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27(수)
소윤이 치과에 다녀왔다. 전에 다른 치과에 한 번 갔었는데 영 느낌이 별로여서 치료를 미루다가 이제서야 가게 됐다. 충치가 있던 부분이 더 안 좋아졌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오히려 저번에 갔던 치과에 비하면 견적도 작게 나오고 치료할 부분도 적었다.
소윤이가 누워서 진료를 받는데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이 소윤이를 너무 아기 대하듯 하셨다. 사실 소윤이는 처음 치과에 갔을 때도 울지 않았었다. 오늘도 물론 마찬가지였고.
"어어어. 괜찮아. 이거 하나도 안 아픈 거야. 이걸로 봐야 소윤이 이빨에 벌레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어. 하나도 안 아파"
"우와. 여기 한 번 볼까. 이게 뭐지이이?"
"옳지 옳지. 이제 다 끝났어"
차라리 소윤이한테는 정식으로 의학, 보건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설명해주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덤덤한 소윤이 옆에서 한껏 호들갑을 떠시며 아기 용어를 쓰시는 의사, 간호사 선생님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누나가 누워서 진료받는 걸 긴장한 눈으로 쳐다보던 시윤이는
"시윤이도 잠깐 저렇게 할 수 있지? 저거 하나도 안 아픈 거야"
라는 나의 말에 슬며시 웃으며 못한다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막상 닥치니 울지 않고 잘 있었다. 진료를 마치고 차에 탔는데 아내가 얘기했다.
"여보. 우리 키오 들렀다 가자"
아내가 요즘 꽂힌, (나도 그곳의 피낭시에에 매료되었지만) 삼송역 근처에 새로 생긴, 아주 작은 과자점이었다. 치과 근처였으니 아내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안타깝게도 정해진 영업시간 전이라 빵이 많지는 않았다. 아내가 차에 타며 또 얘기했다.
"여보. 우리 집에 가?"
"그럼? 어디 가?"
"그냥. 바로 들어가기 뭔가 아쉬워서"
"그래? 그럼 어디 갈까?"
"글쎄. 어디든"
"여보가 정해봐"
"그럼 우리 스타필드 가자"
평일 낮에 스타필드라니. 아내에게는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애들 입장에서, 특히 소윤이 입장에서 큰 장점이 있었다. 아내랑 올 때마다 자동차 유모차(유모차 대여소에서 빌려주는 자동차 모양의 밀차랄까)를 빌리고 싶어했지만 아내가 그걸 두 개나 끌 수 없으니 항상 불가능했다. 주말에는 사람이 많아서 기다려야 했고. 그랬는데 오늘은 가자마자 바로 두 대를 빌려서 각각 한 대씩 차지했다. 아내 말로는 소윤이에게는 꽤 오랜 바람이었다고 했다. 그걸 오늘에서야 이룬 거다.
마침 1층 정문 쪽에 레고 행사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옛날 같았으면 [40% 할인]이라는 걸 보고 흥분했겠지만, 이제는 그저 헤어진 옛 연인일 뿐이다. 아이들이 들어가서 놀 수 있도록 레고 풀(?) 같은 공간을 만들어 놨길래 소윤이와 시윤이를 거기 풀어놨다. 소윤이는 오래도록 한자리에 앉아서 자기 나름대로 뭘 만드느라 집중했다. 시윤이는 처음에는 누나를 따라 앉았지만 금세 지루함을 느끼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소윤이에게 레고는 꽤 유익한 장난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윤이는 자기 생각을 레고로 구현하기 위해서 애썼다. 물론 생각처럼 되지 않자 간헐적인 짜증이 표출되기도 했다.
아내와 나도 곁에 앉아 뭔가를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둘 다 이런 쪽으로는 전혀 소질이 없는 터라 금방 포기했다. (레고인은 두 종류가 있다. 창작형 레고인, 수집형 레고인. 난 후자에 가까웠다.)
"여보. 지겨워?"
"아니야. 괜찮아"
"여보 표정이 엄청 무료해 보여"
"아니야. 나 엄청 유료해"
의외로 거기서 한참 동안 시간을 보냈다. 아무런 목적이 없이 갔기 때문에 다음 행선지도 그때그때 정했다.
