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역에서

19.11.25(월)

by 어깨아빠

안국역 근처에서 일이 있었다. 점심 무렵에 갔다가 일정을 끝내고 나니 오후의 끝자락이었다. 사실 집에서 나올 때부터 아내랑 아이들한테 미리 얘기해서 끝날 시간에 맞춰 안국역으로 나오라고 할까 생각했다. 내일 처치홈스쿨 반찬인 짜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아내의 말도 떠오르고 그래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그래도 뭔가 아쉬워서 일을 마치고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애들은 잘 있어?"

"어, 괜찮아. 이제 끝났어?"

"어. 지금. 여보. 안국역으로 나올래?"

"지금? 갑자기?"

"어, 그냥 뭐 저녁 먹고 들어갈까 하고"

"그럴까. 고민되네. 내일 처치홈스쿨 반찬 만들어야 돼"

"그러니까. 그냥 얘기해 본 거야. 여보가 결정해. 너무 부담되면 그냥 집에 있고"

"알았어. 고민 좀 해 보고 연락해 줄게"

"알았어"


아내는 준비하고 나오겠다고 했다. 원흥역에서 타면 안 갈아타고 안국역까지 바로 올 수 있으니까 그리 고된 경로는 아니었다. 다만 날씨가 굉장히 추웠다.


아내가 금방 올 줄 알고 어디 들어가지 않고 거리를 배회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 (걸어서) 갈까 하다가 도착하면 아내에게 연락이 올 것 같아서 가지 않았다. 대신 인사동 거리를 걸었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너무 추웠다. 안국역 쪽에서 반대편 낙원상가 쪽까지 걷고 나니 코가 얼얼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서 다시 안국역에 도착했을 때도 아내는 도착하지 않았다. 계산 착오였다. 차라리 진작에 어디라도 들어갔으면 모를까 그때 들어가기에는 뭔가 아까웠다. 안국역으로 들어갔다. 바깥이 너무 추우니까 처음에는 따뜻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역시 한기가 느껴졌다.


아내와 아이들이 도착했다. 갑작스러운 지하철 여정에 소윤이와 시윤이는 잔뜩 신이 났다. 아내도 두 녀석을 챙기느라 고생하긴 했지만 평일 저녁에 서울 시내에 나온다는 사실에 조금 들떠 있었다. 또 같이 집에서 나온 게 아니라 떨어져 있다 만나는 재미가 있었다.


아내에게 미리 저녁 먹을 장소 후보지를 몇 군데 보내줬다. 아내는 다 맛있겠다면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안국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정하고 걸음을 옮겼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추위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 듯, 차가운 밤바람을 잔뜩 만끽했다.


[깡통만두]라는 이미 유명한 곳에 갔는데 아주 만족스러웠다. 일단 유명하고, 바쁜 곳 특유의 불친절과 매너리즘이 없었다. 평일 밤인데도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지만 음식을 받기 전까지 붕 뜨는 시간에도 무례함이 없었다. 거기에 음식도 아주 맛있었고 소윤이와 시윤이도 잘 먹었다. 시윤이는 역시 한식파다. 다른 어떤 음식보다 열심히, 열정적으로 먹었다.


"아빠. 이제 어디 갈 거에여?"

"글쎄. 집에 가야 하지 않을까"


결정권을 아내에게 넘기며 대답하긴 했지만, 아내가 곧바로 집에 가자고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동네도 아니고 안국인데. 아내의 지인들이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Hot Place 가 즐비한 곳인데, 아내가 그냥 돌아갈 리 없었다.


"여보. 어디 갔다 가자. 그래도 여기까지 나왔는데 아깝잖아"

"짜장은 괜찮겠어?"

"뭐. 하면 되지"


[프릳츠커피]가 근처에 있었다. 프릳츠커피는 다소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곳이다. 오늘 갔던 지점은 아니고 공덕동에 있는 프릳츠커피를 소윤이가 2살 때쯤 갔던 적이 있다. 소윤이의 걸음이 아직 완전하지 않아서 뒤뚱거릴 때였다. 그때도 굉장히 유명한 곳이었다. 커피도 맛있고 빵도 맛있다는 후기를 많이 접했다. 커피가 어땠는지 빵이 어땠는지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 협소한 곳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돌아다니려는 소윤이를 쫓아다니느라 고생만 죽으라고 했다. 아마 그날을 계기로 한동안 소윤이랑 카페 가는 걸 자제하기도 했다. 아내도 나와 비슷한 기억이었다.


