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11(수)
시윤이의 머리가 더벅더벅 헤진 게 오래되었다. 우리 가족이 다니는 미용실이 집에서 멀기 때문에 (파주, 차로 30분 정도) 쉽게 시간을 내지 못했다. 마침 오늘 아무 일이 없어서 아침에 급히 전화를 하고 예약을 잡았다. 나도 머리를 자를 때가 되었고, 아내도 출산 전에 마지막으로 머리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내가 출근을 안 해서 그런가 아침이 길어졌다. 오늘도 소윤이와 시윤이는 우리보다 일찍 일어났지만 자기들끼리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잘 놀 때도 있고, 다툴 때도 있는데 체감상 6 대 4 정도 되는 거 같다. 잘 노는 게 6. 어쨌든 과거에 비하면 아침의 자유가 훨씬 보장되고 편해진 건 사실이다.
오늘도 아침 겸 점심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밥 먹고 나니 금방 미용실에 갈 시간이 됐다. 미용실에 가 보니 점심시간 이후로는 우리가 첫 손님인 듯,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소윤이와 시윤이가 조금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게 가능했다. 나부터 의자에 앉았다. 파마를 하는 거라 머리를 말고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내는 긴 머리를 과감히 싹둑 자르고 (내가 부추겼다.) 파마. 나와 아내의 머리가 말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시윤이도 의자에 앉혔다. 아주 어렸을 때, 난생처음 미용실에 갔을 때도 전혀 울지 않았던 시윤이다. 그 뒤로 몇 차례 미용실에 갔을 때도 물론이고 오늘도 그랬다. 우는 건커녕 오히려 약간 즐기는 듯했다. 실실 웃으면서 자기 머리카락이 어떻게 잘려 나가는지 관찰했다.
"시윤아. 안 무서워?"
"네"
"재밌어?"
"네"
머리숱이 조금 더 많았으면 과감히 파마도 했을 텐데 그러기에는 너무 빈약한 머리라 일단 깔끔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귀밑까지 내려와서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는 걸 보니 내 속이 다 시원하고 후련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소윤이만 머리를 자르지 않는 게 괜히 신경 쓰여서 소윤이한테는 미리 조심스레 얘기했는데, 다행히 소윤이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알아여. 저는 저번에 고모가 잘라줬잖아여"
꽤 긴 시간을, 좁은 미용실에서 있었는데도 떼를 쓰거나 지루해하지 않고 잘 있었다. 아내나 내가 잔소리 한마디 하지 않고도 그렇게 있는 건 아니다. 끊임없이 말과 행동에 주의를 주는 수고가 필요하지만, 거기에 따라주는 건 참 감사하다. 훈육과 지도라는 게 어떨 때는 외줄을 타는 것 같다. 조금만 균형을 잃어도 떨어질 듯 위험해 보이는 게. 아내나 나는 부족해서 생기는 불균형보다는 과함에서 비롯되는 균형의 붕괴를 걱정하는 편이다. 그런 만큼 늘 마음에 은근한 미안함과 자기반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렇게 말을 잘 들어주면 그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엄마, 아빠는 머리 마느라 아무런 신경도 안 쓰고 입만 바쁜데도 말이다. 아침처럼 둘이 놀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큰 몫을 했다.
아내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미용실 일정이 끝났다. 저녁에는 백석에서 친구네 부부를 만나 밥을 먹기로 했다. 약속한 시간까지 세 시간 정도가 남아서 막막했다. 아내는 애들을 잠깐 장모님께 맡기고 데이트를 하자고 했다. 장모님은 집에 계시지 않았다.
"여보. 어디 가지?"
"그러게. 일단 백석 쪽으로 갈까?"
"그러자, 그럼"
가는 동안 시윤이는 먼저 잠들었고, 소윤이는 자기 싫다는 걸 약간 강제로 재웠다. 안 그러면 분명히 이따 밤에 괜히 심통 부리고 짜증을 낼 것 같았다. 아침 겸 점심만 먹고 중간에 점심을 걸렀더니 배가 엄청 고팠다. 애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서 만나기로 한 장소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고, 아내가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러 갔다. 난 잠든 아이들과 함께 차에 있었다. 아내는 고로케, 핫도그를 사 왔다. 소윤이는 엄청 짧게 자고 일어났다. 시윤이를 뺀 나머지는 모두 차에서 허기를 채웠다.
일찍 가긴 했는데 막상 할 게 없었다. 차에서 내리지 않고 바로 근처에 있는 홈플러스 건물로 이동했다. 시간이 좀 남았는데 돈 안 들이고 재밌게 보내고 싶을 때는 마트만 한 곳이 없다. 물론 이성을 잃고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기 시작하면 꽤 큰돈이 드는 게 함정이지만.
