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06(수)
소윤이와 시윤이의 기상 시간이 약간 뒤로 밀린 느낌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칼같이 일찍 일어나던 것에 비해 한 번씩 늦잠을 자는 날이 생긴다. (그래봐야 8시 언저리지만.) 덕분에 오늘도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예정된 일정이 아무것도 없어서 한없이 늦장을 부리다 보니 그리되었다.
늦은 아침 식사를 하고 한껏 농땡이를 피우다가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사실은 아내에게 얘기했다.
"소윤아, 시윤아. 우리 오늘 예배드리고 장난감이랑 책 정리하고 버릴까?"
오랜 숙원 사업이었다. 책, 장난감, 옷 정리. 옷은 아내가 하나하나 살펴야 하니 가장 나중으로 미루고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책과 장난감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우선 장난감부터. 정리의 수고를 덜기 위한 선택이었다. 집은 넓지 않은데 장난감은 많다 보니 (사실 다른 집에 비하면 그렇게 많지도 않지만) 애들 재우고 나와서 장난감 치우느라 꽤 많은 힘을 썼다. 그렇게 치우고 정리해도 별로 깔끔한 느낌이 나지 않는 게 문제였다.
일단 각종 카트와 유모차 같은 끌 것들을 버렸다. 소윤이가 가슴으로 낳은 '누리(아기 인형 이름)'를 돌볼 때 필요한 유모차 한 개만 남겨두고 다 버렸다. 제법 부피가 큰 장난감도 버렸다. 피아노(이건 하람이 줬다.), 싱크대 등. 중간 크기의 냉장고, 자판기, 뽀로로 전화기도 버리고. 자잘한 것들은 웬만한 건 다 버렸다. 이름 모를 블록도 버리고.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던 인형들도 싹 버리고.
자석 블록, 기차, 레고, 퍼즐, 자동차(시윤이의 애장품), 아기 인형 및 그 부속품(소윤이의 애장품), 뽀로로 의자, 토끼 소파 정도만 남기고 다 버렸다. 남은 장난감은 다이소에서 파는 중간 크기의 투명 상자 네댓 개 정도에 정리가 가능한 양이었다. 어찌나 속이 후련하던지.
소윤이는 인형을 버릴 때 눈물을 보였다. 사실 꼭꼭 처박아 둔 거라 평소에는 아예 가지고 놀지도 않았던 것들인데 괜히 보이니까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었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이럴까 봐 아이들 없을 때 아내랑 차분히 하고 싶었지만, 예전에 아내가 명언을 남긴 적이 있었다.
"애들이 없으면 갑자기 놀고 싶어질 텐데"
소윤이는 이따금씩 정말 서글픈 듯 울었지만, 난 알고 있다. 순간의 정이라는걸. '누리' 정도 되는 정을 나눴으면 모를까 나머지는 그저 버리지 못하는 인간의 습성의 발현일 뿐이다. 시윤이는 의외로 매달리는 게 없었다.
그다음은 책. 책장에 보지도 않고 보지도 않을 책이 참 많았다. 그러다 보니 괜히 자리만 차지해서 정작 애들 책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지금 책장에 꽂혀 있는 아이들 책 중 대부분은 소윤이 수준에 안 맞는 것들이라 교체가 필요했다. 일단 어른 책을 싹 걸러냈다. 아이들 책 중에서도 별로인 것들을 골라냈다. 커다란 상자로 네댓 개 정도나 나왔다. 재활용 쓰레기장을 네댓 번 왔다 갔다 하면서 버렸다.
너무너무 후련했다.
"소윤아, 시윤아. 봐봐. 우리 집 엄청 깨끗해졌지?"
"맞아여"
한 서너 시간 걸렸나 보다.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보람이 있었다. 군데군데 텅텅 빈 책장을 보니 마음이 시원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버리는 걸 그렇게 아쉬워하지 않아서 수월했고.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컸다. (이 정도 규모의 일은 대부분 우리 예상을 넘는 무언가를 쓰게 된다.) 아내는 방으로 들어가서 잠깐 누워있겠다고 했다. 아예 낮잠이라도 한숨 자랬더니 그건 싫고 아주 잠깐만 눈을 붙이겠다고 했다.