오늘은 아니었다. 물론 차분히 앉아서 대화를 나누거나 밤이 주는 감성을 느낄 시간은 없었다. 두 개의 빵을 먹어치우자마자 일어났다. 지난날의 프릳츠커피를 떠올리며 애가 둘인데도 그때보다 나은 오늘을 감사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장소를 옮길 때마다 걸어 다니지 않았다. 뛰어다녔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흥분했다. 그래도 보기에 기분 좋은, 선을 넘지 않는 흥분이었다. 커피를 마시고 다시 안국역으로 가는 길에 아내가 어딘가를 가리키며 얘기했다.


"아, 저기가 어니언이구나"

"저기? 유명한 곳이야?"

"어. 저게 여기 있었네"

"저기 갈 걸 그랬나?"

"여보. 우리 저기 잠깐 들렀다 갈까?"

"어? 지금?"

"어. 저기도 빵이 맛있대"

"빵 사려고?"

"그냥 구경하다가 있으면"


아내는 정말 빵을 좋아한다. 맛있는 빵을 사기 위해서는 웬만한 수고로움과 번거로움, 귀찮음을 모두 이겨낸다.


아내를 따라 카페로 들어섰는데 분위기는 정말 괜찮았다. 큰 한옥을 개조해서 만든 듯했는데 아내에게도도 나에게도 진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여기로 올걸'


아내는 빵 두 개를 샀다. 다시 안국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데 피곤이 몰려왔다. 아이들의 보호자 자격으로 노약자석에 함께 앉았는데 졸음이 쏟아졌다.


"아빠아. 자믄 안 대여어"

"어. 어. 안 자"

"아빠아. 눈 떠여엉"

"그래그래"


입은 움직이는데 눈이 안 떠졌다. 아내와 아이들 없이 혼자였으면 분명히 내릴 역을 지나쳤을 거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내는 애들을 씻겼고 난 짜장을 만들었다. 역시 간단하지 않았다. 조리 과정 자체는 간단해도 양이 워낙 많다 보니 썰고, 볶는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그사이 아내는 애들을 재우러 들어갔다. 한참 시간이 지나도 기별이 없었다. 내일 처치홈스쿨 준비를 해야 하니 혹시나 잠들면 꼭 깨워야 한다는 아내의 당부를 떠올리며 방에 들어갔다. 시윤이가 여전히 안 자고 있었다. 매트리스 위로는 올라가지 못하고 그 주변을 맴돌며 손가락을 빨던 시윤이는 갑자기 들이닥친 날 보고 놀란 듯 토끼 눈이 됐다.


"시윤아. 왜 아직 안 자고 있어. 얼른 자리에 가서 누워"


시윤이는 그대로 자리에 돌아가서 누웠다.


"시윤아. 잠이 안 와?"

"네"

"그래도 자려고 노력해 봐. 알았지?"

"네"


아내는 잠에 취해 있었다.


"여보. 일어날 거야?"

"어. 나가야지. 시윤이 잠들면 나가려고 했지"

"알았어. 얼른 나와"


아내는 소식이 없었다. 다시 방에 들어갔다. 시윤이는 자기 자리에 누워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시윤아. 자는 척하지 말고 눈 떠 봐"

"아빠아. 왜여어?"

"그냥. 아빠 얼굴 한 번 보고 자라고. 아빠도 시윤이 얼굴 보고"

"아빠"

"응?"

"따양해여(사랑해여)"

"그래. 잘 자"


다시 아내에게 갔다.


"여보. 못 일어나겠어?"

"아니야. 일어나야지"

"이번에 못 나오면 안 깨울게?"

"나갈 거야"


아내는 다시 나오기는 했지만 잠을 떨쳐내는 데 한참 시간을 썼다. 내가 만든 짜장의 간을 심사하고 추가해야 할 춘장의 양을 정해준 것이 아내가 한 가장 큰일이었다. 아, 아니다. 오늘 갔던 깡통만두에서 먹은 음식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또 얼마나 친절했는지 나누고 다음에는 애들 때문에 못 먹은 만두전골을 꼭 먹자는 결의도 다졌다.


비생산적이고 의미 없을지라도 부부간의 성역 없는 수다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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