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가족 여행, Day 2

19.11.20(수)

by 어깨아빠

방 안에 식용유가 없었다. 아침에 아이들에게 계란 프라이를 해주려고 했던 아내는 프라이 대신 삶은 계란을 냈다. 애들 반찬은 김과 계란. 아내와 나는 컵라면. 소윤이와 시윤이는 썩 잘 먹지는 않았다. 잘 먹고 말고 할 게 없는 단출한 식탁이기도 했지만. 그에 비하면 아내와 나는 아주 자극적인, 여행의 기분을 물씬 느낄 만한 아침이었다.


TV가 있으니 손이 자꾸 리모컨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있으니 섣불리 켜지는 못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소윤아, 시윤아. TV 좀 볼까? 여행 왔으니까?"

"뭐여?"

"글쎄. 뭐가 있나 한 번 볼까"


무료로 시청 가능한 게 뭐가 있나 살펴봤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화면을 보고 자기가 아는 거, 보고 싶은 걸 외쳤다.


"아빠. 저거여 저거. 엄마 까투리"

"아빠아. 따요. 따요"


안타깝게도 무료로 제공하는 프로그램은 선택의 폭이 그리 넓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기에 돈을 쓸 생각도 없었다. 결국 선택받은 건 뽀로로였다. 시윤이는 아직 뽀로로에 흥미를 느낄 만하지만 소윤이는 그럴 시기가 좀 지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윤이는 나름 재미있게, 집중해서 시청했다. 20여 분 정도 보고 나서 껐다.


아침에 급히 할 일이 있어서 난 잠시 홀로 숙소에 남고, 아내가 소윤이와 시윤이를 데리고 숙소 앞 해변에 나갔다. 일을 다 마치고 나도 급히 준비해서 합류했다. 바닷가 바로 옆이라 바람이 거세게 불고 날도 제법 추웠다. 해변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안 보였다는 표현이 딱 정확할 정도로 인적이 드물었다. 탁 트인 바다를 보니 가슴도 뻥 뚫리고 좋기는 했는데, 겨울 바다의 최대 단점은 오래 머물기 힘들다는 거다. 아이들과 함께라면 더더욱. 편의점에서 핫초코를 한 잔 사서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나눠줬다.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추운 날씨에 아이 둘을 데리고 어디 구경하기도 어려웠거니와 양양이라는 곳 자체가 겨울에는 생명력을 잃는 도시 같았다. 우리가 바다 쪽에 머물러서 더 그런 듯했다. 아마 겨울에도 갈 만한 곳이 얼마든 있었겠지만 아이 둘이 함께라면 그마저도 매우 제한적이었을 거다. 그래도 소윤이나 시윤이가 전혀 지루해 하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물론이었고.


"소윤아. 여행 재밌어?"

"네"

"뭐가 재밌어? 숙소에만 있고 소윤이, 시윤이 별로 할 것도 없는데?"

"그래도여. 숙소에서 노는 것도 재밌고 엄마, 아빠랑 같이 돌아다니니까여"


다행히 아직까지는 소윤이와 시윤이도 아내와 나의 여행 철학(?)에 동의하는 듯하다.


속초로 넘어가기로 했다. 속초중앙시장에 가 보기로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시장까지 가는 동안 잠들었다. 평소 낮잠 시간에 비하면 매우 이른 시간이었다. 아내도 잠들었다. 여행이 즐겁긴 해도 은근한 피로감을 동반한다. 어제 늦은 낮잠으로 아내와 나의 밤 시간을 박탈(?)당한 것을 생각하면 오늘은 매우 바람직한 전개였다.


속초중앙시장은 규모가 꽤 컸다. 정식 명칭은 속초수산물관광시장이었나 그랬다. 역시나 한산했지만 그래도 양양보다는 생동감이 있었다. 점심은 따로 먹지 않고 시장을 구경하면서 군것질을 하거나 간단히 먹기로 했다. 재래시장에 가 보면 규모가 작아서 금방 구경이 끝날 때가 많았는데, 여기는 꽤 컸다. 다만 비수기다 보니 문을 안 연 곳이 많았다.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오징어순대와 감자전을 먹으러 어느 가게에 들어갔다. 오징어순대는 모든 가게에서 파는 건가 싶을 정도로 흔했다.


시윤이는 오징어순대가 맵다며 한 입 먹고는 더 이상 먹지 않았다. 감자전만 먹었다. 소윤이는 오징어순대도 감자전도 잘 먹었고. 넷이서 그걸 나눠 먹었으니 배가 부르지는 않았다. 아마 애들도 그랬을 거다. 거기에 시윤이는 더더욱 먹은 게 없었으니까. 다소 빈 배를 채우기 위해 호떡을 사 먹기로 했다. 유명한 호떡집이 있다고 해서 물어물어 찾아갔는데 마침 쉬는 날이었다. 근처에 있는 다른 가게에서 사 먹었다. 이미 기름에 지져 놓은 호떡을 가위로 가르더니 그 틈으로 씨앗을 쑤셔 넣는 모습을 보고 적잖이 실망했다. 그건 '즉석' 호떡이 아니었다. 막상 먹어보니 맛이 있어서 더 화가 났다. 이런 자존심 없는 혓바닥 같으니라고. 아내도, 애들도 잘 먹었다.


