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07(목)
아내가 어제 자기 전에 미리 얘기를 했다.
"여보가 내일 아침에 볶음밥 해 줘"
모두 비슷한 시간에 일어났다. 난 눈을 뜨자마자 주방으로 가서 볶음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냥 파, 마늘로 기름내고 계란을 함께 넣은 초간단 볶음밥. 네 그릇에 잘 나눠 담았다. 나도 앉아서 같이 먹었다. 가장 빨리. 원래 먹는 속도가 빠르기도 하지만 더 서두르기도 했다. 일을 쉬게 된 뒤로부터는 [아내와 아이들의 정시 출발을 위한 조력자]가 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되었다. 시윤이가 먼저 밥을 다 먹어서 시윤이부터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다. 그다음은 소윤이. 아내가 최대한 아이들에 신경 쓰지 않고 본인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아내와 아이들은 처치홈스쿨 기도 모임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집에서 나갔다. 시윤이는 아빠가 집에 남아 인사를 했더니 장난인 줄 알았는지 얼른 나오라고 했다.
"시윤아. 아빠는 안 가는 거야. 시윤이랑 엄마랑 누나만 가는 거야"
"아아아"
"얼른. 엄마랑 누나 벌써 엘리베이터로 갔잖아"
"아빠가 데다 주데여어"
시윤이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까지 갔다.
"여보. 소윤아, 시윤아. 잘 갔다 와"
일주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어색한 이 광경. 집에 돌아오니 일단 설거지가 눈에 들어왔다. 집에서 노는 건 아니었지만 집에 있는 이상 집안일을 외면하기 힘들었다.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언젠가 (아내가 귀가하기 전에) 할 계획임에도 불구하고, 잠시 미루는 것조차 뭔가 내 도리를 다 하지 않은 것 같은 어떤 찜찜함이 따라붙었다. 얼른 해치우는 게 낫다. 아내는 특별히 빨래가 다 되면 건조기로 옮겨줄 것을 부탁했다. 착한 아내는 먼지망도 다 비우고, 물통도 다 비워놨다. 빨래만 옮겨서 시작 버튼만 누르면 되는 상태로.
가사 노동의 시간은 참으로 신비롭다. 국방부의 시계가 멈춰 있는 느낌이라면 가사 노동의 시계는 누군가 손가락을 넣어서 분침의 등을 떠미는 듯한 느낌이다. 뭐 한 것도 없는데 훌쩍 지나 있고.
집안 일과 개인의 할 일을 하다 보니 금방 오후가 되었다. 아내는 소윤이 병원에 들렀다 온다고 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꽤 늦은 오후에 돌아왔다. 소윤이야 당연하고 시윤이도 낮잠을 안 잤다고 했다. 아내는 어딘가를 가고 싶어 했다. 그게 어디든. 집이 아닌 어디든.
소윤이는 폐렴 소리는 깨끗해졌는데 중이염기가 조금 있어서 웬만하면 찬바람은 쐬지 않는 게 좋겠다는 진단을 받았다. 덕분에 놀이터나 공원에 갈 수는 없었다. 아마 가능했다 하더라도 놀이터를 가지는 않았겠지만. 아내는 좀 멀리라도 가고 싶어 했는데 시윤이가 걸렸다. 낮잠을 자지 않았으니 차에 타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잠들 테고, 아내는 그건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동백이를 봐야 하니까.
아내의 가장 큰 욕망과 우리가 처한 현실은 충돌하고 있었다.
아내의 욕망 : 맛있는 커피가 마시고 싶다
우리의 현실 : 집 근처에는 맛있는 커피가 없다. 멀리에는 있지만 그건 위험하다.
아내는 욕망 충족을 위한 정면 돌파를 택했다. 금촌에 있는 [오늘]과 대화동에 있는 [맑음케이크] 두 곳을 놓고 고민하다 후자를 골랐다.
"여보. 그럼 거기 근처에서 저녁도 먹자"
"그래. 여보가 찾아봐"
시윤이에게 물었다.
"시윤아. 졸려?"
"네"
"아, 많이 졸려?"
"네"
"그렇구나. 그럼 그냥 집에 있다가 자야겠다"
"네?"
"집에 있다가 자야겠다고"
"아니에여어. 시더여어어"
"시윤이 졸리다며"
"조굼만 절려여어어어"
"시윤아. 그럼 차에 타서 자지 말고 누나랑 놀면서 가. 알았지?"
"네에"
"소윤이도 시윤이 잠 안 들게 좀 도와줘?"
