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선물은 육아 해방

18.10.05(금)

by 어깨아빠

잔 것 같지도 않은데 야속한 알람이 울렸고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너무나 피곤했다.


'하아, 오늘 비나 와서 자전거 못 탔으면 좋겠네'


알람이 울릴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럴 수가. 베란다 창으로 보이는 하늘의 색이 잿빛이었다.


'어? 혹시'


얼른 휴대폰을 집어 들어 일기 예보를 살폈다.


[비, 강수확률 80%]


할렐루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더니 나의 고난을 외면치 않으셨구나. 자전거 타고 갈 걸 생각해서 일어났는데 차를 타고 가게 되었으니 시간이 남았다. 그대로 소파로 쓰러졌다. 방으로 들어가면 좋겠지만 너무 아늑하면 다시 못 일어날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방에서 나올 때 소윤이가 뒤척거리는 걸 봤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마 깬 것 같았으나 외면했고 등 위로 쏟아지는 소윤이의 눈빛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소윤이가 문을 벌컥 열고 나와서 소파에 누워 있는 내 위로 몸을 포갰다.


"딸. 잘 잤어?"

"아빠. 왜 여기서 자여?"

"아. 잠깐 누운 거야"

"아빠 일어나세여"

"소윤아. 아빠 너무 피곤한데 조금만 더 자면 안 돼?"

"아. 싫어여 일어나여"


내가 원한 건 1시간도 2시간도 아니고 딱 10분이었는데 그것도 용납되지 않았다. 곧이어 시윤이도 아내도 일어나서 나왔다. 소박한 생일상을 차리고 겸손한 액수의 돈을 건네는 것으로 아내의 생일을 축하해야 하는 나의 의무를 모두 마쳤다. 애들 입에는 가지밥이 안 맞는지 둘 다 잘 안 먹었다. 아내는 모두 맛있게 먹어줬다. 우리 아내는 매몰차지 못해서 내가 만든 음식을 맛없다고 한 적이 없다.


"간장을 좀 더 넣을까?"

"설탕을 조금 넣으면 더 맛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돌려 표현하곤 한다. 오늘은 그런 것도 없이 맛있게 먹었다. 내가 먹어봐도 가지밥, 감자조림, 계란말이는 주부들과 같은 깊이는 없어도 맛있긴 했다. 미역국이 제일 별로였다. 아내는 예전부터 미역국은 끓이면 끓일수록 맛있다고 했는데 이번 미역국은 끓인 지 얼마 안 되었을 때가 제일 맛있었고 점점 맛이 산으로 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아내는 맛있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소윤이와 함께 생일 축하 노래도 불러줬다. 시윤이도 한몫 거들었다. 노래는 못하지만 박수는 열심히.


이런 순간에 딱 이런 순간에. 행복이 찾아온다. 막 엄청 맛있는 거 먹고 어디 좋은 데 가서 누릴 때도 좋긴 한데 이게 진짜구나 하는 느낌의 행복은 딱 이럴 때 느껴진다. 그냥 다들 잠옷 바람에 눈은 퉁퉁 붓고 머리는 새둥지인데 웃음이 끊이지 않고 애들은 계속 시끄럽게 떠들 때.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깊이 젖어든다.


"여보. 이런 게 행복이지"


아내와 나는 대화는 결코 상투적 표현이 아니다. 고로 일상을 좀 무너뜨리더라도 많이 벌어서 많이 쓰는 것이 곧 행복임을 주장하는 혹자들의 의견에 난 아직 동의할 수 없다. 일상이 무너지면 행복도 무너진다. (돈이 무너지면 일상도 무너진다고 받아칠지도 모르고 전면 부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지난밤 과로(?)의 탓인지 불편했던 잠자리 탓인지 몸이 영 뻐근했다. 어째 운전하고 가는 게 자전거 타고 가는 것보다 더 피곤하게 느껴졌다. 낮에 장모님이 집에 오신다고 했다. 딸 생일이니 맛있는 것도 좀 사주고 용돈도 주시려고 오겠거니 했다. 제일 좋은 건 소윤이겠지. 어제는 신림동 할머니. 오늘은 파주 할머니. 권사님(처갓댁의 오랜 절친이자 현재 내 사장 형님의 어머니)도 함께 오셨다고 했다. 다 함께 스타필드에 갔는데 시윤이 요 녀석이 또 끼를 부렸다. 권사님한테만 그렇게 매달리고 웃음을 선사했단다. 심지어 유모차에 앉아 있을 때도 권사님이 아닌 다른 사람(아내를 포함해)이 유모차를 끌면 막 울면서 권사님을 가리키고. 권사님이 끌면 바로 뚝 그치고. 장모님과 권사님이 집으로 돌아가실 때도 시윤이는 자기 할머니는 제쳐 두고 권사님한테 가서 안기고 뽀뽀를 퍼부었다고 했다. 장모님은


"강시윤. 너 아까 할머니가 뭐라고 했다고 이러는 거야?"


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마 적잖이 마음이 상하셨을지도 모른다. 소윤이 때는 일부러 다른 아이를 안고 그걸 본 소윤이가 질투하며 우는 걸 즐기곤 하셨다. 그런데 시윤이는 자주 만나지도 못한 권사님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으니 아마 상심하셨을 거다. 확실히 시윤이가 밀당은 더 잘하는 듯.


아내의 생일이었지만 금요일이라 교회에 가야 하니까 아침 생일상 말고는 같이 뭐 할 수가 없었다.


"여보. 생일 같지도 않다"


맞다. 나도 올해 생일 때 유난히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애 둘한테 치여서 더 그런가.


'그냥 이렇게 지나가네'


이걸로 끝이었다. 아내도 비슷했나 보다.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BHC에서 치즈볼, 바른치킨에서 치킨 한 마리를 사 갔다.


"여보. 생일 축하해"

"그래 고마워"


우리끼리 데이트도 하고 좀 그래야 하는데 최근에 양쪽 부모님들께 맡긴 적이 너무 많아서 차마 그러지를 못했다. 최고의 생일 선물은 뭐니 뭐니 해도 육아 해방일 텐데. 애들 웃고 떠드는 거 보는 게 최고의 행복이랄 때는 언제고 너무 모순인가. 원래 육아는 모순과 역설의 집합체니까.


여보. 생일 축하해. 곧 데이트 하자. 우리 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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