첫발을 디딜 때는 야심 차게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자고 했지만 그렇게 두 가지뿐이었다. 아내는 한 건어물 가게에서 부모님께 드리겠다며 김과 오징어를 샀다.


내 일기를 읽는 사람이 몇 명 안 되지만 어쨌든 공개되는 것이니 꼭 지키는 철칙이 있다. 방문했던 가게나 업장에 대해 기록할 때 좋았던 곳은 이름을 밝히기도 하지만 안 좋았던 곳은 절대 밝히지 않는다. 그들을 향한 비난과 성토는 아내하고 주고받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일기에도 그 내용은 쓰되 절대 상호는 밝히지 않는다.


아내가 김과 오징어를 샀던 건어물 가게는 그 철칙을 깨고 싶을 정도로 별로, 아니 최악이었다. 가면 안 되는 곳이라고 널리 널리 알리고 싶었다. 아내가 매대에 접근해 오징어는 얼마고 김은 얼마냐고 물었더니 주인은 분명히 각각 삼만 원, 이만 원이라고 대답했다. 아내가 다른 것도 살펴보며 이야기를 좀 나누다가 처음 물었던 그걸 고르며 "이만 원이라고 하셨죠?" 라고 했더니 은근슬쩍 "이만 오천 원"이라고 얘기했다. 오징어도 마찬가지로 "삼만 오천 원"으로 슬쩍 올려서 얘기했다. 아내는 "아, 그랬어요?" 라고 대답하며 순순히 수긍했다. 거기에 김은 가장 위에 진열되어 있던 (아내가 집었던) 것 밑에 깊숙이 처박혀 있던 걸 꺼내서 담았다. 사람의 의도야 마음에 들어가 보지 않은 이상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지만, 난 느꼈다. 주인의 몸짓은 뭔가 음흉하고 기민했다. 무엇보다 가격을 바꿔 말한 게 참 어이가 없었다. 애들도 있고 즐거운 여행의 기분을 잡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못 본 척, 못 들은 척했다.


하나로 마트에 들러서 저녁에 구워 먹을 고기와 쌈 채소, 간식, 내일 아침 등을 샀다. 장을 보기 위해 들르기도 했지만 비좁은 시장길에서 가만히 두면 망아지처럼 뛰노는 시윤이를 카트에 좀 앉혀 놓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장 보기가 곧 휴식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카페도 들렀다. 아침부터 제대로 된 커피를 한 잔도 못 마셨더니 카페인이 간절했다. 급히 검색을 했다. 허접한 커피는 마시고 싶지 않았다. 로스팅 카페를 검색했더니 한 곳이 나왔다. 제법 외진 곳에 있었는데 엄청 컸다. 공장 수준의 로스팅 공간이 따로 있고 2층이 카페였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커피 볶는 향이 진동을 했다. 기분이 좋아졌다. 매장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왠지 원래 돈 많으신 분이 운영하는 것 같아서 망할 걱정은 하지 않았다. 원두와 커피 납품으로도 수익을 창출하는 듯했다. 커피 맛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숙소 주차장 한 쪽에 바베큐장이 있었다. 새시와 유리로 가건물처럼 만들어서 바람이 통하지 않았다. 안에는 히터도 있었고. 덕분에 추운 겨울에도 따뜻하게 고기를 구워 먹는 게 가능했다. 숯불은 아니고 부탄가스를 이용하는 커다란 그릴이었다. 숯불의 낭만이나 감성은 없었지만 애들하고 먹기에는 실용적이고 간편해서 좋았다. 점심을 고작 감자전과 오징어순대로 대신했으니 소윤이와 시윤이도 배가 고팠나 보다. 고기를 구워 주기가 무섭게 집어먹었다. 소윤이는 이제 그저 어른을 따라 하는 재미를 위한 쌈 싸 먹기가 아닌, 진정한 맛의 조화를 느끼기 위한 쌈 싸 먹기를 하는 단계에 올라섰다. 한 쌈, 한 쌈 정성스레 재료를 올리고 아주 맛깔나게 입에 넣었다.


"어우. 아빠. 너무 맛있다"


소윤이는 한 반 백 년 산 어른 같은 말투로 고기의 맛을 극찬했다. 요즘 누나 따라 하기가 특기인 시윤이도 옆에서 앵무새처럼 누나를 따라 했다.