"알았어여"
내비게이션을 찍어보니 20-25분이 걸린다고 나왔다. 시윤이는 아내와 내가 걱정한 것보다, 아니 전혀 졸려 하지 않고 아주 멀쩡한 상태로 목적지에 도착했다. 소윤이의 공도 컸다. 아내와 나는 안심했다.
대화동의 어느 분식집에 들어갔다. 김밥, 쫄면, 떡볶이를 시켰다. 애들을 주기 위한 꼬마 김밥도 시켰다. 시킨 음식이 나오고 막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시윤이가 의자에 앉아 고개를 꾸벅거렸다.
"시윤아. 정신 차려 봐. 밥 먹어야지"
정신을 못 차렸다. 오히려 점점 더 잠에 빠졌다. 아내와 나의 안심은 방심이었다. 결국 시윤이는 아내에게 기대서 잤다. 한 30분 정도 잤나 보다. 소윤이도 졸린지 먹는 게 시원찮았다. 아내와 나만 배불리 먹고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시윤이는 카시트에 태우니 잠에서 깼다. 카페에 도착해서 주문을 할 때만 해도 잠에 취해 있더니 마카롱 하나를 먹으면서 기력을 회복했다. 누나랑 잘 놀던 시윤이가 아내에게 질문을 던졌다.
"엄마아. 우디(우리) 직당(식당) 언제 가여어어?"
"식당? 갔다 왔는데"
"안 갔다나여어어"
"시윤이 잠들었잖아. 그때 식당 갔다 왔어"
"네?"
특유의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다시 누나한테 갔다.
집에 가기 전에 잠시 처갓집에 들렀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는 미리 잠깐만 있다 갈 거라고 작업을 해 놨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불필요한 떼와 그로 인한 체력 소모를 막기 위해서. 소윤이와 시윤이는 그 짧은 시간에 온갖 간식을 먹어댔다. 레모나를 마지막으로 오늘의 간식은 종료되었음을 알렸다. 잠시 후 집에 가려고 생각했던 시간이 거의 다 됐을 때 소윤이가 초콜렛 하나를 들고 오더니 먹어도 되냐고 물었다.
"소윤아. 아까 레모나 먹을 때 그게 마지막이라고 했잖아"
소윤이는 대뜸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졸음과 피곤으로 인해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잠시 상실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소윤아. 오늘은 끝이야. 그건 챙겨놨다 나중에 먹어"
더 이상 협상이나 절충의 가능성은 없음을 선언했다. 시윤이는 TV를 보고 싶다고 했다. 그냥 말만 한 게 아니라 한껏 애교를 담아서 나름대로 아양을 떨며 얘기했다. 결국 난 넘어갔고 장모님이 [방귀대장 뿡뿡이]를 틀어주셨다.
"소윤아, 시윤아. 긴 바늘이 9에 가면 끄고 가는 거야. 알았지?"
아내는 미리 TV 전원 차단 및 귀가 시간을 일러줬다. 중간중간 얼마나 남았는지도 알려주고. 이게 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서로 필요 없는 체력 소모를 줄이자는 의도였다.
"자, 이제 끄고 가자"
"아빠. 따요. 따요"
"시윤아 뭐라고?"
"따요 보고 지퍼여어"
"타요?"
"네"
"아, 아니야. 아까 엄마가 말씀하셨잖아. 이제 우리 집에 가야 돼"
"아아아악. 아니야아아악. 따요오오오오"
시윤이는 짧고 굵게 떼를 쓰고 울고 나서 잔잔해졌다. 소윤이는 초콜렛을 거절당한 이후로 졸린 게 증폭됐는지 소파에 앉아 아무런 말 한마디 없었다. 덕분에 떼도 없었고. 눈만 안 감았지 거의 자는 것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소윤이는 차에 태우자마자, 시윤이는 집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쯤 잠들었다. 무사히 방에 눕혔다. 아내는 동백꽃필무렵을 시청하고 나서 조금 더 있다가 자러 들어갔다.
"여보. 괜찮겠어? 두부조림?"
"어, 뭐 하면 되지"
아내가 내일 처치홈스쿨 반찬으로 두부조림을 해야 하는데 내가 할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어려운 건 아니었는데 워낙 늦게 시작했다. 1시에. 새벽 1시. 다 마치고 나니 2시.
눈 뜨자마자 볶음밥. 눈 감기 전에 두부조림.
여보, 잊지 마. 나의 이 수고와 헌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