일단 시윤이 배부터 좀 채웠다. 그래 봐야 빵 한 개였지만. 소윤이도, 시윤이도 잠이 덜 달아났는지 뚱했다.
"헐. 대박"
"왜?"
"휴무일이다"
"아, 오늘 수요일이구나"
최소한 1시간은 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마트로 갔는데 입구가 막혀 있었다. 왜 꼭 마음먹고 갈 때마다 수요일인 것 같지? 아내와 나는 다시 막막해졌다. 시간은 아직 한참 남고 갈 곳은 없고.
아내와 아이들은 빵 하나씩, 나는 핫도그 하나로 점심을 대신했으니 배고픔은 여전했다. 그렇다고 뭔가 거창한 걸 먹기에는 금방 저녁을 먹어야 하고. 조금 더 허기도 채우고 시간도 때울 겸, 롯데리아에 들어갔다. 아내는 감자튀김 하나와 치즈 스틱 두 개를 사 와서 애들을 줬다. 아내와 나도 옆에서 홀짝홀짝 집어먹었다.
그러고 나서도 시간이 한참 남았다.
"여보. 다시 벨라시타로 가자"
"그래, 그러자"
1층 한 바퀴, 2층 한 바퀴. 천천히 돌아도 시간이 남았다. 2층 끝에 메가박스가 있었고 거기를 들어갔는데 엄청 안락하게 앉을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마지막 30여 분은 거기서 보내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자리를 잡았는데 소윤이가 말했다.
"아빠. 아까부터 물 달라고 했는데 왜 안 줘여?"
"아, 맞다. 아빠가 갔다 올게"
이놈의 건물은 무슨 정수기가 하나 없었다. 편의점이라도 있으면 거기서라도 사려고 했는데 편의점도 어디 붙어 있는지 모르겠고. 고작 물 두 잔 뜨러 가서 한 15분을 헤맸다. 결국 지하 1층 푸드코트에 가서 물을 떠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거기로 갈걸.
드디어 약속한 시간이 되었고 우리는 식당에 들어갔다. 친구네가 도착하기 전이었지만 먼저 들어갔다. 저번에 갔던 샤브샤브 집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먼저 놀이방에 풀어 놨다. 친구네도 금방 와서 식사를 시작했다. 사실 말이 놀이방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널찍한 공간에 공 몇 개와 TV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그나마 벽걸이 농구 골대라도 있었는데 이번에 갔더니 그것마저도 없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걸어 나왔다.
"아빠. 이제 밥 먹을래여"
소윤이는 저번처럼 월남쌈을 끊임없이 싸 먹었고, 시윤이는 흰밥만 먹었다. 저번에는 버섯을 그렇게 먹더니 오늘은 버섯은 아예 먹지도 않고, 그냥 맨 밥만 주구장창 먹었다.
"시윤아. 다른 것도 먹어"
"머꾸 이떠여어"
"뭘 먹고 있어. 밥만 먹잖아"
"아니에여엉. 이거뚜 머꾸 이떠여엉"
친구네는 아직 아이가 없어서 엄청 어수선하고 그러지는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같은 건물 1층에 있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식당이야 먹을 게 있고, 어른들도 밥을 먹느라 대화가 좀 없어도 되지만 카페는 좀 달랐다.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간 곳이니 대화가 보장되어야 했는데 반대로 여건은 더 안 좋았다. 애들한테는 너무 지루한 공간이었다. 엄마, 아빠가 자기들과 놀아주지 않는다면 더더욱. 아내는 애들을 위해 초코 케이크도 하나 사 왔는데 시간을 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가 눈 감추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사라졌으니까.
'대화를 나누는 게 만만치 않겠구나'라고 각오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만만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또 둘이 엄청 잘 놀았다. 너무 잘 놀아서 큰 웃음과 소음을 자제시켜야 할 정도로, 둘이 죽이 잘 맞았다. 덕분에 어른들은 큰 방해 없이, 꽤 긴 시간 대화에 집중했다. 어른들의 대화도 예상보다 길어져서 10시가 다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그때까지 한 번도 투정을 부리지 않고 잘 놀았다. 말이 논 거지 시윤이는 아기 의자에 결박(?)된 채, 소윤이는 자기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시간을 보낸 건데, 둘은 즐거워 보였다.
"소윤아, 시윤아. 고마워"
"뭐가여?"
