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09(토)
(내) 부모님 댁에 가기로 했다. 아내 생일(이자 엄마 생일)에 간 게 마지막이라 자식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아내도 나도 가면 편히 쉴 수 있으니 억지는 아니었다. 의무 방어인 동시에 약간의 해방이랄까.
시간의 압박이 없으니 아침부터 늘어졌다. 아침도 늦게 차리고, 먹고 나서도 준비하느라 분주하지도 않고. 상황이 한가할 뿐 육아의 일과는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지만.
애들은 어제 처치홈스쿨에서 싸 온 가지밥을 데워줬고, 아내는 어제 남은 김치찌개 국물에 라면을 끓여줬다. 롬이를 생각하면 라면은 정말 안 되지만 집에 밥이 없었다. 마땅한 반찬도 없었고. 역시 어제 없는 오늘은 없군.
난 대충 커피나 한잔하는 걸로 아침을 때웠다. 모두 아침을 먹고 나서 딸기를 후식으로 먹으려고 씻고 있었다. 딸기가 아주 달고 맛있어서 딸기로 아침을 대신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딸기를 씻고 있는데 시윤이가 똥을 쌌다. 기쁘게 처리해 주고 왔지만 입맛을 잃었다. 딸기를 보고도 침이 고이지 않았다.
"여보도 딸기 먹어"
"아니야. 여보랑 애들 먹어"
"왜, 여보도 좀 먹지"
"난 괜찮아"
여보. 나 희생, 양보, 가장 뭐 이런 마음 때문에 안 먹은 거 아니야. 그냥 똥 때문이었어.
점심시간쯤 나가게 됐는데 아침을 늦게 먹어서 점심을 먹기에는 좀 일렀다. 그렇다고 신림동(부모님 집)에 가서 먹으면 또 너무 늦고. 아예 건너뛰자니 중간에 애들이 너무 배고플 거고.
"애들은 그냥 라본느에 가서 빵 먹일까?"
"그래, 그러자"
애들이랑 내가 먼저 준비하고 나갔다.
"여보. 이따 차 가지고 라본느로 와. 난 애들이랑 걸어가서 먹고 있을게"
조금 싸고 양 많은 빵을 고르다 보니 올리브 치아바타를 선택했다. 안타깝게도 우유는 없었다. 일단 빵을 부욱부욱 찢어주고 잠시 근처 편의점에라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장님이 오셔서 말씀하셨다.
"아, 혹시 애들 우유 먹나요?"
"아, 네"
"그럼 제가 컵에 조금 따라서 줄까요?"
"아, 네.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우유가 없어서 못 산 거였지만 송구스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그랬다. 사장님은 데운 우유를 종이컵 두 개에 나눠서 주셨다. 두 잔을 따르고도 남은 우유까지 주셨다.
곧이어 아내도 도착했다. 아내는 앙버터처럼 생겼는데 거기서 팥만 빠진 빵을 골랐다. (이름을 모르겠다) 난 그런 식으로 교만하게 들어간 버터는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을 적절히 숨기고 있는 듯 없는 듯하는 겸손한 버터를 좋아한다. 이를테면 토스트에 발렸다가 구워진 버터처럼. 신기하게도 소윤이와 시윤이 모두 버터를 거부했다.
"여보. 이건 나만 좋아하는 빵이네"
"아니지. 롬이가 좋아하는 거야"
부모님 집에 가는 길에 아내가 잠깐 누구를 만나서 전해줘야 할 게 있었다. 거기까지 들르고 갔더니 신림동까지 거의 2시간이 걸렸다. 시윤이는 반 이상을 자면서 와서 크게 힘들지 않았겠지만 소윤이는 그게 아니었을 거다.
"여보. 나도 이렇게 좀이 쑤시는데 소윤이는 얼마나 답답할까"
그래도 소윤이는 기쁨을 잃지 않고 무사히 도착했다.
