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의 할 일

19.12.05(목)

by 어깨아빠

시윤이는 여전히 약간의 미열이 있었다. 역시나 아픈 사람 같지는 않았고. 병세가 완화될지 아니면 악화될지 몰랐기 때문에 아내를 따라 기도 모임에 보낼지 말지를 아주 잠깐 고민했다. 혹시나 악화될 가능성을 고려해 집에 남기기에는 너무 멀쩡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처치홈스쿨 기도 모임에 가고 집에 남았다. 집안일 좀 하고 운동도 하고 할 일도 좀 하고 그러려고 했는데, 집안일을 시작하니 '좀' 하는 게 불가능했다. 기본으로 깔려 있는 집안일은 물론이고 오늘은 하필 어수선한 식탁에 꽂혔다. 그걸 위시로 내 능력 안에서 최대한 깔끔하게 하려다 보니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집에 남아 있는 자로써 깨끗하지 않은 집을 그대로 두면 그 귀책이 꼭 나에게 있는 것 같기 때문에 움직이게 된다.


다행히 시윤이는 더 나빠지지 않았다. 활기차게 소리치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윤이도 마찬가지였고. 아내만 지치고 졸려서 정신을 못 차렸다.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눕더니 스르륵 잠들었다.


"여보. 방에 들어가서 편히 자"

"아니야. 그러면 너무 오래 잘 거 같아"

"오래 자면 되지"

"아니야. 나 여기서 15분만 잘게"


엄마의 낮잠을 위해 정숙을 유지할 두 녀석이 아니기 때문에 잠깐이라도 데리고 나갔다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보. 내일 감자볶음 재료 있어?"

"아니. 이따 잠깐 나가서 사 와야 돼"

"그래? 그럼 내가 애들 데리고 갔다 올까?"

"지금?"

"어. 애들 바람도 쐬고, 여보는 좀 쉬고"

"그럴래?"


내일 처치홈스쿨 반찬이 감자볶음이었다.


거의 혹한기 방한 복장에 준하는 정도로 따뜻하게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옷을 입혔다. 아파트 건물을 나서는 순간 흠칫 놀랐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추웠다. 미리 알았더라면 아마 애들을 데리고 나오지 않았을 거다. 마트까지 걸어서 5분 정도밖에 안 걸렸지만 제대로 된 혹한 체험을 했다.


"아빠아. 너무우 쭈어여어"

"그치, 시윤아. 아빠도 진짜 춥다"


"아빠. 너무 추워여"

"그러게. 이렇게 따뜻하게 입었는데도 춥네"


사야할 건 감자와 양파 딱 두 가지였다.


"소윤아, 시윤아. 그래도 아빠랑 마트 왔으니까 간식 하나 사 줄까?"

"뭐여?"

"글쎄. 가서 골라보자"


과자 매대로 갔다. 소윤이는 통에 든 씨리얼(과자)을 골랐고 시윤이는 초코송이를 집어 들었다. 각자 하나씩 사 줄 생각은 없었다. 소윤이가 고른 건 두 개를 합친 양 정도 됐다.


"시윤아. 초코송이는 자주 먹었으니까 오늘은 이거 먹을까? 누나가 고른 거?"

"아, 시더여어어어엉"

"맨날 누나가 양보하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시윤이도 양보 좀 해"

"시더여어어어엉"


그러더니 시윤이는 울기 시작했다. 매우 시끄럽게. 신경질과 떼를 섞어서.


"시윤아. 울음 그쳐"

"으아아아아아아앙"

"알았어. 계속 울면 아빠는 시윤이랑 얘기할 수 없어"

"으아아아아아앙"

"그럼 둘 다 먹지 마. 시윤이 손에 든 것도 내려놔. 아빠가 특별히 시윤이한테 사 주는 건데 뭐든 감사하게 받아야지. 그렇게 고집 피우고 떼쓰면 아빠도 못 사줘"

"으아아아아아앙"

"내려놓고 따라와"


시윤이를 두고 몇 발자국 걸어서 움직였다. 시윤이는 사태를 파악했는지 울음을 그치고 날 불렀다.


"아빠"

"응. 울음 그치고 또박또박 얘기해"

"머그꺼에여"

"씨리얼 먹을 거야?"

"네"


눈에 눈물이 맺힌 시윤이에게 짧게 설명했다. 이건 갑자기 주어진 선물인데 거기서 고집을 부리고 떼를 쓰면 손에 쥔 것도 잃게 되니, 그저 감사함으로 받으라고. 이런 상황에선 너의 권리를 주장할 여지가 없으니 포기와 양보를 우선으로 하라고. 물론 시윤이의 언어로 번역해서 전했다.


돌아가는 길도 마찬가지로 추웠다. 30분도 안 되는 외출이었는데 매서운 추위를 한껏 느꼈다. 아내는 방에 들어가서 자고 있었다.


"소윤아, 시윤아. 엄마 깨우지 마. 알았지? 엄마 좀 주무시게"

"아빠아. 엄마늠 언제 나와여어?"

"이따가. 저녁 준비 좀 되면"


"아빠. 밥 먹기 전에 씨리얼 조금만 먹어도 돼여?"

"그래"


요거트와 함께 씨리얼을 7알씩 나눠줬다. 나도 몇 알 집어먹었다.


