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06(토)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어제 미리 일기 예보를 확인한 터라 아내랑 롯데몰에 가는 걸로 얘기를 했다. 지난번에 505호 사모님이랑 롯데몰에 갔을 때 간이 놀이터에 애들 풀어놓으니 자기들끼리 알아서 놀아서 그 옆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 마시며 수다를 떨었던 기억이 꽤 짜릿했나 보다. 오늘도 우리는 그걸 노리고 있었다. 소확행. 진짜 짧고 순간의, 작은 일이지만 간절히 바라 마지않는 행복이기도 하다.
엄청 일찍 일어나서 깨운 건 아니었는데 무지하게 피곤했다. 아내랑 함께 방에 들어간 건 1시쯤이었는데 누워서 휴대폰 만지작 거리다 보니 훌쩍 시간이 지나서 정작 잠든 건 3시 넘어서였다. 주말이니 서로 조금이라도 더 늦잠을 자게 하기 위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내도 나도. 나오긴 했지만 거실에 누워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여보. 들어가서 30분이라도 더 자고 와"
"아니야. 괜찮아"
"계속 졸지 말고. 차라리 자고 나와"
"그럴까 그럼?"
"아빠 그래여. 좀 자고 나와여"
야. 니가 깨웠잖아. 그럼 깨우질 말든가.
"여보. 그럼 나 30분만 더 잘게"
치열한 육아의 현장을 뒤로하고 거짓말 같이 고요한 안방에 홀로 들어갔다.
"여보 여보. 좀 일어나 봐. 경비 아저씨가 오셨어"
경비 아저씨가 오셨다는 아내의 얘기에 잠에서 깼다. 30분 잔 것 치고는 몸이 엄청 개운했다.
'역시. 길게 잔다고 개운한 건 아니구나. 수면의 질이 중요하군'
"여보, 나 얼마나 잤지?"
"어. 2시간"
아. 그랬구나. 질 좋은 수면을 오래 하면 더 개운하구나. 그랬구나.
덕분에 에너지가 가득 충전됐다.
일찍부터 롯데몰에 갔다. 일단 시윤이가 잠들어서 유모차에 눕혔고 소윤이는 간이 놀이터에 데리고 갔다. 아내는 유모차를 끌고 무지에 가서 애들 옷도 사고 폴바셋에 가서 우리가 마실 커피도 사 왔다. 소윤이는 혼자 놀았는데 역시나 꼭 나를 연계시킨다. 반드시 앉아서 봐야 한다거나 놀다가도 나를 참여시킨다거나. 나도 웬만하면 소윤이 놀 때 딴짓 안 하고 소윤이 보고 있으려 하긴 한다. 그러니 제발 엉덩이 붙이고 한 자리에 있을 수 있게만 해줬으면 좋겠다. 아내가 돌아왔고 소윤이한테 젤리를 사준 뒤 다른 간이 놀이터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 좀 가서 놀아라. 엄마랑 아빠는 여기 앉아서 좀 쉴게'
라고 생각하며 자리를 잡고 있는데 소윤이가 유모차 앞을 지나가다가 빼꼼 나온 시윤이 발을 부왁 건드렸고 시윤이는 꿈틀거리며 눈이 빠질 듯 눈을 비비더니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으. 소윤아"
소윤이가 시윤이 발과 접촉사고를 낼 때 아내와 내가 다급하게 소리쳤고 소윤이도 깜짝 놀랐다. 시윤이까지 깨니 자기가 잘못한 건가 싶어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소윤아 괜찮아. 그런 거 아니야"
네 살의 부주의함에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으랴. 문제는 이런 식으로 잠에서 깨면 시윤이는 대체로 찡찡거린다. 잠을 덜 잤으니까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좀 노는가 싶더니 금방 아내한테 안아 달라고 울며 매달렸다. 안아줘도 짜증내고 내려놔도 짜증내고. 결국 아내는 시윤이를 유모차에 태워서 몇 바퀴 돌러 갔다. 역시 어제의 육아 성공이 오늘의 육아 성공으로 반드시 이어지는 건 아니구나. 아내가 505호 사모님과 누렸던 작은 행복은 그때만 맞고 오늘은 아니었나 보다. 그다지 편안하게 앉아서 커피를 마시거나 쉬지는 못했다. 소윤이만 실컷 놀았다.
