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30(토)
소윤이의 병세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잘 아프지도 않거니와 가끔 아파도 금방 기운을 차렸었다. 이렇게 길게 아픈 것도 오랜만이었다. 어제 잠깐 아픈 듯하다가 정상이 되었던 시윤이가 다시 아프지 않은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내도 코와 목이 칼칼하다면서 기침을 해대는 게 다행 중 불행이었고.
아침에 아내의 사촌 오빠에게 받아올 육아용품(매트 등)이 있어서 다녀와야 했다. 승합차가 필요했는데 장인어른의 회사 차를 지원받기로 해서 장인어른과 함께 다녀왔다. 한 세 시간 정도 걸렸는데 그 사이에 아내가 동영상을 하나 보냈다. 소윤이가 방에 누워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힘겹게 얘기하고 있었다.
"아빠. 오실 때 딸기 사 오세여"
짐을 나르느라 딸기를 사서 들어가지는 못했다. 돌아갔을 때는 아내의 상태가 더 안 좋았다. 아침에는 아픈 '징조'였다면 그때는 그냥 '아픔'이었다. 소윤이와 아내의 중상이 비슷했다. 둘이 번갈아 가며 기침을 했다. 아내는 점점 기운도 잃었다. 황무지에 찬란하게 핀 한 송이 꽃처럼, 시윤이만 생기가 넘쳤다. 엄마도 누나도 힘을 잃고 쓰러져 갈 때 혼자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소윤이는 계속 밥을 제대로 못 먹고 있었다. 먹는 거라도 잘 먹어야 없는 기운이라도 짜낼 텐데 먹는 게 영 시원치 않았다. 뭘 해줘야 조금이라도 더 먹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기본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계란밥을 해주려고 생각했다. 혹시 모르니 소윤이에게 한 번 물어봤다.
"소윤아.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어, 저는 그때 등촌칼국수 먹을 때 먹었던 볶음밥이 갑자기 먹고 싶어여"
뜬금없었지만 뭐라도 먹고 싶은 게 있다고 하니 반가웠다. 레시피를 찾아보니 평소에 내가 자주 해주던 '조금 더 성의 있는' 계란밥하고 크게 차이가 없었다. 어떤 포스팅에 보니까 계란볶음밥용 일본간장을 넣으면 맛있다고 하던데 마침 그 간장도 집에 있었다.
간단했지만 정성을 담아서, 이거 먹고 꼭 낫길 바라는 마음을 잔뜩 넣어서 만들었다. 아내는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고 소윤이는 그 와중에도 아빠가 요리하는 게 궁금하다면서 내 옆을 서성였다. 시윤이는 여전히 나 홀로 신난 강아지였고.
"소윤아. 어때? 맛있어?"
"아빠. 너무 맛있어여"
"아빠아. 지짜(진짜) 요이자다아(요리사다)"
밥을 차려주고 딸기를 사러 나갔다 왔다. 그사이 소윤이와 시윤이는 한 그릇을 모두 비웠다. 뿌듯했다. 곧바로 딸기를 씻어서 잘라줬다. 그러고 나서는 다들 한숨 자러 들어갔다.
어제도 무거운 공기가 가득했는데 오늘은 더했다. 자칫 잘못하면 거기 휩쓸려 함께 무기력 해지거나 예민해지기 십상이었다. 소파에 앉아 커피를 한잔하며 다시 마음을 챙겼다.
다들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소윤이의 병세는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열은 계속 38도 사이를 왔다 갔다 했고, 기침도 여전히 많이 했다. 그나마 아내는 자고 났더니 열이 조금 내리고 몸살 기운도 좀 떨어져 나간 것 같다고 했다. 아들은 여전히 씩씩했다.
아침에 받아 온 매트를 바로 깔았다. 안방에 애들 자는 자리에 원래 얇은 매트와 이불을 깔았었는데 거기에 토퍼(?)를 깔았다. 갑자기 정리해야 할 이불이 생긴 거다. 내친김에 장에 있는 이불과 함께 압축팩에 정리하기로 했다. 장 안에는 각종 이불과 옷 등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다. 버릴 것, 보관할 것을 나누어서 정리했다. 나 혼자서는 불가능했고 분류는 아내가 해줘야 했다. 아내는 조금 나아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환자에 가까운 상태라 앉아 있기도 버거워 했다.
소윤이와 아내는 방에 들어가서 누웠다. 이불을 정리하다 보니 작은방 자체를 정리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우리 집의 그린벨트 같은 곳이었다. 개발과 정비의 손이 닿지 않은 방치의 공간이자 갑작스러운 손님 방문 시에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이 되는 곳. 일단 이불을 정리했더니 장 안에 공간이 좀 생겼다. 방바닥과 구석에 지들 멋대로 흩어져 있던 [언젠가는 분류해서 입힐] 옷과 [언젠가는 분류해서 누군가에게 줄] 옷, [누군가에게 받았지만 미처 보지 못한] 옷, [출처도 불분명한 영원히 입히지 않을 게 분명한] 옷 등을 정리했다. 이것도 역시 내 권한에서는 처리가 불가하기 때문에 아내의 승인이 필요했다. 아내는 소윤이와 함께 방에 누워 있었다. 뭘 생각하고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계속 물어보기가 미안했다. 전략을 수정했다. 보이는 곳이라도 깨끗하게 하자는 생각으로 바닥에 널려 있던 각종 쓰레..아니 옷을 장 안으로 구겨 넣었다.
꽤 오래 걸렸다. 아내와 소윤이는 방에 누워 있었고 시윤이는 혼자 외롭게 거실과 방을 오가며 떠들어댔다. 시윤이는 공기청정기 같았다. 우울함과 무기력함이 지배하고 있는 집의 공기를 시윤이의 말과 행동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맑게 바꾸고 있었다. 아무도 자기에게 집중하지 않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애교를 부리고 더 티 없이 말하고 행동했다.
