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코스프레

19.12.17(화)

by 어깨아빠

아내는 나에게 아침에 한 시간이나 더 잘 수 있는 은혜를 베풀었다. 한 번 깨서 그런지 완전히 깊게 잠들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홀로 방에 격리되어 자유로운 한 시간을 보냈다. 아침까지 이미 아내가 다 먹여놓고 나서 일어났다.


애들은 준비가 다 끝났는데 애들 준비시키느라 정작 자기는 준비하지 못한 아내와 늦게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은 나 때문에 시간이 촉박했다. 바쁘게 움직이며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시윤이가 제동을 걸었다. 뭔가를 잘못해서 훈육을 시작했는데 거기서도 고집을 부려서 거의 30분을 붙잡고 있었다.


그야말로 아침부터 난리 난리 생난리였다. 하아.


아내와 아이들은 교회에 데려다주고 난 또 도서관에 갔다가 미술 수업을 받으러 갔다. 오늘 날씨가 매우 흐렸다. 차 없이 집에 돌아와야 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걱정됐다. 수업이 끝나고 전화해 보니 아내와 아이들은 이미 집에 도착해 있었다.


"뭐 타고 갔어?"

"지하철 타고 왔지. 그런데 아무도 양보를 안 해주더라"

"진짜?"

"어. 그래서 거의 계속 서서 왔어. 사람도 많았고"

"고생했네. 지금은 뭐해?"

"애들은 간식 먹고 난 좀 쉬고 있어"


쉬는 게 쉬는 게 아니고, 잠시라도 뭔가를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 자체가 쉼이 되는 게 육아인의 삶이다. 아내와 통화를 끝내려고 하는데 소윤이가 다급하게 날 불렀다.


"아빠. 아빠"

"어. 소윤아"

"어디에여?"

"아빠 이제 막 출발하려고"

"이따 집에 오면 뭐 그렸는지 보여주세여"

"알았어. 소윤아.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간식 중에서여?"

"어. 간식"

"음. 몸에 좋은 것 중에 뭐가 있을까"

"잘 생각해 봐"

"그냥 아빠가 생각해서 괜찮겠다 싶은 거 사 오세여"

"그래, 알았어"


"아빠. 난떼도 (나한테도) 물어봐여"

"시윤이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네"

"뭐?"

"간직(간식)"

"알았어"


지난 부모 교육 이후 집 밥 먹이기, 바깥 음식(간식 포함) 최대한 줄이기를 실천하고 있다. 상품 뒷면의 원재료 표를 보는 습관을 들이는 중이고, 한살림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새삼 느끼고 있다. 특히 과자처럼 굳이 안 먹어도 되지만 아이들의 쾌락을 위해 가끔 사주고 싶은 품목들 (다시 말해, 몸에 좋을 게 없는) 은 차이가 극명하다. 그전에도 자주 갔지만 그냥 '조금' 더 나은 줄 알았는데 그 정도가 아니었다.


한살림에 들러서 조그만 과자 한 봉지를 샀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신나게 놀고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과자 한 봉지에도 큰 함박 미소를 지으며 하던 일을 멈추고 일어섰다.


"자. 이거 조금씩 먹자"

"밥 먹기 전에여?"

"응. 밥 먹기 전에"


일을 할 때는 퇴근이 일상이었지만 요즘은 하루종일 떨어져 있는 날이 드물다. 그나마 화요일이 좀 오래 떨어져 있는 날이라 퇴근하는 아빠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여느 때처럼 시윤이는 가슴이 시키는 대로 멈춤 없이 손과 입을 놀렸고, 금방 과자가 떨어졌다. 그에 비해 소윤이는 아끼고 아끼고 또 아껴 먹는 중이었다. 다만 소윤이도 좀 지나쳤다. 과자를 입에 넣고 녹여 먹고 있었다. 아껴 먹는 게 자기 습관이기도 했지만 아내나 내가 소윤이가 뭔가 아껴먹을 때마다 그걸 굉장히 좋게 여긴다고 느꼈나 보다. 일부러 더 그러는 것 같았다. 아껴먹는 것도 정도가 있지 그대로 두면 자기 전까지도 남아 있을 기세였다. 역시나 소윤이는 적당히가 없다. 적당히가.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는 고기를 구워주고 아내와 나는 파스타를 해 먹었다. 역시나 집에 있는 재료들로. 아내는 교회에서 집에 오는 길이 너무 고단했다며 저녁 준비하는 동안 잠시 방에 들어가서 누웠다.


딸기도 먹고, 귤도 먹고. 풍성하고 즐거운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다시 찾아온 취침 시간. 다시 한번 아이들에게 얘기했다.


"당분간 엄마랑 못 자는 거 알지? 오늘도 아빠랑 잘 거야"


다 알고 있었다는 반응이었다. 순순히 받아들였다. 책 한 권씩 읽고 엄마와 롬이에게도 인사하고 웃으며 방에 들어갔다. 둘 다 낮잠을 안 잤다. 시윤이는 금방 곯아떨어졌다. 휴대폰 게임 한 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소윤이도 움직임이 없고 조용하길래 자는 줄 알았다.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소윤이가 몸을 일으켰다. 울면서.


"아빠아아아아"

"어. 소윤아. 왜 안 잤어"

"아빠아아아아. 나가지 마여어어어"

"아니야. 아빠도 나가야지. 소윤이 얼른 다시 누워서 자"

"아빠아아아아. 엄마한테 인사만 하고 올게여"

"인사는 아까 다 했잖아. 얼른 누워서 자"

"아빠아아아아. 안아주세여어어"


꿩대신 닭인지. 소윤이는 아내 대신 나를 끌어안고 눈물의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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