"여보. 우리 이제 어디 가지?"
"음, 트레이더스 구경할까?"
"그래, 그러자"
안타깝게도 고양시 대형마트 정기휴무일이었다. 이유 없이 방문했을 때 가장 시간 보내기 좋은 곳이 마트인데 확실한 카드 한 장을 잃었다.
"그럼 다이소 가 보자"
소윤이는 얼마 전부터 자기 휴대폰(장난감 뽀로로 휴대폰)에 필름을 붙여야 한다면서 다이소에 가게 되면 꼭 그걸 사달라고 했다. 소윤이는 "사 주세요"라고 말하고 끝이 아니다. 사 줄 때까지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아빠. 다이소는 언제 가여?"
"다이소에 가면 그거 까먹으면 안 돼여"
"아빠. 여기는 다이소 있어여 없어여?"
소윤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도 있지만 더 이상 다이소 타령을 듣기 싫은 마음도 있었다.
"소윤아. 오늘 다이소에 가서 소윤이 필름 사면 되겠다"
"와. 맞아여 맞아여"
슬프게도 다이소가 자리를 옮기기 위해 휴무 중이었다. 그래도 소윤이는 이제 이런 일로 크게 상심하지 않는다. 물론 본인이 정말 간절히 바랐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일 때는 더러 폭풍 같은 오열을 쏟아내지만 보통은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아빠. 그럼 다음에 다른 데 가서 꼭 사 주세여"
"그럼. 당연하지"
마트에 이어 다이소까지. 의외의 일격을 두 차례나 당한 아내와 나는 머리가 복잡했다. 일단 밥을 먹기로 했다.
아내는 신세계 상품권이 있다면서 다소 자신 있게 제안했다.
"여보. 쉑쉑버거 먹을래?"
"그래"
오늘의 세 번째 거절감. 쉑쉑버거는 신세계 상품권을 받아주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쉑쉑버거, 소윤이와 시윤이는 돈까스(다른 매장에서)로 점심을 해결했다. 오랜만에 수제 버거를 먹으니 또 수제 버거 가게를 운영했던 울산의 친한 부부네가 생각났다.
"여보. 아임고멧은 언제쯤 생각이 안 날까"
"그러게"
소윤이와 시윤이를 위해 시킨 돈까스에서는 돼지 누린내가 났다. 내가 느꼈을 정도면 꽤 정도가 심한 거였다. 난 달아야 할 음식이 달고, 냄새가 나야 할 음식이 단 건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화가 난다. 예를 들면 맛탕이 단 건 상관없지만 제육볶음이 단 건 용납이 안 되고, 돼지국밥에서 돼지 누린내가 나는 건 괜찮지만 오늘처럼 돈까스에서 돼지 누린내가 나는 건 참기 힘들다는 말이다. 더욱 화가 나는 건 [위생/청결 우수 매장]으로 선정되었다며 홍보하고 있었다는 거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당연히 모르니까 그랬겠지만) 소윤이와 시윤이는 꽤 잘 먹었다. 오늘 제공한 돈까스에서 누린내가 났다는 걸 어떤 방법으로든 알려줄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계산만 하고 나왔다.
지난번에 소윤이랑 둘이 왔을 때처럼 2층에 있는 현대자동차 전시장에 갔다. 그야말로 시간을 때우기 위한 행보였다. 그런 것치고는 소윤이와 시윤이 모두 이차 저차 타 보는 걸 재밌어했다. 체류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소윤아. 우리 저쪽에 오락하는데 가 볼까?"
"오락이여? 그게 뭐에여?"
"그때 아빠랑 둘이 왔을 때. 소윤이 볼링 치고 막 그랬잖아"
"아. 거기. 가자여"
소윤이가 저번에 왔을 때도 해보고 싶어 했던, 진짜 물총처럼 물이 나가면 그걸로 화면에 나타나는 적을 맞춰서 물리치는 게임을 시켜줬다. 다가오는 적이 좀비라는 걸 깨닫고 흠칫 놀랐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누군가를 물리쳐 죽여야 하는 건 물론이고, 그 대상이 좀비인 건 더더욱 경험시켜 준 적이 없다.)