"아빠아. 따기(딸기) 왜 안 져여어엉"
"아빠 이거 정리하느라. 조금 이따 줄 게. 기다려 줘. 알았지?"
"네에"
"아빠아. 따기 언제 주꺼에여엉?"
"시윤아. 미안. 조금만 기다려 줘. 얼른 하고 줄 게"
"아빠아. 따기 주세여어. 따기"
"알았어. 준다니까. 미안. 조금만"
시윤이는 반복적으로 자신의 바라는 바를 요구했지만 하나도 밉거나 귀찮거나 성가시지 않았다. 시윤이는 오늘 하루 종일 단 한 번도 울거나 떼쓰지 않았다.
"시윤아. 이따 아빠랑 쓰레기 버리러 갈까?"
"뜨에기? 언제여엉?"
"좀 이따가. 아빠 이거 정리 다 하고 나면"
"끄때 누나양 아빠양 뜨에기 버린 데?"
"어. 같이 갔다 오자. 시윤이도 답답하지"
"네"
자기는 멀쩡한데 아픈 엄마와 누나 덕분에 바깥바람도 한 번 못 쐰 시윤이에게 잠시라도 나갈 기회를 주고 싶었다. 시윤이는 그것도 계속 물어봤다.
"아빠. 언제 나가여어엉?"
"아빠. 이거 다 정리하고 나면"
"아빠. 다 해떠여엉? 이제 나가여엉?"
"아니 아직. 더 해야 돼. 조금만 기다려 줘"
"아빠아. 그엄 이따 나가믄 나양 꼭 같이 가야 대여엉?"
"알았어. 당연히 시윤이한테 말하지"
물론 전혀 짜증 나지 않았다. 기특했다. 소윤이도 내가 작은방 정리할 때는 아주 잠깐 기력을 회복한 듯했지만 순간이었다. 다시 몸 져 누웠다.
시윤이의 협조 덕분에 수월히 작은방 정리를 마쳤다. 그동안 아내는 상태가 조금 더 좋아졌다. 물론 여전히 환자의 범주로 분류해야 했지만 그래도 요양만 해야 하는 상태는 아니었다. 아내에게 작은방의 변화를 자랑했다. 더불어 장 안에 처박아 놓은 옷들도 함께 정리하기 시작하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는 희망의 메시지도 전했다.
저녁은 집에 있던 된장국을 끓여서 말아줬다. 아내와 소윤이, 시윤이 모두에게. 소윤이는 이번에도 밥을 다 먹었다. 밥이라도 잘 먹으니 다행이었다.
"여보. 우리 밥 먹고 동네 카페라도 나갔다 올까?"
"그럴까? 너무 답답하지? 그러자. 소윤이한테도 어쩌면 그게 좀 나을지도 몰라"
삼송 요양원에서 두 명의 환자와 한 명의 미취학 아동을 데리고 탈출해 산책을 나섰다.(전지적 남편/아빠 시점) 걸어서도 10분이면 가는 스타벅스에 차를 타고 갔다. 거동할 체력이 없는 환자들을 위해서. 아내와 나의 커피와 생크림 카스테라 한 개를 샀다. 소윤이는 빵도 잘 먹었다. 이번에 그렇게 길게 아팠는데 토한 적은 없는걸 보면 속은 편했나 보다. 시윤이는 언제나처럼 투쟁적으로 빵에 얼굴을 밀착시켰다.
"시윤아. 천천히 먹어. 많이 있어"
"아, 시더여어"
소윤이는 많이 지친 모양이었다. 잘 못 먹기도 했지만 이렇게 길게 아파 본 게 오랜만이라 체력 자체가 많이 고갈된 듯했다. 밤이 되자 기침도 심해지고, 병세가 다시 짙어졌다. 짧은 외출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고작 3일째였는데 엄청 길고 어두운 터널에 들어온 듯 암울했다. 도대체 이 지리한 싸움은 언제 끝나는 건가 싶었다.
"여보는 괜찮아?"
"응. 나는 멀쩡해"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런가?"
나라도 멀쩡해서 다행이었다. 시윤이가 문 앞에 쌓인 재활용 쓰레기들을 보며 얘기했다.
"아빠아. 이거 나양 버이기로(버리기로) 해짜나여어"
"아, 맞다. 시윤아 그런데 지금은 너무 늦어서 이건 너희가 잠들면 아빠가 혼자 버려야 할 거 같아. 미안해. 대신 우리 카페 나갔다 왔잖아"
"아빠. 그르믄 안대여엉"
시윤이는 잠에 드는 순간까지도 말과 행동에 밉지 않은 장난기를 잔뜩 섞었다. 진짜 시윤이 덕분에 오늘 하루를 버텼을지도 모른다.
"시윤아. 고마워"
"왜여어엉?"
"그냥. 시윤이가 오늘 아빠한테 짜증도 안 내고 울지도 않고 엄청 기분 좋게 잘 있었잖아"
"갠차나여엉"
시윤이는 "괜찮다"는 말을 가끔 생뚱맞은 상황에 사용하곤 한다. 문맥에는 맞지 않는 사용이지만 "you're welcome" 정도로 이해할게.
"여보. 오늘 고생 많았어"
"여보가 힘들었지 뭐"
"우리 자러 들어가면 혼자 치킨이라도 먹어"
"치킨은 무슨"
입은 거절하고 있는데 뇌는 이미 빠르게 작동했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올랐고. 오늘 같은 날은 그 정도 사치쯤은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