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14(토)
아침에 용산역에서 약속이 있었다. 혼자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드문 일이었고, 아침 일찍 나가는 것도 오랜만이었고, 용산역에 가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밤새 좀 끙끙댔다. 자기 직전에 불안한 낌새가 있긴 했다. 아니나 다를까 밤새 사투를 벌였다. 증세가 심해서 사투를 벌인 건 아니고 딱 그 경계선에서, [아픔]의 영역으로 넘어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이제 한 번 아프면 정상인이 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걸 느끼고 있다. 어떻게든 정상의 영역에서 버티는 게 최선이었다. 나의 정신은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아, 아프면 안 돼'
'내일 약속도 있고 부모 교육도 가야 되는데. 아프면 안 되는데'
'가영이한테 옮기면 안 되는데'
아내와 롬이를 떠올리며 아내를 등지고 벽을 향해 누웠다. 최대한 멀리.
이마를 짚었는데 열은 없었다.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가 내 몸의 남은 기운을 빼앗으려는 느낌이었다. 난 필사적으로 그걸 지켜내려고 했고. 덕분에 잠을 설쳤다. 그래도 아침에 일어났더니 걱정했던 것보다는 몸이 괜찮았다. 평소를 90~100이라고 치면 자는 동안에는 50~60, 아침에는 60~70 정도였다.
내 알람 소리에 소윤이와 시윤이도 깼다.
"아빠. 이거늠 머에여엉?"
"그거? 고구마칩. 너네 조금씩 먹어"
"네?"
아침을 먹기 전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는 규칙에 위배되는 아빠의 얘기에 흠칫 놀란 듯, 시윤이가 날 쳐다봤다.
"먹어. 대신 조금씩만 먹어"
사실 아내가 어제 미리 준비해 놓은 떡밥이었다. 간만의 주말에 늦잠을 자려고 했는데 갑작스럽게 남편이 나가게 되어 실망한 아내는 고구마칩을 꺼내 놓으며 이렇게 얘기했다.
"여기 올려놔야겠다. 보면 먹든지 하라고"
그래도 기특하게 소윤이와 시윤이는 스스로 봉지를 닫았다.
"아빠. 그럼 아침 먹어야 되니까 이만큼만 먹을게여"
"그래. 잘했어. 이따 아침 먹고 엄마한테 또 달라고 해"
"그런데 아빠는 어디 가여?"
"아, 누구 좀 만나려고"
애들에게도 한동안 보지 못했던 광경이라 어색했는지 옷 입는 날 신기하게 쳐다봤다.
"소윤아, 시윤아. 이거 귤 먹고 놀아. 엄마 깨우지 말고. 알았지?"
"네"
"아빠 갔다 올게"
아침도 먹고, 커피도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세 시간 정도. 헤어지고 나서 차에 탔는데 몸에 힘이 축 빠졌다.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어. 이제 오는 거야?"
"응. 애들은 잘 있었어?"
"어. 잘 있었지"
"여보. 난 아파"
"어? 어디가?"
"아픈 것까지는 아니고 몸이 좀 안 좋아. 어제 잘 때 계속 그래서 잠 설쳤거든"
"진짜? 어떻게 해? 많이?"
"아니. 많이는 아니고 그냥 좀 기운 없는 정도"
"이제 마지막으로 여보한테 간 건가"
"그런가. 들어갈 때 쌍화탕 하나 사 가려고. 타이레놀은 있지?"
"아마 있을 거야. 한 번 찾아볼게"
"어. 없으면 연락 줘"
타이레놀은 있었다. 아내는 한살림에서 파는 쌍화차를 사 오라고 했다. 집에 도착해서 타이레놀과 쌍화차를 마신 뒤 바로 방에 누웠다. 오후에는 부모 교육에 가야 해서 일정이 빠듯했지만 그대로 버티면 더 나아질 거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일단 누워서 잤다. 밤처럼 설치지 않고 푹 잤다.
"여보. 어때?"
"어. 좀 나아졌다"
"다행이네"
"어. 늦었다. 얼른 가야지"
잠깐의 꿀잠 덕분인지, 쌍화차 때문인지, 아니면 타이레놀의 공인지. 아무튼 경계선에서 [멀쩡함]쪽으로 이만큼 넘어간 느낌이었다.
