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가족 여행, Day 4

19.11.22(금)

by 어깨아빠

어제 마지막 밤을 밋밋하게 보내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 좋은, 설레는 마지막 날 아침이었다. 여행의 마지막이라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마지막이니까 더 즐겁게 보내겠노라는 무언의 다짐을 아내와 주고받았다.


애들은 소시지, 달걀 스크램블, 연두부가 아침 반찬이었다. 아내는 컵라면, 나는 시리얼. 난 먼저 아침 식사를 마치고 화장실에 갔다. 여행 내내 시원찮던 장 활동이 활발해져서 개운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밖에서 갑자기 아내의 짧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악"


시윤이가 또 뭔가 흘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느긋하게 마저 일을 보고 나가려는데 변기가 막혔다. 화장실 안에는 조치할 만한 도구가 보이지 않았다. 일단 나가서 찾아보려고 문을 열었는데, 사태는 매우 심각했다. 아내가 먹던 컵라면이 쏟아져서 매트리스와 이불, 베개 등 사방에 튄 상황이었다. 자그마한 교자상을 펴고 밥을 먹었는데 한쪽 다리가 갑자기 접히면서 발생한 참사였다.


그 뒤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아내랑 대판 싸웠다. '컵라면이 쏟아진' 상황의 귀책을 두고 일어난 다툼은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꽤 불쾌한 상황을 마주한 두 인간의 포용력, 수용력이 순간적으로 급감한 것에서 비롯된 감정의 충돌이라고나 할까. 자주 다투지도 않을뿐더러 애들이 있을 때는 거의 그런 경우가 없는데 오늘은 둘 다 폭주했다. 망할 놈의 변기는 내려갈 생각을 안 하고.


그 와중에 애들한테 미안해서 나름대로 애들 눈치를 봤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우리 눈치를 봤을 테고. 시윤이는 모르는 척을 했다. 분명히 상황 파악이 됐을 텐데(고성과 눈물이 오갔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오히려 더 발랄하고,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장난을 쳤다. 소윤이는 조심스레 상황을 관찰했다. 말과 행동에서 조심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미 폭탄은 터졌고 마지막 날의 희망이 가득 찼던 아늑한 숙소는 전쟁의 잿더미가 수북이 내려앉은 폐허가 됐다. 서로 말없이 짐을 챙기고 나머지 정리를 했다. 마지막까지 어떻게든 변기를 뚫어 보려고 했는데, 뚫어뻥 하나만 있으면 쉽게 끝날 일이었는데 보이지 않았다.


차에 짐을 옮기려고 나갔다가 사장님과 마주쳤다.


"아, 사장님"

"네?"

"아, 저희가 아침을 먹다가 컵라면을 쏟았거든요. 국물이 침구에 다 튀어서 한 번 보셔야 할 거 같아요"

"아, 그런가요? 괜찮아요. 저희가 잘 세탁할게요"

"아니, 꽤 많이 튀어서. 저희가 세탁비를 드려야 할 거 같아요. 한 번 가서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래요?"


사장님은 우리 방에 들어오셨다. 잘 살펴보지도 않으셨다.


"아, 괜찮아요. 제가 잘 세탁할게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아니, 그래도 저희가 세탁비를 좀 드려야 할 텐데"

"아,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


조금 튄 게 아니었다. 세탁비로 얼마를 요구하시든, 돈을 드리면서도 고개를 조아리게 될 정도로 죄송할 만큼 많이 튀었다. 방에서 나가려는 사장님에게 또 한마디를 건넸다.


"사장님. 여기 화장실 변기도 막혀서요. 뚫어뻥으로 간단히 뚫리긴 할 텐데"

"아, 네. 알겠습니다"


여행 내내 [깨끗하게 쉬다 간 손님]이 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설거지도 깨끗하게 하고, 각종 쓰레기도 정해진 규칙에 맞게 잘 분류해서 버리고. 그런 노력이 다 물거품이 되는 느낌이었다. 컵라면 국물과 똥이라니. 이렇게 환상적일 수가 있나.


