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생일에 대처하는 자세

18.10.04(목)

by 어깨아빠

두 번째 자전거 출근 역시 괜찮았다. 비록 두 번째였지만 첫날에 비해 복장도 편하게 갖추고 약간의 노하우도 생겨서 더 나았다. 아내는 특별한 일정이 없었다. 오전쯤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비상비상비상"

"왜왜?"

"어. 어머니가 오시기로 하셨어"

"아. 진짜? 갑자기?"

"어. 얘기하다가 내일 내 생일이라고"

"오늘 일 없으신가?"

"아니. 저녁에 일 있으시대. 한 서너 시쯤에 가실 걸"


일단 시어머니라도 와서 애들을 같이 봐주는 거야 두 말할 것도 없이 좋은 일이지만 타이밍이 안 맞으면 개판 5분 전이 무엇인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어질러진 집을 치워야 하는 난관이 닥치기도 한다. 오늘이 그랬다. 개판 5분 전까지는 아니어도 한 15분 전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여보. 이제 끊을게. 나중에 또 통화하자"


다급하게 통화를 끝내는 목소리에서 긴박함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도 덕분에 아내의 오후가 보다 수월할 테니 지불할만한 대가였다. 거기에 아내는 생일이라고 맛있는 것도 먹고 용돈도 받았으니 남는 장사였다. 그렇다. 아내는 내일 생일이다. 무슨 일이 있든, 언제까지 가능할지 모르더라도 생일은 힘닿는 만큼 최선을 다해 챙기는 게 신상에 좋다. 달리 생각하면 기회의 날이기도 하고. [잘 챙긴 생일 하루 수십 번 집안일보다 낫다]는 옛 말도 있지 않은가. 다행히도 우리 아내는 황금만능주의, 물질만능주의, 맘모니즘에 사로 잡히지 않았다. 매해 비슷하다. 미역국 + 몇 가지 반찬으로 구성된 아침상, 아내가 원하는 선물.(물론 허용 금액은 소박하디 소박하다) 아내에게 미리 카톡을 보냈다.


[여보. 오늘 일찍 자야 됨]


아무리 서로 알고 하는 플레이라도 자기 생일상 준비하는 남편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는 건 좀 아니다 싶어서 미리 예고했다. 서프라이즈는 불가능하지만(서프라이즈는 오직 상상하지 못한 액수의 돈 혹은 선물로 가능하다) 대신 반서프라이즈 정도? 아무튼 대충 구상해 둔 반찬을 만들 재료 중 집에 없는 게 뭔지 아내에게 물어서 미리 파악해뒀다. 일단 소윤이랑 시윤이는 손 대면 톡 하고 쓰러져 잠들 수 있는 상태라 금방 재울 수 있었다. 오늘은 애들 뿐만 아니라 아내도 일찍 재워야 했다. 시윤이를 재우고 나온 아내는 커피를 한 잔만 마시겠다고 했다. 그러라고 했는데 또 아내 특유의 밍기적거림을 시전 하며 커피는 안 먹고 앉아서 카톡하고 그랬다.


"빨리 들어가서 자라고"

"꼭 내가 자야 돼?"

"어"

"알았어 좀만 더 있다 들어갈게"

"얼른 들어가라고. 빨리 안 들어가면 내일 후회할 거야. 빨리 들어갈 걸 하고"

"아 알았어 들어갈게"


아내는 나의 채근을 이기지 못하고 커피는 마시지 못한 채 다시 방으로 입성했다. 아내가 방으로 들어가기 전 집에 있는 재료들만 대충 손질해서 준비해놓고 아내가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 집 앞 슈퍼에 가서 필요한 재료 몇 개를 샀다. 아내가 자러 들어가고 열심히 준비하는데 갑자기 소윤이가


"매워어어어어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꿈꿨나 보다. 그리고 또 잠시 뒤에는


"아빠 미워어어어어어"


자기 전에 나한테 좀 혼나서 슬픈 마음을 안고 잤는데 그 여운을 꿈에서 풀었나 보다. 한 10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계획은 이랬다.


가지밥

미역국

감자조림

계란말이


그냥 밥이 아닌 밥 중에 해 본 경험이 있기도 하고 간단한 가지밥. 없어서는 안 될 미역국. 밥이랑 국만 하면 좀 그러니까가 반찬을 좀 더 해야겠는데 애들도 같이 먹으면 좋으니까 떡볶이 떡을 넣은 맵지 않은 감자조림. 반찬이 한 개면 너무 없어 보이니까 가짓수를 한 개라도 늘려야 되는데 지겹긴 해도 가장 자신 있는 계란말이. 역시 부지런히 쉴 틈 없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래 걸렸다. 음식만 해놓고 끝냈으면야 금방 끝났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 놓았다 한 들 싱크대가 개차반이면 아무짝에도 쓸 모 없다는 걸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다행히도. 이런 게 다 디테일이다. 특히 우리 아내 같은 사람이랑 살면 더더욱 디테일에 신경 써야 하는데 난 본디 디테일을 무시하기 일쑤인 사람이라 고충이 많다.


이렇게 한 번씩 몇 가지 반찬을 할 때마다 느낀다. 고생은 죽어라 했는데 차려 놓으면 비루하기 그지없구나.


"차린 게 없네"


라는 엄마와 장모님의 말이 단지 인사치레가 아닌 진심일 수도 있겠다는 걸 매번 느낀다. 물론 나는 진짜 차린 게 없지만. 별 것도 아닌데 모든 걸 마치고 나니 12시 30분. 내 일 좀 하려고 소파에 앉았는데 자꾸 꾸벅꾸벅 졸았다. 이겨내겠다고 의지를 발휘했지만 잠깐 졸았다고 생각하고 눈을 떠서 시계를 보니 4시였다.


?


4시?


그렇다. 소파에 앉아 존 건지 잔 건지 구별하기 힘든 상태로 4시까지 있었던 거다. 방으로 몸을 옮기는데 이미 개운치 않았다. 내일, 아니 오늘이지. 아무튼 아침에도 가장 먼저 일어나 상을 차려야 하는데


'하아. 내일 힘들겠구나'


그래도 우리 사랑하는 아내의 생일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몸 잠깐 피곤한 것쯤이야

라고 무시가 안 되네.


여보. 나도 늙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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