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13(수)
아침에 깨보니 소윤이 머리에 땀이 흥건했다. 얼른 이마를 짚어보니 전혀 뜨겁지 않았고. 밤새 땀을 흘리며 열이 떨어졌다. 일단 열이 더 오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소윤아. 어때? 힘들어?"
"네"
"어제랑 똑같아?"
"어제랑 똑같지는 않은데 아직 힘들어여"
겉으로 보기에는 어제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기운 없이 축 처져 있었다. 먹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목이 아파서 잘 안 넘어가는지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그래도 어제만큼 힘들어 보이지 않는 건 분명했다. 아내와 내가 기대한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오늘 아침의 놀라운 일은 따로 있었다. 아내와 내가 10시 40분이나 되어서야 일어났다. 한 7-8시 무렵 뒤척이는 소윤이와 시윤이 덕분에 나도 살짝 잠에서 깼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를 다시 옆에 눕혀 놓고 재웠다. 소윤이는 곧바로 코를 골며 잠들었고 시윤이는 모르겠다. 내가 먼저 잠들었다. 그러고 나서 깨니 10시 40분이었다. 아마 소윤이랑 시윤이도 비슷하게 잔 듯했다.
"여보. 어이가 없어. 이 시간까지 자다니"
"그러게. 이게 뭔일이야"
그렇게 많이 잤는데도 뭔가 개운한 느낌은 아니었다. 몸이 그런 건지 마음이 그런 건지도 모르겠고,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뭔가 찜찜하고 찌뿌둥했다. 아침부터 먹구름을 잔뜩 품은 하늘 때문이었나.
"여보. 이거 항생제 안 넣어놨네?"
"아, 진짜? 까먹었나 보다"
소윤이 항생제를 냉장 보관해야 하는데 어제 내가 약 타주고 그대로 뒀나 보다. 병원에 전화해 보니 다시 처방해준다고 했다. 소윤이가 먹고 싶은 것 중에 아픈 상태에서도 취식이 가능한 게 딸기와 미역국이었다.
시윤이 바람도 쐬게 하고, 소윤이도 엄마랑 좀 쉬게 할 생각으로 시윤이를 데리고 집에서 나왔다. 아내한테 시윤이를 데리고 나갔다 오라고 하려다가 소윤이한테 엄마와의 시간이 더 필요할 거 같아서 내가 나가고 아내가 남았다. 소윤이는 자기도 나가고 싶다고 했지만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닐 거 같아서 만류했다.
시윤이만 신났다.
"아빠. 우디 어디 가여엉?"
"병원에 갔다가 카페 갔다가 마트에 가려고"
먼저 병원에 가서 소윤이 항생제를 다시 처방받았다. 그다음은 아내가 지시한 임무가 있었다. 새로 생긴 어느 과자점에 가서 빵을 사 오라고 했다.
"여보. 어떤 거, 얼마나 사?"
"그냥 여보가 알아서"
"알아서? 너무 어려운데. 대충 수량이라도 정해줘"
"한 네 개?"
"네 개?"
"뭐 뭐 있는데?"
"잠깐만. 내가 들어가서 보고 얘기해줄게"
"알았어"
"지금 뭐 뭐 있냐면, 오리 마들렌이랑 피낭시에랑 말차 구겔호프? 이렇게 있어"
"그거밖에 없어?"
"어. 이게 다야. 오리 마들렌 2,000원, 피낭시에 2,000원, 구겔호프 3,500원"
"그럼 오리 마들렌 두 개, 피낭시에 두 개, 구겔호프 하나 이렇게 사"
"둘 둘 하나? 오케이?"
오리 마들렌은 말 그대로 귀여운 오리 모양이었는데 소윤이가 보면 엄청 좋아할 법했다. 아내의 지령을 수행한 뒤 하나로 마트에 갔다. 딸기를 파는지 미리 확인했었다. 딸기 한 팩, 미역국에 들어갈 소고기, 계란이 오늘의 필수 구매 품목이었다.
"시윤아. 아빠가 과자 하나 사줄까?"
"네. 뭐여?"
할인해서 파는 수입 과자 한 개를 샀다. 계산하고 의자에 앉아 시윤이랑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시윤아. 맛있지?"
"네"
"아빠랑 나오니까 좋지?"
"네"
과자를 먹고 나서 다시 집으로 갔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고 시윤이랑 엘리베이터로 가는데 시윤이가 벽 쪽에 바짝 붙어서 걸었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과 몸짓으로. 나랑 둘이 있는 동안 내내 그랬다. 계속 장난치고, 웃고.
