 것도 황송하게 생각하고 그저 망부석처럼 기다리면 될 것을. 사주기로 했는데 왜 안 사주냐고 사 줄 때까지 시도 때도 없이 물어보며 사람을 닦달한다


"소윤아 조금만 기다려"

"아빠 얼마나 조금이여?"

"5분만"

"5분 너무 길다"


이 녀석이.


놀이터에서 집에 가자고 할 때 5분이라고 하면 맨날 짧다고 하면서. 하긴 아내도 마찬가지다. 요즘 시간의 길고 짧음이 궁금한 소윤이가 이것저것 물을 때가 많은데 그때마다 아내의 시간 개념은 고무줄 같다.


차 타고 갈 때 (소윤이가 좀 힘들어할 때)


"엄마. 몇 분 남았어여?"

"어 30분"

"30분은 긴 거에여 짧은 거에여?"

"짧은 거야. 금방 가"


저녁 먹고 자기 전에 놀 때 (소윤이가 재밌게 놀고 있을 때)


"소윤아 저기 큰 바늘이 6에 가면 자는 거야"

"그럼 몇 분 남은 거에여?"

"어 30분"

"30분 긴 거에여 짧은 거에여?"

"엄청 긴 거지. 30분이면 한참 놀 수 있지"


아무튼 아내와 나의 합류 후에도 꽤 시간을 보냈다. 소윤이는 이것저것 군것질하고 시윤이는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그러면서 각자의 욕구를 해소했다. 장모님이 (아내와 내가 다녀왔던) 성석동 국숫집에 가서 저녁을 먹자고 하셨다. 점심때 갈비의 60% 이상(최대한 낮게 잡아도)을 내가 먹었다.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어차피 집에 가다가 애들이 잠들지도 모르고 그러기에는 애매한 시간이기도 해서 국숫집에서 저녁을 먹고 가기로 했다. 애들도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는지 열심히 먹지는 않았다. 국수와 녹두전이라는 메뉴가 애들이 맛있게 먹기에 힘들기도 하고.


시윤이는 또 가장 먼저 울어댔다. 하아. 강시윤의 저 버릇을 어찌해야 할까. 저녁 먹고 났더니 피로감이 극에 달했다. 집에 갈 때는 아내에게 운전대를 넘겼다. 아내 말에 의하면 나랑 타면 꼭 평소에 안 하던 실수를 한다는데. 오늘도 신호를 못 보고 그냥 지나칠 뻔하고 한 두 차례의 급정거도 있었다. 덕분에 아내는 집에 올 때까지 갓 초보 시절의 긴장감 속에 운전했다고 했다.


오늘은 둘 다 집에 올 때까지 자지 않았다. 샤워까지는 차마 시키지 못하고 간단히 손과 발, 얼굴만 씻기고 옷을 갈아 입혔다.


"아빠. 책 몇 권 읽어줄 거에여?"

"한 권"

"한 권 너무 조금인데"

"그래도 오늘은 너무 늦었잖아. 한 권"

"알았어여"


이래 놓고 막상 방에는 책 두세 권을 가지고 들어온다.


"아빠. 근데 이거랑 이거랑 이것도 너무 읽고 싶은데여"


하면서 나름 아양을 떠는 전략을 요즘 들어 많이 쓴다. 대부분 못 이기는 척 넘어가 준다. 소윤이는 금방 잠들었는데 시윤이가 좀 버텼다. 결국 아내는 시윤이를 이기지 못했다. 소윤이를 재우고 나서 잠든 아내를 살짝 흔들어 깨웠는데 그때도 시윤이가 아직 완전히 잠들기 전이라 아내는 나에게 먼저 나가라고 했다. 아내는 나오지 못했다. 나도 나오긴 했는데 피로도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역시 휴일 육아, 보통일이 아니구나. 그래도 수요일에 쉬는 건 역시 좋다.


금방 목요일이 되어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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