"아, 어른들이 오랫동안 얘기했는데도 소윤이랑 시윤이가 잘 기다려주고 방해하지 안아줘서. 그게 고맙다고"
사과는 빠르게, 감사는 더 빠르게. 인간관계의 철칙은 육아에도 적용된다. 애들도 인간이니까.
"시윤이도 고마워"
"왜여엉?"
"엄마랑 아빠랑 삼촌이랑 이모랑 얘기하는 동안 잘 기다려서"
"누나양 놀아떠여엉"
"그치? 재밌었어?"
"네"
그때까지만 해도 고마웠는데 집에 도착해서 잘 때는 싹 달아났다. 아내가 애들을 재우러 들어갔는데 한참 동안 기척이 없었다. 잠들었다고 생각했다. 내일 처치홈스쿨 기도 모임을 우리 집에서 한다고 하길래 급히 화장실 청소를 했다. (100% 자발은 아니었다. 아내는 정확히 이렇게 얘기했다. "지금 가장 시급한 건 화장실이야. 약식으로라도 해야지" 내가 안 했으면 배가 잔뜩 나온 아내가 분명히 했을 거다.) 어질러진 거실도 대충 치웠다. 내일 아침 아내가 일어나서 세세한 부분만 신경 쓰면 될 정도로. 그러고 나서 안방에 들어가 아내를 깨웠다. 깨웠다기보다는 숙면을 위한 과정이었다. 일어나서 집을 치워야 한다는 생각이 있으면 무의식중에 압박이 되어서 편히 잘 수가 없다. [어느 정도 괜찮으니 편히 자도 좋다]는 메시지를 뇌에 심어줘야 안락한 수면이 가능하다. 그걸 위해서 잠시 아내를 깨운 거다.
"여보"
"어"
"내가 다 치웠어. 내일 아침에 조금만 하면 돼. 그러니까 계속 자"
"아니야. 나가야지"
아내가 일어나서 문을 닫고 거실에 나오고 얼마 안 돼서 소윤이가 따라 나왔다. 매우 크게 울면서.
"으어엉엉엉엉. 으어엉엉엉엉"
"시윤아. 그만 울어. 왜 울어"
"흑흑. 엄마가. 흑흑. 나가서여. 흑흑"
"얼른 들어가서 자"
"흑흑. 엄마랑. 흑흑. 같이. 흑흑. 자고. 흑흑. 싶어여. 흑흑"
"강소윤. 너 자꾸 밤마다 이럴 거야?"
"흑흑. 아빠. 흑흑. 엄마랑. 흑흑. 너무너무너무너무. 흑흑"
"울지 말고 얘기해"
"네. 흑흑"
"울지 말라고"
"흑흑"
"계속 울 거야?"
"아니여. 엄마랑 너무너무. 흑흑. 자고 싶어여"
"엄마는 너네 재워줬잖아. 누가 아직까지 안 자라고 했어. 어? 이제 엄마는 나갈 거야. 그러니까 그냥 누워서 자"
"으어엉엉엉엉"
"울지 말라고 했지"
"헙. 흑흑. 흑흑. 아빠"
"얘기하지 마. 바로 누워서 자"
그때쯤 시윤이도 소란스러웠는지 눈을 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째의 타고난 상황 파악 능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아빠. 흑흑"
"얘기하지 말랬지. 너네 자꾸 이러면 이제 엄마랑 계속 못 자게 할 거야. 엄마가 힘이 남아 돌아서 너네 재우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 엄마, 아빠가 니네를 배려하면 소윤이도 얼른 자려고 노력해야지. 왜 여태 안 자고 있어"
"아빠. 자려고 노력하고 눈 감았는데도 잠이 안 왔어여어"
"그래도 계속 눈 감고 자야지. 어?"
소윤이도 엄마를 찾는 게 습관화되는 느낌이었고, 오늘은 나도 필요 이상으로 엄했다. (엄하다는 건 순전히 나의 입장을 반영한 표현이고, 예민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소윤이는 매우 슬픈 감정을 안고 다시 방에 들어갔고, 난 씩씩거리는 호흡 속에 섞여 있는 미안함을 느끼며 책상에 앉았다.
딸아. 아빠 왜 그러는 걸까. 지금 니네 엄마만 봐도 말이야. 할머니네 집에 가도 할아버지랑 같이 안 자거든. 평생을 놓고 보면 너랑, 니 동생이랑 같이 부대끼며 자는 건 찰나에 가까운데 말이야. 아빠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거니? 나중에는 아빠가 사정사정해도 니네가 싫다고 내빼는 날이 올 텐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