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와 남녀평등

18.10.07(주일)

by 어깨아빠

소윤이가 아침밥을 안 먹고 자꾸 장난치고 시간 끌고 그러길래 호되게 혼을 냈다. 사실 밥 먹을 때마다 매번 잔소리하고 싶은 걸 꾹꾹 참느라 고역이다. 아내도 나도. 먹여주면 잘 먹으면서 직접 먹으라고 하면 자꾸 안 먹고 장난친다.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된다고 해도 굳이 또 먹겠다고 하고. 어디 한 번 보자는 식으로 가만히 두면 한 시간 동안 밥을 먹을 때도 있다. 차라리 안 보는 게 낫지. 보고 있으면 속이 안 터질 수가 없다. 왜 그럴까. 이것도 일종의 퇴행 행동인가. 시윤이만 먹여 주는 게 샘나서? 아무튼 오늘은 남은 밥을 치우고 따끔하게 혼냈다.


"소윤이는 오늘 간식도 없어. 끝이야"


당연히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그래도 요즘은 혼내면 무조건 우는 게 아니라 울면서 나름대로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기도 하다. 네 살짜리가 생각을 정리한다고 하기에는 과한 표현인가 싶기도 하지만 느낌이 그렇다. 혼자 막 울다가 자기가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먼저 이러이러해서 그건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하기도 하고. 아니면 혼자 울음을 정리하고 내 옆에 스윽 와서 다시 놀기도 하고. 한참 있다가 소윤이한테 물어본다.


"소윤아. 아까 소윤이가 정말 잘못한 거라고 생각해? 아니라고 생각하면 솔직하게 말해도 돼"

"내가 잘못한 거야"

"뭘 잘못했는데?"

"밥 감사히 안 먹고 아빠 말 안 듣고 숟가락 던진 거"

"그래. 소윤아 그건 정말 잘못된 행동이야. 아빠가 얘기했지. 소윤이를 미워해서 혼내는 게 아니라 소윤이 나쁜 행동을 고쳐주려고 그러는 거라고? 그래도 먼저 잘못한 걸 인정하고 얘기한 건 정말 잘한 거야"


점점 얘기가 통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아지고 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또 내가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도 정확히 지적할 때도 많은 걸 보면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상황무마용 대답을 할 땐 약간 티가 난다. 소윤이도 내 눈치 많이 보겠지만 나도 소윤이 눈치 엄청 보고 있다. 아마 머잖아 내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경우도 많아지겠지. 오늘도 한 번 있었다. 소윤이가 시윤이한테 붙어서 뭔가 하길래 또 괴롭히는 줄 알고


"소윤아. 시윤이한테 그러지 마. 싫어하잖아"


라고 했더니


"그냥 옆에 있었던 거야. 아무것도 안 했어. 아빠는 맨날 자기 맘대로 생각하고"


라고 받아쳤다. 이럴 때는 빠른 사과.


"아. 그래? 미안. 아빠가 오해했네"


교회 갈 준비를 다 하고 나도 옷을 다 입고 애들도 옷을 다 입히고 아내의 준비가 완료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쿰쿰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주로 소윤이가 가장 먼저 고지한다.


"아빠. 똥냄새 나"


하아. 왜 꼭 나갈 준비를 다 하고 나면 그때 퍼지르는 거니 시윤아. 이러다 니 똥 조각이 아빠 옷에 묻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아내는.정신없이 준비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머리까지 완전 착장을 한 내가 시윤이를 씻겼다. 내가 웬만하면 육아의 길을 먼저 간 이들이 남긴 충고나 조언 등을 신뢰하는 편인데 딱 한 가지. 아직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게 있다.


"우리 애기 똥냄새도 사랑스러워요"


똥냄새에 애 어른이 어딨어 그냥 다 똥냄새지. 오히려 더 고약하다. 적응이 안 된다 적응이. 시윤이는 예배 시간에도 늦게 잠들었다. 내가 아기띠로 안았다가 허리가 너무 아파서 유모차에 눕혀서 재워 보려고 슬며시 옮겼는데 처음에는 잘 듯하더니 나랑 눈 한 번 마주치고는 벌떡 일어나서 한참 자고 깬 애처럼 움직였다. 결국 아내가 아기띠로 안고 나서야 잠들었다. 아침의 훈육이 아직 유효했는지 소윤이가 점심은 제법 잘 먹었다. 시윤이는 늦게 잠들기도 했고 아침도 워낙 잘 먹어서 깨우지 않고 좀 더 재우기로 했다.


집에 가려고 나왔는데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그대로 가기에는 아쉬웠다. 교회 맞은편에 있는 학교에 잠깐 들러서 놀기로 했다. 마침 시윤이도 깼다. 어릴 때부터 변하지 않는 강소윤의 특징. 뭔가 막 신나서 놀고 망아지처럼 뛰어다니고 이런 게 없다. 오히려 재미없나 싶을 정도로 뚱해 보여서 물으면 또 그건 아니라고 하고. 아무튼 강소윤 특유의 스타일이다. 잠깐 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목장 모임이 없어서 축구하러 갈 때까지 집에 조금 머물렀다.


"여보. 혹시 여보가 가지 말라고 하면 나는 언제나 흔쾌히 안 갈 준비가 되어 있어"

"무슨 소리야. 며칠 전부터 축구하고 싶다고 난리였으면서. 난 그럴 생각 없거든?"


