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02(토)
다행히 소윤이의 증세는 급격하게 좋아졌다. 자는 동안 기침도 거의 안 했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상태가 매우 좋았다.
"소윤아. 안 힘들어?"
"네. 하나도 안 힘들어여"
"아프지도 않고?"
"네"
"숨 쉬는 건?"
"그것도 괜찮아여"
가래 끓는 기침을 가끔 하긴 했다. 점심때는 아내 처가 식구들과 함께 아내 이모님을 만나 밥을 먹기로 했다. 어제 시윤이의 쾌활한 모습을 보고 넋두리를 하던 소윤이는 하루 만에 다른 사람이 되어 마치 어제 시윤이처럼 활력이 넘쳤다. 말도 엄청 잘 들었다. 생기가 넘치는데 말까지 잘 듣다니.
아침을 굉장히 늦게 먹었다. 11시 30분이 약속 시간이었는데 거의 10시가 넘어서 아침을 먹었다. 식당에 도착해 소윤이는 할머니 옆에, 시윤이는 아내 옆에 앉았다.
"여보. 일단 우리나 맛있게 먹자. 애들 어차피 아침 늦게 먹어서 열심히 안 먹을지도 몰라"
"그래"
난 두 녀석 모두와 인접하지 않아서 정말 자유롭게 식사를 했다. 큰 소란이 없었던 걸 보면 둘의 식사 태도 자체가 나름 괜찮았던 것 같다. 밥 먹고 근처 카페에도 잠깐 갔는데 주차장 옆에 조그맣게 야외 자리가 있고 애들이 놀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애석하게도(?) 모래 놀이였다. 아니나 다를까 소윤이와 시윤이는 바로 거기 자리를 잡았다. 모래 놀이인 건 둘째치고 누군가 한 사람이 나와서 애들이랑 있어야 했다. 날씨가 그렇게 춥지 않아서 어른들께 야외로 자리를 옮기자고 말씀드릴까 했는데, 미세 먼지 수치가 매우 나쁘다며 아내가 만류했다. 아내가 아이들에게 가서 설명하고 데리고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케이크를 정신없이 먹고 나서는 다시 엉덩이를 떼었고 결국 장인어른이 다시 데리고 나갔다. 다른 게 아니고 폐렴이다 보니 조금 걱정은 됐지만 집에만 있을 게 아니고, 이미 외출을 한 마당에 어쩔 수 없었다.
두시가 거의 다 되어서 헤어졌다. 오후에는 부모 교육을 받으러 가야 했는데 아내만 가기로 했다. 시윤이도 함께. 소윤이는 멀쩡했지만 폐렴이 전염성이 있다 보니 아무래도 가지 않는 게 좋을 듯했다. 덕분에 나는 소윤이랑 데이트. 처음에는 시윤이가 자기도 누나와 아빠를 따라가겠다고 했다. 순간 고민했다. 둘 다 데리고 가서 아내에게 조금이라도 편안함을 줄까 하고. 이내 생각을 거뒀다. 소윤이가 '아빠와 데이트' 하는 걸 나름 기대했다. 소윤이의 기대를 저버리는 게 미안해서 시윤이는 아내의 손에 넘겼다. 대신 시윤이의 마음이 동요하지 않도록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아빠하고 누나는 어디 가여어어?"
"그냥 집에 있으려고"
아내와 시윤이는 나와 소윤이를 내려주고 교회로 갔다. 시윤이는 낮잠 시간이 한참 지났기 때문에 당연히 차에서 잘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그 상태로 교회에 가면 아내에게 굉장히 고된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소윤이랑 집에 들러서 어질러진 집도 정리하고, 설거지도 하고, 나오는 길에 재활용 쓰레기도 버렸다. 말만 데이트였지 어디에서 뭘 할지 정하지는 않았다.
"소윤아. 우리 뭐 할까?"
"도서관 갈까여?"
"도서관?"
"네"
"그런데 도서관에 가면 너무 오래 있어야 해서"
"그래여? 왜여?"
"엄마가 부모 교육 끝나려면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거든. 소윤아. 그럼 스타필드 갈까?"