"아빠. 우리 이제 어디 가여?"

"집에"

"왜 바로 가여?"

"그냥"

"다른 데 어디 가고 싶은데"

"집에 갈 거야"


괜히 날벼락을 맞은 건 소윤이와 시윤이었다. 당연히 어딘가로 이동해서 좀 놀다 갈 줄 알았을 텐데 갑자기 간다고 하니까. 차에 타자마자 내비게이션에 우리 집을 찍었다. 시윤이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얌전히 있었고 소윤이는 포기하지 않고 물어봤다.


"아빠. 그런데 휴게소가 너무 가고 싶어여"

"어, 다음에. 오늘은 안 가"


소윤이는 한 시간 정도 달리는 동안 계숙 물어봤다. 진짜 안 갈 거냐고. 자기는 너무너무너무너무 가고 싶다고. 나중에는 펑펑 울면서. 아내도 나도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죄지은 마음이 좀 있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이었으니까. 과장을 한 게 아니라 정말 한 시간 내내 그렇게 울며 같은 질문, 하소연을 반복했다. 소윤이한테 미안한 것도 있었지만 아내와의 감정이 더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어서 소윤이가 어떻게 하든 별로 신경을 못 쓴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허무하게 양양과 멀어졌다. 전복뚝배기도 먹기로 했었는데. 뚝배기가 열려 가지고 씩씩대며 서울을 향해 달렸다. 시간이 지나고 서울과 가까워질수록 이성의 문이 열렸다. 그대로 집에 가면 분명히 나중에 후회할 테고, 당장 서글프게 울고 있는 소윤이한테도 너무 미안한 일이었다. 양양에서 서울로 가는 길에 춘천이 있었다. 거기가 마지노선이었다. 거길 넘어가면 딱히 갈 만한 곳도 없거니와 내 마음도 춘천을 넘어가면 다 포기하고 더 딱딱하게 굳을 것만 같았다.


춘천 분기점에서 핸들을 꺾었다. 아내는 마침 통화 중이라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을 못 쓰고 있었다. 국면 전환의 계기로 삼기에 '춘천'은 너무 광범위했다. 뭔가 더 작은 곳이 필요했다. 춘천 시내를 향해 가고 있는데 다이소가 눈에 띄었다.


'저기다'


아내도 그쯤에는 통화를 마치고 뭔가 경로를 이탈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다만 나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헷갈렸을 거고. 다이소 주차장에 차를 대면서 소윤이에게 얘기했다.


"소윤아, 우리 춘천에서 좀 더 있다가 가자. 집에 갈 때 휴게소도 들르고. 괜찮지?"

"네"


소윤이에게 하는 얘기였지만 아내도 듣도록 크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아내에게도 짧게 얘기했다.


"춘천에 좀 있다가 가자"


아내는 내 말을 곧바로 받았다.


"여보. 미안해"

"아니야. 됐어"


매장에 들어가기 전에 소윤이를 다시 붙잡고 얘기했다.


"소윤아. 미안해. 엄마랑 아빠랑 싸운 건데 괜히 소윤이랑 시윤이도 신나게 못 놀았지? 또 아빠가 휴게소 가기로 약속했는데 갑자기 안 간다고 해서 속상했고. 그건 엄마, 아빠가 잘못한 거야. 미안해. 엄마, 아빠가 다툰 건데 소윤이, 시윤이까지 속상하게 한 건 엄마, 아빠가 미안해. 알았지? 여기 춘천인데 여기서 밥도 먹고 좀 놀다가 집에 가자"

"휴게소도 들를 거지여?"