점심을 먹어야 했다. 하루가 지나긴 했지만 공식적인 아내생일기념 식사는 오늘 점심이었다. 메뉴를 고민했다. 아내의 생일기념 식사였지만 아이들을 배제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아이들도 같이 먹을만한 메뉴를 선택했다. 보쌈고기와 오리고기가 같이 나오는 두부 정식. 하아. 메뉴를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강시윤은 한 숟가락을 제대로 먹지도 않고 울고 불고 난리였다. 내가 먹여줘서 그런가 싶어 아내랑 자리를 바꿨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시작부터 지옥문이 열리는 듯한 느낌이라 각오를 단단히 했다. 그러다 자기 앞에 음식을 떠서 놔주고 알아서 먹게 하니 좀 잠잠해졌다. 소윤이는 소윤이대로 밥 안 먹고 투정 부리고. 소윤이는 졸림에서 유발된 짜증 수치가 좀 높았다.
"하아. 여보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러게. 생일상 예술이네"
힘겹게 식사를 마쳤다. 아내한테 쿠폰이 있다길래 애들용 기차(아울렛이나 쇼핑몰 가면 있는 천천히 레일 몇 바퀴 도는) 타고 지하 마트에 가서 몇 바퀴 휙 돌고 집에 왔다. 날이 개고 나니까 너무 화창해서 집에 차 대놓고 킥보드랑 푸쉬카랑 태워서 조각 케이크도 사 왔다. 우리 가족끼리는 생일 축하 의식을 거행한 적 없으니 조각 케이크에 촛불 켜고 노래 부르고 촛불 끄고. 다 같이 찍느라 책장에 휴대폰 세워 두고 타이머로 찍었는데 사진들이 영 별로였다. 난 아직 배불러서(뭐 먹은 것 같지도 않은 점심이었는데 배는 엄청 부르니 억울했다) 저녁 생각이 없었지만 애들까지 거르게 할 수는 없으니 또 저녁을 차렸다. 정말 주말마다 느끼지만 하루 세 끼 챙겨 먹이는 게 보통 일 아니구나. 집에서 세 끼 다 챙겨 먹는 남편을 두고 삼식이 세끼라고 불평을 섞어 부르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였구나. 마트에서 산 고기를 구워줬다. 밥과 소고기. 그게 끝이었다. 소고기니까.
오늘만큼은 샤워를 시켜야 해서 밥 다 먹이고 차례대로 샤워도 시켰다. 난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롯데몰에서 돌아온 이후 저녁 차려주고 아내한테 먹이라고 한 뒤 부지런히 설거지하고 다 먹고 나서는 차례대로 씻기고. 소윤이 시윤이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너희가 쉴 틈 없이 움직여야 나의 쉴 시간이 확보된다'
거의 마지막쯤 아내가 제동을 걸었다.
"여보 여보 빨리 와 봐"
"왜?"
"빨리 나 사진 좀 제대로 찍어줘"
아내는 소파에 꽃다발을 들고 앉아 있었다. 사실 누구 못지않을 만큼 사진 찍히기를 좋아하는 아내인데 애 키우다보니 연신 찍어대기 바쁘고. 누구 하나 찍어줄 사람도 없고. 그나마 남편인 나도 요즘은 애들 사진조차도 아내에게 일임하고 있다. 내가 가진 능력 안에서 최대한 성심성의껏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어때?"
"오. 잘 나왔다 잘 나왔다. 마음에 들어"
아내에게 휴대폰을 넘기고 아이들과 아내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침대에 벌렁 누웠는데 다시 아내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여보. 다시 다시"
"왜?"
"아. 속옷 끈이 나왔잖아. 말해줬어야지"
"아 그래?"
속옷 끈이 아니라 씨름 샅바가 나왔어도 아마 못 알아차렸을 거다. 남편이 찍어주는 사진이 다 그렇지 뭐. 다시 나가서 똑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었다. 아내의 최종 승인이 떨어졌다.
아내도 나도 애들 재우면서 (10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살짝 같이 잠들었지만 다행히 다시 일어나서 나왔다.
"여보. 나 나갔다 와도 돼?"
"응? 어디를?"
"나. 스타벅스"
"갑자기 왜?"
"그냥 오늘 너무 생일 같지 않아서"
"오늘 생일 아닌데? 어제였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튼 너무 생일 기분이 안 나서 혼자 나갔다 오려고"
"그래 나갔다 와"
"왜? 싫어? 부담스러워?"
"아니. 어차피 애들 자는데 뭐. 얼른 나갔다 와"
어차피 나도 밀린 글 좀 쓰려면 집중이 필요했고 혼자 있는 게 집중하기에는 좋았다. 그러고 보니 생일인 어제도 그렇고 하루 지난 오늘도 그렇고 생일다운, 뭔가 특별한 무언가가 없었다. 다른 날과 다르지 않은 치열한 육아 전쟁터의 장수였을 뿐. 2시간 정도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 온 아내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내년 생일에는 혼자 여행이라도 보내줘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