"여보. 15분 있다 안 일어나면 나 깨워. 꼭 깨워야 돼. 알았자?"
"오키"
15분 후 아내를 깨우러 방에 들어갔지만 아내는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10분을 더 자고 아내가 나왔다. 그 사이 소윤이와 시윤이한테 요거트와 머핀을 줬다. 짐이 사라지고 집이 깨끗해지니 애들이 좀 어질러도 마음의 평화가 쉽게 깨지지 않았다. 진작에 치울 걸 그랬다.
아내에게 저녁 반찬거리가 좀 있냐고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없어. 뭐 먹지?"
"나가서 뭐 재료라도 사 올까?"
아내한테 아주 잠깐이나마 혼자 있을 시간도 주고,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던 애들한테도 바깥공기를 좀 쐬게 해주려는 의도였다.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피자 스쿨에서 피자 사 올까?"
"피자 스쿨? 피자 스쿨은 좀 싫다"
결국 아내가 이미 찾아놨던 다른 피자집에서 배달을 시켰다. 그것과 상관없이 애들을 데리고 나가긴 했다. 계란도 사고, 장난감 담을 통도 사러. 짧지만 즐거운 외출을 생각했는데 소윤이는 울면서 들어왔다. 한살림에 가서 진열된 물건에 자꾸 손을 대며 만지길래 그러지 말라고 손목을 낚아챘더니 아프다면서 짜증을 냈고 (정말 아팠던 것보다 손목을 꽉 잡은 것에 대한 나름의 반항이랄까) 그에 대한 훈육이 들어갔다.
피자 한 판으로는 좀 부족할까 싶어서 만두도 쪘는데 아내가 세트 메뉴를 시켰다는 걸 말해주지 않았다. 피자, 오븐 스파게티가 함께 왔다. 양이 많긴 했지만 구성은 괜찮았다. 소윤이는 피자 대신 만두를 많이 먹고 시윤이는 만두도 잘 먹고 피자도 잘 먹었기 때문에. 물론 오늘도 가장 배부른 이는 나였다. 얼마 전 소윤이가 나에게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던 게 생각났다.
"아빠. 그런데 아빠는 왜 맨날 다이어트 해여?"
글쎄. 아빠도 모르겠어. 먹었으니까 빼려고 하는 건지, 먹으려고 빼는 건지. 중요한 건 이유야 어찌 됐든 잘 안 빠진다는 거야.
제법 고된 하루를 보냈지만 아내와 나에게는 각각 기대하는 구석이 있었다. 일단 나에게는 축구가 있었고, 아내에게는 조기 퇴근이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 둘 다 낮잠을 안 재워서 밤잠을 위한 준비를 엄청 빠르게 진행했다. 7시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아내와 아이들이 방에 누웠다.
[동백꽃필무렵] 하는 날이라 아내도 꿈에 부풀어 있었다. 얼른 재우고 여유롭게 시간 보내다가 집중해서 드라마를 보겠다는. 이런 날은 아내가 탈출도 잘 한다. 막연하게 '나가야 한다'가 아니라 '나가서 동백이 봐야 한다'라는 뚜렷한 목표의식이 있으니까.
축구를 마치고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어. 동백꽃 보고 있어?"
"아니"
"왜?"
"아, 이 녀석들이 자꾸 깨 가지고"
"진짜?"
"어"
"그냥 알아서 자라고 눕혀놓고 나오지"
"그렇게 했지. 그런데 안 자고 계속 울면서 또 나오고"
"시윤이가?"
"시윤이 깨서 들어갔더니 소윤이도 깨고"
"그래서 못 봤어?"
"보다가 끊겼지 뭐"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과자 두 봉지를 사서 들어갔다. 집을 한참 나갔다 들어왔더니 다시 감동이 밀려왔다.
"여보"
"어?"
"너무 좋다"
"뭐가?"
"다 버려서"
"그렇지? 잘 버렸다 진짜"
한참 감상했다. 장난감과 너저분한 짐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던 공간을.
"어, 대박"
"왜?"
"KBS Drama에서 재방송 한대"
"지금?"
"어"
"잘 됐네"
동백아, 우리 아내 좀 잘 위로해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