'왜 하나만 데리고 다니면 잔소리도 덜하고 마음이 너그러워질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둘이 함께 있으면 서로의 악행(?)을 보고 따라 하는 증폭 효과가 생겨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냥 내 마음이 좀 다른 걸까. 아무튼 저번에 소윤이랑 데이트했을 때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둘을 모두 데리고 다닐 때와 하나만 데리고 다닐 때의 차이가 참 크다.
집에 도착했더니 소윤이는 안 보였다.
"소윤이는?"
"잠들었어"
"아, 진짜?"
"어. 나랑 침대에 누워서 얘기하다가 갑자기 잠들었어"
"피곤했나 보다"
"응. 기운이 없긴 한가 봐"
곧바로 미역국을 끓이고 밥을 새로 했다. 늦어도 너무 늦었던 기상 시간 덕분에 식사 시간도 다 꼬여버렸다. 아주 늦은 아침, 오히려 점심에 가까운 아침을 먹고 나니 점심시간이 애매해졌고 어쩔 수 없이 저녁에 가까운 점심을 먹게 됐다. 밥하고 미역국 끓여서 상을 차린 시간이 네 시였다. 소윤이랑 시윤이는 배가 고프다며 얼른 밥을 달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소윤이는 앉아서 몇 숟가락 뜨지도 못했다. 다시 기운이 달리는지 힘들다고 하면서 소파에 누웠다.
"아빠. 오리 빵은여?"
"오리 빵은 못 먹지. 밥도 못 먹었는데. 다 낫고 소화 잘 될 때 먹어야지"
밥도 못 먹을 정도로 힘들어도 군것질 생각은 나나 보다. 소파에 누웠던 소윤이는 딸기 몇 알을 먹더니 다시 기운을 차렸다. 딸기는 정말 어찌나 잘 먹는지. 다행이었다. 뭐든 먹고 기운을 차렸으니. 저녁 식탁에 앉았을 때만 해도 다시 나빠지는 건가 걱정이 됐는데 딸기 먹고 나서는 다 나은 듯했다.
엄청 이른 시간에 잘 준비를 마치고 취침에 돌입했다. 물론 아이들만. 하루 종일 우중충하다가 비까지 오고, 집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나랑 시윤이는 잠깐 나갔다 왔지만) 거기에 하루 종일 병간호까지 하고. 아내도 나도 뭔가 꾹 눌린 느낌이었다. 유일한 탈출구는 빠른 육아 퇴근뿐이었다. 아내는 애들 재우기 전에 잠깐 편의점에 다녀왔다. 그녀의 손에는 컵라면이 들려 있었다. 나중에 싱크대에서 삼각김밥도 발견됐다. 육아 퇴근 이후의 소박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위한 계획이었다.
아내가 애들을 데리고 재우러 들어갔고 난 잠시 소파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치열했던 하루를 뒤로하고 다시 나의 호흡을 찾으려면 시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 소윤이가 방문을 열고 나오더니 아기 인형을 데리고 들어갔다. 잠깐의 표정과 기운에서 취침이 아직 먼 곳에 있다는 걸 직감했다. 몸이 좀 안 좋긴 해도 어쨌든 늦은 낮잠을 잔 셈이니 그럴 법했다.
"여보. 그냥 조금 누워 있다가 자라고 하고 나와"
"알았어"
아내에게 짐을 지우고 난 카페로 탈출했다. 나가면서 보니까 유모차에 꼬깔콘 세 봉지가 있었다. 아까 아내가 편의점에 다녀오면서 함께 사 온 건데 애들 눈이 있으니 잠시 밖에 둔 듯했다. 세 시간 정도의 외출을 마치고 집에 돌아갔더니 아내는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식탁에는 컵라면을 담아 먹은 그릇과 삼각김밥 껍데기가 보였다. 무심하게 뜯긴 채 내용물을 잃은 꼬깔콘 봉지도 보였다. 흡사 대학시절 친구의 자취방 같은 느낌이었다. 아내는 행복해 보였고 만족스러워 보였다. 아내는 건강을 생각해서 컵라면을 따로 그릇에 덜어 끓여 먹었다고 했다. 나도 내일부터 건강을 생각해서 다이어트 콜라나 먹어 볼까.
됐어. 여보. 그거면 됐어. 여보가 좋으면 됐지 뭐. 롬이가 은근히 간편식을 좋아하나 봐. 그래도 롬이는 좋겠다. 엄마가 건강을 그렇게 끔찍이 생각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