"그래여"
사실 좀 막막하기도 했다. 아무 목적 없이 스타필드에 가서 네 시간 넘게 시간을 보내야 했으니까. 기대와 막막함을 동시에 안고 버스를 타고 스타필드로 갔다. 소윤이는 일단 버스를 타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소윤아. 우리 이제 뭐 하지?"
"아빠. 일단 젤리를 사러 갈까여?"
"젤리? 그럴까? 아니면 아빠가 이따가 맛동산 사줄까?"
"고민해 볼게여"
스타필드 3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고민한 소윤이는 젤리를 택했다. 일단 3층으로 가서 젤리를 샀다. 위니비니에서 젤리를 사 본 사람은 알겠지만 2,000원어치 정도면 진짜 얼마 안 된다. 소윤이는 그걸 스타필드에서 나올 때까지 먹었다. 소윤이가 나보다 절제력이 좋다. 나는 시윤이 과다. 그냥 있는 대로 한 방에 털어 넣는다. 소윤이는 나름의 계획과 순서에 따라, 맛있는 건 나중에, 덜 단 것부터.
"소윤아. 젤리 샀으니까 우리 이제 뭐 하지?"
"아빠. 저번에 갔던 그 자동차 타고 놀이 기구 있는데 갈까여?"
"아, 그럴까?"
저번에 시윤이가 탔던 자동차 게임 한 판,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공 받기 게임 한 판. 그렇게 했다.
"소윤아. 재밌어?"
"네. 재밌어여"
"소윤아. 이제 저기 밑에 차 타러 가볼까?"
"그러자여"
현대자동차 전시장이 있어서 가봤다. 팰리세이드 3열이 탈만한지 앉아 보려고. 소윤이는 보이는 모든 차에 타봤다.
"아빠. 이 차는 엄청 크다여"
"그치? 우리도 내년에 롬이 나오면 살까?"
"카니발 사야 되는 거 아니에여?"
"그렇긴 하지"
소윤이가 G90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빠. 저것도 타보자여"
"아, 아니야. 그건 안 타볼 거야"
"왜여?"
"그건 어차피 우리가 안 살 차야"
"왜여?"
"우리는 내년에 가족이 다섯 명이니까"
소윤아. 사실 네 명이어도 그 차는 좀 그래. 괜히 그렇게 느낀 건지는 모르지만 유독 G90 옆에서만 직원들이 서 있었다.
"소윤아. 마트 구경하러 갈까?"
"좋아여"
"힘들면 안 가도 돼"
"아니에여. 안 힘들어여"
"마트 구경 하고 싶어?"
"아빠 마음대로 해도 돼여. 저는 해도 되고 안 해도 좋으니까 아빠가 정해여"
"그래? 안 하고 싶으면 안 가고 싶다고 해도 되는데"
"그런 건 아니에여. 가고 싶기도 하지만 아빠가 힘들면 안 가도 된다는 말이에여"
"그래, 알았어"
소윤이는 약간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아니면 엄청 큰 애거나.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릴만한 말이나 행동이 없었다. 당연히 전혀 힘들지도 않았고.
계속 소윤이 상태를 확인하긴 했는데 더 나빠지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다만 중간에 물을 마실 때 보니 손을 떨었다. 종이컵을 내려놓게 하고 손을 펴보라고 했더니 역시나 떨렸다. 수전증처럼. 내 생각에 어쨌든 아팠으니 기운이 좀 달려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었다. 소윤이도 좀 쉬게 할 요량으로 스타필드 안에 있는 트레이더스에 가서 소윤이를 카트에 태우고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다. 이것저것 시식을 하며 배도 채우고 체력도 회복했다. 물론 나는 아니었지만.
소윤이가 집에서 나올 때 오만가지 잡동사니를 다 챙겼다. 가슴으로 낳은 누리(아기 인형 이름)와 그를 보살필 때 필요한 여러 가지. (온갖 장난감, 포대기, 책 등) 그걸 자기 가방에 바리바리 담았다. 차도 없어서 너무 번거로우니 놓고 가라고 했지만 너무 밝고 공손하게 요청하는 바람에 그러라고 했다. 결국 모두 내 손으로 넘어왔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거기에 나도 내 가방에 이것저것 챙겨왔다. 혹시나 카페라도 가게 되면 소윤이에게는 스케치북과 펜을 내어주고 나는 책이라도 읽을 생각으로. 소윤이만큼이나 헛된 짐 꾸리기였다.