"어. 휴게소도 들르고. 그리고 엄마, 아빠가 사과하는 의미로 여기 다이소에서 소윤이랑 시윤이 선물 사 줄게. 장난감 아닌 것 중에 갖고 싶은 거 하나씩 골라"


시윤이는 차에서 잠들었다가 깼는데 기분이 괜찮았다. 소윤이도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각자의 목적 때문에 보여주기용 화해, 화합을 하는 것처럼 감정의 잔해가 남아있는 봉합이었을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런 '의식'을 거쳤다는 게 중요한 거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선언이나 선포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본능이 있으니까. (적어도 아내와 나는, 아이들에게 보여주려고 화해 의식을 치른 건 아니었다.)


소윤이는 학종이, 시윤이는 타요 색종이를 골랐다. 아내와 나도 휴대폰 필름을 하나씩 샀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이전의 일을 모두 망각하고 새로운 마음을 담아낸 듯, 멀쩡했다. 아내는 모르겠지만, 나도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마음이 정화(?)되고 있었다.


점심에는 닭갈비를 먹기로 했다. 애들 때문에 매운 닭갈비는 못 먹으니까 소금구이 하는 곳을 찾았다. 이번에 닭갈비 세계의 질서를 새롭게 알게 됐다. 나름 여행기를 겸한 일기니까 정리해 보자.


우선 닭갈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 앙념(매운) 닭갈비

- 소금구이(안 매운) 닭갈비

- 간장(안 매운) 닭갈비


조리법은 크게 두 가지다.


- 철판

- 숯불


아이들 때문에 소금구이를 찾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소금구이 닭갈비는 철판으로 조리해서 주는 곳이 거의 없다.(아내와 내가 찾아본 바에 의하면, 한 군데도 없었다.) 양념 닭갈비는 우리가 익히 아는 그 철판 닭갈비는 당연히 가능하고, 춘천의 가게는 대부분 숯불로도 가능하다. 어차피 매운 건 안 되니까 그럼 그냥 숯불 소금구이를 먹으면 되지만, 여기서 또 새로운 장애물이 등장한다.


볶음밥


아내와 나는 볶음밥이 꼭 먹고 싶었다. 특히 아내는 이런 류(본 요리를 다 먹고 볶음밥이 제공되는)의 음식을 먹을 때, 볶음밥이 목적인 경우도 많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숯불 닭갈비는 볶음밥을 먹을 수 없다. 몇 개 업체는 아예 따로 메뉴를 만들어 두기도 했는데, 엄청 비쌌다. 보통 철판 닭갈비 먹고 볶음밥 추가하면 2,000원~3,000원인데 10,000원을 받았다.


정리해 보면


철판 = 볶음밥 가능

숯불 = 볶음밥 불가


고로


양념(매운) 닭갈비 = 숯불, 철판 모두 가능. 단, 숯불일 경우 볶음밥 불가.

소금구이(안 매운) 닭갈비 = 숯불만 가능.(철판으로 하는 곳 발견 못함)


(간장 닭갈비는 관심 밖이어서 자세히 모르지만, 아마 소금구이와 흐름을 같이 하지 않을까 싶다.)


또 신기했던 건 춘천 닭갈비 거리에 위치한 거의 모든 닭갈비 가게는 양과 가격이 동일하다. 250g/1인분에 12,000원.(2019년 11월 22일 현재).


소금구이를 먹어야 하고 볶음밥도 먹어야 하는 우리에게는 큰 위기였다. 그냥 매운(철판) 닭갈비를 먹고 애들은 다른 걸 시켜줄까 싶기도 했는데, 다른 음식이 마땅치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볶음밥을 포기하고 숯불 소금구이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할 때쯤, 우리의 욕구를 모두 충족시킬 만한 곳을 발견했다.


숯불 소금구이를 먹고도 볶음밥이 가능한 곳이었다. 거기로 갔다. 일단 소금구이 1인분, 양념 1인분을 시켰다. 네 명 모두 배가 고팠다. 역시 고기는 종류가 뭐든 숯불에 구워야 제맛인가. 엄청 맛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무지하게 잘 먹었다. 1인분 가지고는 턱도 없었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요즘 자주 경험하는 젓가락질이 미안해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사장님의 추천에 따라 간장 닭갈비를 1인분 추가했다. 역시 맛있었다. 의지를 가지고 오른팔을 조종했다.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다는 게 무슨 의미였는지,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 조금씩 깨닫고 있다.