"아빠. 딘따 마지따"


보는 여행의 재미를 느끼기에는 소윤이와 시윤이가 아직 어리다.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아내와 나도 보는 여행으로 즐기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그럴 때는 역시 먹는 즐거움을 찾는 게 최고다. 저녁을 먹은 소윤이와 시윤이를 데리고 편의점에 갔다.


"소윤아, 시윤아. 아이스크림 하나씩 골라"


소윤이는 빠삐코를 골랐고 시윤이는 뭔가 다른 걸 골랐는데, 그걸 들고 숙소에 들어갔을 때의 상황이 아주 짧은 순간 머리에 스쳐 그려졌다. 뭔가 모르게 번잡스러웠다. 소윤이는 문제없었지만 시윤이가.


"아, 얘들아. 그냥 너희 이거 먹을래? 옥수수?"

"아빠. 그거 말고여. 저는 이거"

"아 그런데 밤이고 또 너무 추우니까 한 개씩 먹으면 너무 많을 거 같아. 이거 옥수수 아이스크림 사서 반씩 나눠 먹자. 저번에 신림동 할머니 집에서도 그렇게 먹었잖아"


소윤이는 못내 아쉬워했지만 잘 설득했다. 아이스크림도 먹고 초코송이도 먹었다. 다 먹고 나서는 수건돌리기도 했다. 평소에 집에서도 자주 하자고 했는데 쿵쿵 소리가 나고 좁아서 안 된다고 했었다. 그녀의 오랜 숙원이었던 만큼 최선을 다해 수건을 돌렸다.


오늘도 취침에 돌입한 시간이 제법 늦었지만 아내와 나는 희망을 가졌다. 낮잠 시간이 매우 빨랐고, 하루 종일 여기저기 다니며 체력을 많이 빼놨으니까 금방 자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다행히 소윤이와 시윤이는 도리를 다했다. 금방 잠들었다.


7,70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영화를 한 편 결제했다. 썩 재밌지는 않았다. 1,000원이었으면 진작에 실패를 인정하고 다른 걸 다시 골랐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중간에 소윤이가 깨 가지고는 이유 없이 계속 울었다. 아니,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엄마가 자기 옆에 누웠으면 좋겠다는 게 최초의 이유였다. 처음에는 다시 잠들기를 기다리며 TV를 껐는데 이 녀석이 한참이 지나도 다시 자지 않았다. 얼른 자라고 핀잔을 주면 또 울었다. 아내가 가서 위로의 스킨십을 건넸지만 소용없었다. 소윤이는 울고 있었고, TV도 다시 켰다. 아내와 나는 영화를 보고 소윤이는 한참을 울다가 다시 잠들었다.


역시, 가능하면 침실과 거실이 분리되어 있는 게 좋긴 하다.




* 숙소 (바베큐장)


소소한 이야기


일단 바람이 차단되어서 추운 겨울에도 아빠 혼자 고생하며 외롭게 고기를 굽지 않아도 된다. 더 추운 겨울에는 어떨지 몰라도, 해지고 나니 겉옷 없이 바깥에 나가면 몸이 덜덜 떨리는 날씨였을 때도 전혀 춥지 않았다. 숯불이 아니라 숯불 특유의 재미와 운치는 없지만, 솔직히 고기를 제대로 구워 먹기에는 가스불이 훨씬 낫긴 하다. 비록 부탄가스로 가열하는 것이긴 해도 성인이 서서 굽기 적당한 높이까지 올라오는 나름 그릴이다. 부르스타에 프라이팬 올려서 굽는 모습을 상상하면 안 된다. 자세나 폼만 보면 숯불 구이와 큰 차이가 없다. 다만 가스 불일뿐이다. 보통 바베큐를 이용한다고 했을 때 내는 가격보다 좀 비싸긴 하다.


* 카페

뮤토로스팅플랜트

매장 곳곳의 집기나 진열에서 느껴지는 섬세함과 고급스러움이 무색하리만치 손님이 없었다. 도무지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의 한적함 속에서도 일하는 분은 최상의 고객응대를 보이셨다. 커피 맛도 좋았다. 아메리카노에서는 물 맛이 많이 안났고, 아내의 라떼에서는 우유 맛이 많이 안났다. 이름처럼 카페라기보다는 로스팅 공장 윗층에 마련된 커피 시음 공간이랄까. 인스타 갬성, 샤방샤방 이런 거 하고는 거리가 멀다. 속초에서 만난 꽉 찬 커피.



* 영화


퍼펙트맨


소싯적에 자유로이 넘나들던 어둠의 바다를 이용해 다운로드했어도, 허비한 시간이 아까웠을 법한 영화. 자꾸 [언터처블:1%의 우정]이 떠오르는 건 나만의 착각이겠지. 차라리 [엑시트]를 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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