"아빠. 이제 안 아파여?"
"어. 그런 거 같은데?"
어찌 됐든 낮잠을 자서 그런가. 오히려 개운한 느낌도 들었다. 부모 교육 내내 별로 힘들지도 않았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침 겸 점심을 먹었고, 그 사이 난 잤고. 어쩌다 보니 오늘도 점심을 걸렀다. 부모 교육이 끝날 즘에는 소윤이와 시윤이가 배가 너무 고프다면서 드러누웠다. 애들도 애들이었지만 나와 아내도 무척 배가 고팠다.
부모 교육을 마치고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사천 볶음면, 로제 파스타, 새우볶음밥을 먹었다. 소윤이는 파스타, 시윤이는 볶음밥을 진짜 엄청 잘 먹었다. 아내와 나는 말할 것도 없고. 사실 각 음식별로 1.5인분 정도가 나오는 곳이라 양이 꽤 많았는데 남긴 게 없었다. 물론 아내와 아이들이 아무리 잘 먹어도 나 한 사람이 먹는 양보다 많이 먹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밥을 다 먹고 집에 가는 길에 형님(아내 오빠)네 집을 지나면서 전화를 했다.
"삼촌"
"어, 소윤아"
"삼촌 어디에여?"
"삼촌? 스타벅스"
"우리는 지금 삼촌 집을 지나고 있어여"
"아, 그래? 집으로 올 거야?"
"네? 그래도 돼여?"
소윤이는 뜻밖의(내심 바라던) 제안에 당황한 듯 말문이 막혔다.
"엄마. 그래도 돼여?"
"에이 너무 늦었어"
형님네도 소윤이와 시윤이가 보고 싶은 눈치였다. 대화는 아내와 형님에게로 넘어갔다.
"어떻게 할 거야?"
"아니야. 너무 늦었지"
"안 그래도 나랑 예지도 얘기하긴 했거든"
"그럼 우리가 스타벅스로 갈게"
그리하여 소윤이와 시윤이는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게 됐다.
"아빠. 인사만 하고 바로 갈 거에여?"
"아니. 그건 너무 아쉽지"
"그럼 좀 앉아 있다가?"
"응. 당연하지"
"우아. 찐난다아"
한 시간 조금 안 되게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직원이 와서 곧 마감 시간이니 자리를 정리해 달라고 했다.
"소윤아. 이제 가야 된대. 아쉽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오래 있어서 괜찮아여"
소윤이가 특유의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얘기했다.
밤이 되니 또 조금 아프려고 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몸은 노곤해서 잠시라도 눕지 않고는 버티기 힘들었다. 거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아내가 애들을 씻긴다고 했다.
"아니야. 내가 씻길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야. 여보는 좀 쉬어. 옷만 입혀줘"
"그래"
이럴 때만 아내의 말에 빠른 순종.
시윤이가 안 보이길래 시윤이를 불렀다.
"시윤아. 어디 있어? 뭐해?"
"똥 짜고 이떠여어"
"아, 그래. 잘 싸"
시윤이는 내가 씻겼다. 똥을 상상만 해도 구역질을 올리는 아내에게 맡기는 건 너무 가혹하니까.
큰 덩어리들은 대충 제거하고 잔잔바리를 없애기 위해 시윤이를 쪼그려 앉히고 난 샤워기를 들었다. 씻겨주는 나에게 가장 좋은 자세는 쪼그려 앉은 자세에서 허리를 굽히고 엉덩이를 살짝 높여주는 거다. 잔해물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정확히 관찰하는 게 가능해서 불필요하게 똥내를 묻히게 되는 헛손질을 줄이니까.
"시윤아. 엉덩이 들어봐"
"이케여어?"
"어. 옳지. 조금만 그대로 있어"
"네"
시윤이한테는 쉬운 자세가 아니다. 머리가 엉덩이보다 낮은 고도에 위치하게 되는, 피가 쏠리는 자세니까. 열심히 닦고 있는데 그 자세 그대로 시윤이가 날 향해 고개만 돌리며 날 불렀다.
"아빠"
"어. 왜, 시윤아. 힘들어?"
"따양해여"
"어, 그래. 아빠도 사랑해"
시윤이가 이제 깨달은 걸까. 세족식보다 더 큰 사랑은 세엉식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