배가 조금 덜 찼지만 괜찮았다. 아내와 나에게는 볶음밥이 있으니까. 무엇보다 이건 매워서 애들이 손도 못 대니까. 그토록 원하던 볶음밥으로 배의 빈 구석을 채우고 식사를 마쳤다. 식당 바로 근처에 있는 카페로 갔다. 넓은 정원이 있는 카페였다. 소윤이는 여행 내내 '공원 같은 곳'도 가자고 요청했는데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해서 응해주지 못했었다. 소윤이의 욕구를 해소하기에 적절한 장소였다. 마침 날씨도 따뜻해져서 바깥 자리에 앉는 게 어렵지 않았다. 오전의 일을 사죄하는 마음으로 소윤이, 시윤이와 열심히 놀았다. 잡기 놀이, 숨바꼭질, 무작정 뛰기 등 '공원 같은 곳'에서만 가능한 놀이를 원 없이 했다. 아니지. 애들은 아무리 놀아도 원 있지.


춘천에서 우리 집까지 거리로는 매우 가까웠다. 그 말은 그 사이에 들를 만한 휴게소가 몇 개 없었다는 거다. 우리 집이 5km, 시간으로는 10분 정도 남았을 때 휴게소에 들렀다. 핫도그를 하나 사서 나눠 먹었다. 소윤이는 그걸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휴게소에 내려 잠시 머무는 것만 해도 기쁨인가 보다.


집 근처 김치찌개 가게에서 저녁을 먹는 것으로 여행을 마무리했다.


"소윤아. 여행 좋았어?"

"네"

"뭐가 제일 좋았어?"

"음, 숙소에서 논 것도 좋았고 군것질 많이 한 것도 좋았어여"


"시윤이는 뭐가 제일 좋았어?"

"띠비 본 거여어"

"다른 거는?"

"몰라여엉"


소윤이가 말을 보탰다.


"어, 어, 아침에 컵라면을 쏟아가지고 숙소에서 신나게 못 놀아서 좀 아쉽긴 한데 그래도 괜찮았어여"




* 닭갈비


콧닭고


캠핑을 컨셉으로 잡은 가게다. 야외 자리에는 여러 동의 텐트가 있다. 야외긴 해도 텐트 안에 난방을 할 수 있는 기기가 있어서 추위 걱정은 안 해도 될 거 같다. (우리는 매장 안에서 먹었지만. 우리도 텐트에서 먹을 걸 그랬다.) 처음에 들어갔을 때는 손님이 너무 없어서 걱정했는데 첫 고기를 한 점 먹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맛은 아주 좋았다. 사장님도 꽤 친절하셨다. 뭐니뭐니 해도 이 곳의 최고 장점은 숯불과 볶음밥을 함께 즐길 수 있다는 것. 그래도 춘천까지 갔는데 숯불로 먹어야지, 닭갈비의 완성은 볶음밥이지. 이 두 가지 가치를 모두 만족시키는 게 가능한 집이다. 뭐 여기까지야 그냥 아쉬운대로 숯불을 포기하는 선택지도 존재하겠지만, 우리처럼 아이가 있어서 소금구이(only 숯불)여야만 하는 분들에게는 거의 유일한 선택지가 아닐까. (만원 내고 주방에서 만들어 오는 볶음밥을 먹을 의사가 있다면 예외겠지만.)


* 카페


감자밭


검색하면 많이 나온다. 커피는 그냥 그랬고, 빵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카페지만 커피와 빵을 보고 가는 곳은 아닌 듯했다. 정원 출입 자격을 사는 거다. (그러고 보니 카페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건지 그냥 외부에서도 들어갈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꽃이 피는 계절에는 여러 종류의 꽃이 활짝 펴서 더 아름다운 인스타 감성 연출을 위한 환경도 제공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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