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오리고기

19.10.29(화)

by 어깨아빠

눈을 뜨자마자 부엌에 서서 대용량 오리고기볶음을 만들어야 하는 아내를 응원하며 출근했다. 얼마나 부담감이 심했으면 자는 내내 야채 써는 꿈을 꿨다고 했다. (야채는 어젯밤에 다 썰어놓고 잤는데도.) 대량의 반찬을 만들어야 하는 부담감, 맛이 제대로 나올까 하는 걱정을 안고 있었다.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나서 해놓고 출근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뒤늦게 했다. 아마 아내가 임신 초기처럼 꾸엑꾸엑 하느라 정신없었으면 진작에 그 생각도 했을 텐데 요즘 내가 초심(?)을 잃었나 보다.


"여보. 오리고기는 잘 됐어?"

"어, 어떻게든 하긴 했어"

"맛은?"

"별로였던 거 같아"

"왜? 잘 안 먹었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내가 느끼기에"

"에이. 다 먹었으면 맛있었겠지. 수고했네"

"여보는 어디야?"

"난 200번 타고 가는 중이야"

"아 그래? 우리도 끝나서 가는 중인데 남옥 언니랑 스타필드 잠깐 가려고"

"그럼 나도 그쪽으로 갈까?"

"이따 도착할 시간쯤 다시 연락해 줘"

"알았어"


삼송역에 도착해서 전화했더니 스타필드로 오라고 했다. 나의 등장과 함께 505호 사모님은 퇴장(?)했다.


"여보. 여기서 저녁 먹고 들어갈까?"

"그럴 줄 알았지. 뭐 먹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탄탄면, 비빔밥, 샌드위치를 샀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는 비빔밥을 좀 덜어주고 샌드위치를 먹이려고 했는데, 시윤이는 샌드위치를 아예 입에 대지도 않았다. 시윤이는 별로 배가 안 고파서(중간에 간식을 많이 먹었다고 했다), 소윤이는 졸려서 먹는 태도가 영 시원치 않았다. 감사하게, 성실하게, 부지런히 먹으라고 채근하기는 했지만 좀 미안하기도 했다. 차린 거 없는 밥상에 앉혀 놓고 맛있게 먹으라고 재촉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을 담아 동전 놀이기구(?)가 모여 있는 곳에 가서 각자 원하는 거 하나씩 하게 해줬다. 평소에는 거의 없는 일이다. 시도 때도 없이 사 먹는 커피값은 아깝지 않아도 어쩌다 한 번씩 요구하는 게임비(?)는 너무 아깝다.


"아빠. 돈 이떠여?"

"시윤아. 돈 있어도 막 하는 게 아니야"

"왜여?"

"돈을 이런 데다 쓰면 너무 아까우니까"


언젠가 소윤이가 조금 더 크면 '아빠. 커피는 더 비싸잖아여' 라고 반론을 제기하는 날도 오겠지. 오늘은 특별히 거금 2,000원을 들여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선택권을 줬다. 소윤이는 농구 게임, 시윤이는 자동차 게임을 골랐다. 얘들아, 원래 이렇게 가끔 해야 쾌감이 큰 법이야.


아내는 엄청난 피로를 호소했다. 안 그래도 처치홈스쿨 있는 날은 피로가 가중되는데 아침, 아니 어젯밤부터 오리고기에 시달리기까지 해서(심지어 꿈에서까지) 거의 녹초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소윤이와 시윤이를 씻기고 아내에게도 잘 준비를 하라고 재촉했다.


"소윤아, 시윤아. 잘 자. 여보도 푹 자"


모두 자러 들어가고 거실 소파에 쓰러지듯 앉을 때, 그 찰나의 몇 초가 하루 중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때마다 TV 생각이 난다.


'캬아. 이렇게 앉아서 딱 TV 켜고 리모콘질 하면 세상 행복하겠구나'


동시에 늘 생각한다.


'TV를 놓지 않은 건 정말 정말 인생에서 손꼽을 정도의 잘 한 일이다'


TV가 있었다면 일기 따위는 쓰지도 못했을 거다.


소윤이가 아까 스타필드에서 찍은 사진을 보다가 하나를 고르면서 얼른 그걸 배경사진으로 바꾸라고 해서 바꿨는데 뭔가 괜찮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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