"소윤아, 시윤아. 그냥 남은 것도 저녁 먹기 전에 다 먹어"

"왜여?"

"그냥. 저녁 먹고 나서 또 먹고 그러면 번거로울 거 같아서"


남은 것도 모두 나눠줬다.


저녁에는 냉동실에 있던 돼지 목살을 구워 먹기로 했다. 낮에 꺼내 놓은 고기가 아직 덜 녹아서 좀 더 녹는 동안 사 온 감자를 채 썰었다. 아내가 하든 내가 하든 제일 귀찮은 공정이 채 써는 공정일 테니.


고기만 굽기에는 아쉬워서 김치찌개도 끓였다. 찌개도 다 끓고 고기도 거의 다 구웠을 때쯤 아내가 깼다.


"여보. 왜 안 깨웠어?"

"그냥. 좀 자라고"


굉장히 짧은 시간에 많은 요리 활동(?)을 해서 뿌듯했다. 거기에 모두 잘 팔렸다. 김치찌개가 좀 달긴 했는데 맛이 없지는 않았고, 소윤이와 시윤이도 고기를 아주 잘 먹었다.


"아빠. 아빠가 구워주는 고기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여"

"아빠 딘따 요이자다(요리사)."


아직 경험한 세상이 너무 작은 녀석들이라 비교 대상이 없는 찬사지만, 언제나 기분이 좋다.


저녁 먹고 나서는 부지런히 씻겨서 재울 준비를 했다. 마치 축구하러 가는 날처럼 유독 더 부지런히 움직였다. 낮에 친구한테 연락이 와서 갑작스럽게 야간 회동이 잡혔기 때문이었다.


"아빠. 어디 가여?"

"어. 원민이 삼촌이랑 영주 삼촌 만나러"

"왜여? 뭐 해여?"

"그냥. 만나서 얘기하려고"


차마 게임하러 간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단순한 게임이 아닌 아빠의 학창 시절과 젊은 시절의 향수와 추억이 담긴 상징적인 게임이라는 의미를 이해하기에 소윤이는 아직 너무 어리다. (네, 그냥 궤변입니다.)


아내가 갑자기 바밤바가 먹고 싶다고 했다. 사다 줄 수 있냐고 해서 당연히 그렇다고 했다. 정규 외출일이 아닌 날에 두 녀석을 내팽개치고 나가야 하는 남편이고 아내는 셋째를 임신한 임산부니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우리 집이 1층이었으면 참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전해주지 않고 베란다로 툭 던지면 되니까.


아내에게 아이스크림을 전달하고 아이들과 인사를 나눈 뒤 집에서 나왔다. 게임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친구 한 명을 집에 데려다주고 왔더니 꽤 늦은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에게 카톡을 했는데 나와 있다가 애들이 깨서 다시 방에 들어갔다고 했다. 내가 집에 들어갔을 때는 아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주방에는 썰어 놓은 감자가 그대로 있었다.


곧바로 감자볶음을 만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아내는 잠든 듯했다. 열심히 감자를 볶고 있는데 아내가 다시 나왔다.


"잠들었어?"

"어, 조금"

"아까는? 애들 잘 잤어?"

"어. 둘 다 금방 잤지"


그러고 얼마 안 됐을 때 시윤이가 또 깨서 나왔다.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리는 틈을 이용해 내가 안았다.


"시윤아"

"네"

"이제 시윤이 혼자 들어가서 자. 엄마는 이따가 들어갈 거야"

"엄마양 같이이이이이잉. 으아아아아아아앙"

"엄마는 아까 너희 재워주셨잖아. 그러니까 자다 깼을 때는 시윤이 혼자 들어가서 자"

"으아아아아아아아앙"

"아무리 울어도 소용없어. 오늘은 시윤이가 아무리 울어도 그렇게 할 거야"


시윤이와 씨름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방 안에서 소윤이 울음소리까지 들렸다. 시윤이는 어느 지점에서 마음을 돌렸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갑자기 태도를 바꾸더니 순순히 자기 자리에 가서 누웠다.


"소윤아"

"네"

"엄마는 이따가 들어오실 거야. 알았지?"

"엉엉엉엉엉엉"

"엄마도 너희 재우고 나와서 좀 쉬고, 할 일도 하고 그래야 돼. 아빠가 뭐라고 그랬어. 자다가 깨면 울지 말고 다시 눈 감고 자면 된다고 했잖아"

"아빠. 엄마랑 너무 자고 싶어여어어어어"

"어, 엄마랑 안 자는 거 아니야. 조금 늦게 들어가실 뿐이야. 그러니까 먼저 자고 있어"


사실 어제 소윤이가 깨서 나왔을 때 아내와 나는 치킨을 먹고 있었다. 근엄하게 "엄마, 아빠도 할 일이 있으니까..." 라고 설명하는데 아내와 나의 눈이 동시에 치킨을 향했고, 웃음이 터지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오늘도 아내는 식탁에 앉아 마늘빵을 먹고 있었다.


소윤아, 시윤아. 엄마, 아빠의 할 일이 꼭 먹는 것만을 말하는 건 아니란다. 그렇지만 떳떳하다. 하루 종일 너네 키우느라 수고했으니까 쉬는 것도 할 일이지. 암. 그러니 앞으로도 중간에 깨면 방해하지 말고 알아서 재취침 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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