"아빠. 제가 힘들다는 말 한 번도 안 하고 왔어여"
"그러니까. 소윤이 진짜 힘들었을 텐데, 한 번도 짜증도 안 내고 그렇게 왔네?"
엄마는 일하러 가셨다가 퇴근하기 전이었고 아빠만 계셨다. 아이들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아내와 나는 소파로 직행했다.
"여보. 침대에 가서 좀 자"
"아니야. 여기도 편해"
도착하기 전에 소윤이한테 따로 교육을 했다.
"소윤아. 할머니 집에 가면 간식 있는 대로 다 먹지 말고 잘 절제해 봐. 알았지? 소윤이가 너무 심하다 싶으면 엄마, 아빠가 못 먹게 할 텐데 제일 좋은 건 소윤이가 스스로 안 먹는 거야. 할머니, 할아버지가 주셔도 정중하게 거절도 좀 하고"
대답은 시원시원하게 잘 했는데 지켜질지는 의문이었다. 오히려 첫 간식이 등장하자마자 한낱 구두 약속에 그치지 않을까 싶었다. 소윤이는 의외로 자제력을 발휘했다. 초반에는. 할아버지가 간식을 주는데도 마다하기도 했고.
"아빠. 할아버지가 이거 주셨는데 제가 아까 아빠가 한 말 기억하고 절제했어여"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의지는 흐려졌지만, 그래도 마음먹고 시도했다는 게 어딘가.
엄마 일 끝날 시간에 맞춰 아빠가 데리러 가신다고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자기들도 할아버지를 따라나서겠다며 카시트를 옮겨 달라고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카시트를 옮겨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따라가도 되냐고 물었을 뿐. 나도 마음이 넉넉해졌나 싫은 마음 전혀 없이 주차장에 내려가 내 차에 있던 카시트를 아빠 차에 옮겨 달았다.
"소윤아, 시윤아. 할아버지 말씀 잘 듣고.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말고"
한 시간 정도 지나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밝은 얼굴로 돌아왔다. 난 소파에 누워 정신을 못 차리고 졸고 있었다. 모양새는 자는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내 머릿속에는 '나 안 잘 건데. 일어날 건데'라는 생각이 가득했으니 잔 게 아니라 존 거다. 저녁 먹으러 나가자고 깨웠는데도 잠이 달아나지 않았다.
저녁은 갈빗집에 가서 먹었다. 시윤이는 여느 때처럼 일단 고기부터 집중 공략했다. 소윤이는 쌈을 싸 먹었다. 그냥 시늉만 하는 게 아니라 어른처럼 제대로 갖춘 쌈을, 그것도 맛있게 먹었다.
"야, 얘네 때문에 1인분 더 먹어야겠다. 이제"
"맞아요"
점심이 부실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소윤이는 쌈, 시윤이는 고기로 초반에 달리더니 금방 페이스가 떨어졌다. 그래도 둘이 제법 얌전하게 먹어준 덕분에 아내와 나도 좀 여유롭게 먹었다.
"엄마, 아빠. 이따 좀 나갔다 와여"
"왜?"
"그냥 좀 데이트도 하고"
"너 또 엄마, 아빠 나가면 간식 많이 먹으려고 그러는 거지?"
"아니에여. 진짜 아니에여"
저녁 먹고 집에서 돌아와서 소파에 누워 쉬다가 또 잠들었다. 엄청 달콤한 잠이었다. 그만큼 깨기도 힘들었고.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고 아내랑 집에서 나왔다. 오늘도 영화나 볼까 하다가 그것도 피곤할 것 같아서 그냥 카페에 갔다.
두 시간 정도 앉아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셀카도 찍고. 그래도 다행이다. 아직 아내랑 둘이 보내는 시간이 즐거워서. 애들이 막 나서서 데이트하고 오라고 떠미는데도 누군가 한 명이 '됐어. 우리 둘이 나가서 뭐해' 이러면 되게 슬플 거다.
여보. 우리 오래오래 오붓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