시윤이는 게임의 흐름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아내나 내가 개입하는 건 극도로 거부했다. 다가오는 좀비를 향해 물줄기가 발사되도록 인도하는 아내의 손길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결과로, 시윤이는 소윤이에 비해 일찍 게임이 끝났다.
"여보. 커피라도 한잔할까? 얘네 젤리도 좀 주고"
"그래, 좋아"
소윤이와 시윤이는 치과에서 받은 젤리를 언제 줄 거냐고 틈만 나면 물어봤다. 4층에 있는 카페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는 젤리와 쿠키를 좀 내어줬다. 덕분에 여유롭게 한 모금 들이켰는데, 나도 모르게 졸았다. 오늘은 정말 조금도 마음의 부침이 없었고 아이들을 잘 대했는데, 다르게 얘기하면 그만큼 애를 썼다는 얘긴가 보다. 무척 피곤했다.
"여보. 괜찮아?"
"어. 나 괜찮은데. 왜 이렇게 피곤하지?"
"여보. 쉬는 게 더 피곤한 거 아니야?"
시윤이가 목마를 태워달라며 매달렸지만 공손히(?) 거절했다. 한 명을 태워주면 나머지 한 명도 태워줘야 하는데, 사실 이제 소윤이는 정말 버겁다. 안아주면 금방 팔에 고통이 찾아오고, 목마를 태우면 금세 목이 뻐근해진다. 날이 갈수록 지속시간이 짧아지는 걸 느낀다. 그렇다고 대놓고 시윤이만 해주겠다고 하면 소윤이는 마음이 상할 테니 체력이 없을 때는 그냥 둘 다 안 해 주는 게 최선이다.
저녁은 (양심적으로) 집에서 먹었다. 아내가 닭 다리 살 사 놓은 게 있어서 그걸 구워줬다. 처음 알았다. 닭 다리(특히 껍질)를 구우면 돼지 고기보다 기름이 많이 나온다는걸. 내 예상대로 아내는 거의 입에도 대지 않았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이게 무슨 고기냐고 물을 정도로 잘 먹었다.
"역시. 아빠는 고기를 제일 잘 구워여"
"아빠가 제엘 잘 구어여어"
빠르게, 신속하게, 밀리지 않도록 조율했다. 취침 전까지의 일정을. (체감상으로는) 백 년 만에 축구하러 가는 날이었다. 신병 훈련소의 조교처럼 모든 걸 닦달했다.
"자, 빨리빨리. 얼른얼른. 꾸물거리지 말고"
옷도 진작에 갈아입었다.
"여보. 옷 벌써 갈아입은 거야?"
"아, 그냥 어차피 벗는 김에. 갈아입었지"
"여보의 마음은 아니고?"
"아니야, 그런 거"
그래도 아내에게 덜 미안했다. 소윤이와 시윤이 둘 다 낮잠을 안 잤기 때문에 아내의 조기 퇴근을 예상했다.
"아빠. 가지마여"
"뭐야, 갑자기. 아빠 가지 말라고?"
"네"
"알았어. 그럼 안 갈게. 아빠랑 자자"
"아니, 그건 싫어여"
"뭐야. 아빠랑 자지도 않을 거면서 뭘 가지 말래"
"아니. 아빠도 좋긴 하지만 같이 잘 정도로 좋지는 않져. 엄마랑 자는 게 좋져"
오늘은 너희가 재워달라고 사정해도 나갈 거거든?
축구를 하고 돌아왔더니 아내는 식탁에 앉아 뭔가를 보고 있었다. 들어오는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동백꽃 봐?"
"어. 혼자 엄청 울었네"
"애들은 금방 잤어?"
"소윤이가 좀 늦게 잤어. 여보. 나 아직 보는 중이거든? 좀 이따 말 시켜줄래?"
이미 지난주에 끝난 드라마를, 그것도 본인의 시어머니와 시누이에 의해 스포일러 당한 드라마를 훌쩍 거리며 보고 있었다. 드라마 시청을 마친 아내는 급격하게 활동성이 떨어졌다.
"여보. 나 자야겠다"
궁금하다. 과연 아내가 다음 드라마로 뭘 고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