그래. 이번에는 내가 생각해도 너무 마음에 없는 소리인 게 티가 났다.


오늘은 대화역에 있는 운동장이었다. 차는 두고 가기로 했다. 어차피 요즘은 출근할 때도 지하철로 대화역까지 가니 오늘도 그러기로 했다. 시윤이는 내가 나갈 준비를 하자 자기도 나가는 줄 알고 신발장 근처에서 알짱거리다가


"시윤이는 아니야. 아빠만 갈 거야"


라고 얘기하니 바로 알아차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소윤아. 아빠 갔다 올게"


여보도 시윤이도. 안녕. 모두들 안녕.


실컷 뛰고 집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전화해보니 평균적인 상태였다.(아내의 육아 감당 수치가 한계치 이하로 떨어지지 않은 평시 상태) 다른 집사님 차를 얻어 타고 집 근처까지 왔다. 다시 아내와 통화했다.


"이제 애들은 5분 안에 자러 들어갈 거야. 여보가 우리 저녁 먹을 것 좀 사 와"

"뭘로?"

"여보가 알아서 사 와"

"너무 어려운 미션인데"

"나 지금 고민할 수가 없어. 알았지?"

"알았어"


순댓국이나 한 그릇 먹었으면 좋겠지만 아내가 말한 "알아서"에 국밥류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피자

분식

김밥

중국음식


중에 고르라고 카톡을 보냈다. 아내는 중식만 아니면 다 좋다고 했다. 고봉민 김밥에 가서 김밥, 돈가스, 떡볶이를 샀다. 혹시 아내가 늦게 나올지도 모르니 좀 시간이 지나도 최대한 맛이 변하지 않는 메뉴로 나름 엄선했다.


[나 이제 5분 안에 들어가는데 들어가도 돼?]


답장이 없었다. 최대한 소음이 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한 10여분 뒤에 나왔다. 모자란 거 아닌가 싶었는데 막상 먹고 나니 엄청 배불렀다. 그리고 졸렸다. 엄청 피곤했다. 그대로 뻗어서 스물스물 잠들면 세상 행복할 것 같았지만 할 일이 많기도 하고 진짜 그렇게 하면 살찌려고 작정한 사람 같은 느낌이라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살은 찌지만 그렇다고 작정한 건 아니니까.


얼마 전에 미스터 션사인이 끝나서인지 아내는 다음 드라마를 물색하고 있었다.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클립 영상을 이것저것 뒤져보며 재밌을만한 걸 찾고 있었다. 우리가 먹은 음식의 용기를 치운다고 하고 한 40분. 무화과 먹겠다고 꺼내 놓고 또 한 40분. 이걸 뭐라고 해야 되지. 게으름은 아니다. 아내는 결코 게으르지 않다. 항상 부지런한 건 아니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행동과 행동 사이에 여백이 많은 사람이다.


"아. 설거지는 왜 이렇게 하기 싫을까.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고"


다른 날도 마찬가지겠지만 오늘은 유난히 설거지가 하기 싫은 듯했다. 그렇게 툴툴거리며 일어났는데


"엄마아 엄마아"


소윤이가 깨서 엄마를 찾았다. 아내가 엄청 졸려 보이거나 그러지 않아서 금방 다시 나올 줄 알았는데 아내는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싱크대의 그릇들을 도무지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나도 막 앉아서 꾸벅꾸벅 졸 정도로 피곤한 상태여서 그냥 모른 체하고 들어가서 잘까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깨끗하게 정리된 그릇들을 보며 기뻐할, 나에게 환한 얼굴로 고맙다고 할 아내를 생각하며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생각했다.


(대외용 기록이 아니라 정말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나는 아내가 설거지를 그렇게 해도 설거지해줘서 고맙다는 말은 물론 마음으로도 고맙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데. 왜 아내는 나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감사해하는 것인가. 만약 아내가 일절 감사의 표현이나 고마움의 표시 없이 당연한 듯 넘어간다면 내 안에서는 서운함 이상의 괘씸함이 피어오를 것 같다. 감사할 거면 모두 감사하고 당연할 거면 모두에게 당연해야 하는데 아내가 한 설거지를 당연함이 아닌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경지의 남편이 과연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렇다면 나는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아무래도 늦은 것 같다. 난 이번 생은 망했다.


어제였나 아내랑 재미 겸 기질 테스트하는데 아내는 완고함, 고집, 복수심 이런 단어만 나오면 신이 나서 딱 나라며 얼른 체크하라고 난리였다. 그러면서 자기는 수용적, 부드러움, 온화함 이런 단어 나오면


"난 이거 맞나?"


이러고.


아내가 나보다 성격 좋은 걸 인정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지 혼자 잘났다고 그러는 것 같았다. 조금 얄밉긴 했지만


'너 잘났다'



마음속으로 외치고 넘어갔다. 아무튼 아내가 정의하기로는 난 완고하고 고집쟁이에 수용하지 않는 인간이라 앞으로도 유교적 남녀차별 사상에 쩌들어 헤어 나오지 못할 거다. 그러니 우리 딸이라도 차별 안 당하게 미리미리 가르쳐야겠다.


소윤아. 넌 꼭 설거지해주고 생색내는 남자 말고 니가 해준 설거지에 감사하는 남자 만나라.


(시윤아 넌 니 엄마 같은 여자 만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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