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끝자락에서

19.10.26(토)

by 어깨아빠

목요일에 함께 저녁 먹은 형의 딸(소윤이와 동갑)이 소윤이에게 준 선물이 있었다. 마치 찰흙놀이할 때 쓰는 모양틀처럼 생겨서 당연히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진짜 빵을 자르고 모양을 찍어서 샌드위치를 만드는 장난감인 듯 장난감 아닌 물건이었다. 아무튼 소윤이는 그것 때문에 주말만 벼르고 있었다.


"아빠. 토요일 아침에 그걸로 샌드위치 만들어 먹자여?"

"그래. 맛있겠다"


아내가 어제 들어오는 길에 생크림도 사 놨다. 일단 아침을 차려서 먹고 곧바로 샌드위치 만들기에 돌입했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식빵을 세 장씩 주고 모양틀로 자르고 찍고 하게 했다. 날카로운 칼날이 아니니 당연히 매끄럽게 잘릴 리 없었고, 선명하게 모양이 찍힐 리 없었다. 아이들과의 시간의 성패는 결과물이 중요하지 않다.


"우와. 시윤아. 이것 봐. 시윤이는 새요래 새요. 누나는 콩순이고"

"나늠 재요. 누나늠 콩준이?"

"어. 우와 잘 만드는데?"


"오. 소윤이도 진짜 잘하는데? 그렇게 잘라서 먹으면 맛있겠다"

"아빠. 이것 봐여. 콩순이 완전 잘 찍혔져?"

"그러게. 엄청 선명하게 찍혔다"


육아의 또 다른 이름, 연기.


자른 빵 위에 생크림 바르고, 딸기잼 바르고, 사과랑 감, 키위도 얹고. 그렇게 수제 샌드위치가 만들어졌다. (별로 먹고 싶지는 않았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밥을 먹은 뒤라 배가 불러서 그랬는지 아니면 생각만큼 맛있지 않아서 그랬는지 엄청 맛있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저 만드는 과정에서 끓어오른 흥을 깨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듯 보였다.


원래 아무 일정이 없어서 오후에 뭘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갑자기 약속이 잡혔다. 함께 처치홈스쿨 하는 교감 선생님 가정과 만나기로 했다. 원당의 어느 카페에서 만났다. 산속에 파묻힌 듯 흙과 나무가 가득한 곳이었다. 내부는 고풍스러운 커피잔을 비롯한 장식 소품이 가득했다. 일하시는 분들도 나이가 지긋하시고. 한마디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에는 굉장히 부담스러운 분위기의 카페였다. 교감 선생님네 집은 태어난 지 50일 된 막내까지 애가 세 명이고, 우리는 둘. 애가 다섯이나 됐지만 큰 탈 없이 앉아 있었다.


어른들은 차를 한 잔씩 마시고 애들을 위해 와플을 두 개 시켜줬는데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어른들은 누구 할 것 없이 감히 숟가락이나 포크를 들지 못했다. 애들이 너무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특히 소윤이와 시윤이가.


적당히 앉았다가 일어나서 밖으로 나왔다. 넓은 잔디 공터가 있어서 거기 애들을 풀어 놓고 어른들은 서서 대화를 나눴다. 요즘은 매일매일이 가을의 가장 끝자락이 아닐까 싶어서 더 추워지기 전에 밖에 나가서 시간을 보내려고 애를 쓴다. 오늘도 약간 쌀쌀하긴 했지만 애들이 뛰어놀기에는 괜찮았다. 덕분에 어른들도 나름대로 깊은 대화가 가능했다.


1차는 거기서 정리하고 2차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돈까스 집으로 갔다. 시윤이는 가는 길에 잠들어서 식당 의자에 눕혔는데 계속 깨지 않고 잘 잤다. 무엇보다 교감 선생님네의 50일 된 막내가 한 번도 울지 않고 계속 자 준 덕택에 평화로운 시간이 한참 이어졌다. 시윤이는 계속 잤다. 나가기 전에 일으켜 깨웠는데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밥은 먹자 않겠다고 하길래 그냥 뒀다. 뾰로통하게 나에게 안겨 있다가 나가면서 목마를 태워주니 그제서야 기분이 좋아졌다.


3차는 집 근처의 어느 자그마한 공원이었다. 교감 선생님네가 이사 갈 집이 있는 동네였는데 하천을 따라 산책로와 함께 공원이라고 하기에는 좀 거창하고, 작은 쉼터 같은 곳이 있었다. 아이들이 매번 이별의 순간마다 헤어지기 싫다고 난리를 피우는 통에 어쩌다 보니 3차까지. 3차 장소에 도착했을 때 아내는 체력이 부쳤는지 차에서 좀 쉬다 나오겠다고 했다. 놀이터가 하나 있었는데 하필 모래 놀이터였다.


나도 그렇고, 교감 선생님 부부도 동시에 비슷한 소리를 내뱉었다.


"하아. 모래. 하필"


단이 길어 접어 올린 청바지의 끝단 속에서 촤르륵 하고 모래가 쏟아져 나오면


"밖에서 좀 털고 들어오라니까"


하고 얘기하던 엄마의 심정을 이제서야 좀 이해하고 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침 11시 30분에 만나서 5시가 될 때까지 놀았으면서, 거기서도 헤어진다고 하니 더 놀고 싶다고 괜한 투정을 부렸다. 거기서 인사하고 각자 집으로 흩어졌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잠깐 마트에 들렀다. 내일이 추수감사절이라 소윤이, 시윤이가 교회에 갈 때 과일을 하나씩 가지고 가야 했다. 감과 사과를 샀다. 분명히 추수감사절 과일 때문에 간 건데 오징어도 사고, 아이스크림도 샀다.


"엄마. 이건 뭐에여?"

"이거? 오징어"

"왜 산 거에여?"

"엄마, 아빠 먹으려고"

"이건 뭐에여?"

"아이스크림"

"이것도 엄마, 아빠 먹을 거에여?"

"응"

"우리는여?"

"이건 너희가 못 먹어"

"왜여?"

"그냥 어른들만 먹는 거야"


소윤아. 하겐다즈라 그래. 그거 엄마가 파스타만큼이나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거든.


아침에도 뭔가 번거롭게 샌드위치를 만들었고, 점심도 거하게 먹었고, 무엇보다 하루 종일 밖에 있었더니 매우 피곤했다.


"여보. 저녁은 그냥 간단히 먹이자. 계란밥이나 해서"


일단 집에 들어가자마자 둘 다 화장실로 데리고 갔다.


아까 식당에서 시윤이 먹이려고 싸 온 남은 돈까스를 함께 넣고 돈까스계란밥을 만들어 줬다.


"아빠. 너무 맛있어여"

"아빠. 마지따"


이런 영혼 없는 음식도 맛있게 먹어주니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구나.


아내에게 애들 재우는 걸 맡기고 난 잠시 집에서 나왔다. 집중이 필요한 일이 있어서 카페에 가서 두 시간 정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도 나머지 일을 한 시간 정도 했다.


"여보. 오징어 먹을래?"

"그래"


질겅질겅.


"여보. 아이스크림은?

"먹자"


쯔왑쯔왑.


"여보. 나 이제 진짜 입덧 끝났나 봐"

"그러게. 그런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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