마트를 쭉 돌면서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여보. 캡슐 살까?]
집에 커피 캡슐이 다 떨어져서 사야 했다.
[응. 사 와]
커피 캡슐을 사러 가는 길에 소윤이가 어묵이 먹고 싶다고 했다. 소윤이는 작은 거, 나는 큰 거 하나를 사서 먹었다.
"소윤아. 재밌어?"
"네. 재밌어여"
"뭐가 재밌어? 그냥 돌아다니기만 하는데"
"그래도여. 아빠랑 이렇게 둘이 다니니까 재밌잖아여"
"그래? 아빠도 소윤이랑 데이트하니까 재밌어"
"아빠는 왜 재밌어여?"
"소윤이랑 맛있는 것도 먹고 구경도 하고. 아빠는 소윤이랑 있으면 다 좋아"
커피 캡슐 사는 것을 마지막으로 집에 돌아왔다. 저녁은 아내와 따로 먹기로 했다. 소윤이랑 밖에서 먹을까 하다가 집에 가서 주먹밥을 만들어 먹기로 했다. 거의 네 시간을 돌아다녔는데 힘들지 않았다. (물론 육체의 피로는 있었지만) 일을 쉬게 되면서 계획한 일 중에 소윤이랑 둘이 여행 가기가 있었다. 오늘 전까지만 해도 괜찮을지, 뭘 해야 할지 걱정이 좀 있었는데 오늘부로 다 사라졌다. 오늘만큼은 나도 소윤이의 양육자, 보호자를 넘어서 정말 재미가 있었다. 진정으로 데이트 같은 느낌이랄까.
주먹밥을 만들어 먹고 아내를 기다리려고 했는데 아내가 너무 늦을 것 같다며 먼저 자라고 했다. 아내를 기다리던 소윤이가 상심할까 봐 걱정을 하며, 아내에게 직접 얘기하라고 했다. 소윤이가 아무런 이상 행동(?) 없이 아내와 통화를 마쳤다.
"소윤아. 엄마가 아빠랑 먼저 자라는 얘기도 했어?"
"네"
"아, 그래?"
소윤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엄마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는 예고 없는 통보에도 평정심을 유지하다니. 정말 뭔가 다른 하루였다. 소윤이는 한 번도 징징거리거나 울지 않았고, 나도 한 번도 얼굴을 붉히거나 짜증이 '나지' 않았다. (짜증을 내지 않은 날은 있어도, 짜증이 '나지' 않은 날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아프고 나서 큰 건가.
소윤이랑 둘이 방에 들어가 누웠다.
"소윤아. 오늘 아빠랑 데이트해서 좋았어?"
"네. 좋았어여"
"아빠랑 여행 가도 재밌을 거 같지?"
"네"
"엄마 없이 자야 되는데 괜찮겠어?"
"1박 2일 정도는 괜찮져"
"그래. 아빠랑 여행 꼭 가자"
소윤이는 금방 잠들었고, 옆에 누워서 휴대폰을 만지며 쉬고 있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20kg 쌀 포대를 지고 오듯 시윤이를 어깨에 메고 들어왔다. 시윤이를 소윤이 옆에 눕혀 놓고 나온 아내가 소파에 쓰러지며 말했다.
"하아. 진짜 힘들다"
내가 소윤이와 세상에 둘도 없을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내는 초특급 고난의 터널을 통과했다. 낮잠을 자지 않은 시윤이는 부모 교육 내내 자기가 징이라도 된 마냥 징징거렸고, 똥도 퍼질렀다. 계속 울고 짜증 내고, 싸고, 징징대고. 아내는 후회했다고 했다.
'아, 그냥 얘도 맡길걸'
나는 오늘 하루가 얼마나 행복하고 '정말 딸이랑 데이트하는 느낌'이었는지 열변을 토했고, 아내는 오늘 하루가 얼마나 힘들고 '정말 제대로 육아하는 느낌'이었는지 쏟아냈다.
그래, 소윤아. 오늘 너와 나의 행복한 시간은 엄마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