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18(수)
오랜만에 아내의 목장 모임이 잡혔다. 그래서였을까. 아내는 내가 10시까지 자도록 방치했다.(이토록 고마운 방치라니.)
"몇 시까지야?"
"10시 30분까지. 한 2시간이면 될걸"
애초에 믿지 않았다.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었으니까. 서너 시간은 족히 채우고 오지 않을까 싶었다.
아내를 떠나보내는 순간, 새삼 세월의 흐름을 느꼈다. 소윤이와 시윤이 그 누구도 이 상황을 거부하지 않았다. 엄마가 떠나는 것도, 아빠하고만 있는 것도. 소윤이와 시윤이 모두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제일 버거워했..)
아침 먹고 어제 만들어서 냉동실에 넣어 놓은 바나나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꺼내줬다.
"소윤아. 어때?"
"맛있어여. 그런데 그냥 바나나 맛이에여"
"그래? 딸기 아이스크림이랑은 뭐가 더 맛있어?"
"음, 딸기여. 그래도 딸기는 뭔가 좀 다른 맛이 나여"
"그렇구나"
"그래도 엄청 맛있어여"
따지고 보면 단가가 엄청 비싼 거다. 어제 딸기 아이스크림은 생딸기를 잔뜩 넣고 갈았고, 오늘 바나나 아이스크림은 생바나나를 넣은 거니까. (바나나는 초특급 할인 제품이긴 했다.) 자체 제작 아이스크림에 대한 만족도가 낮았으면 모를까 둘 다 엄청 즐거워하니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서 먹여야겠다.
거실 창문에 아주 오래전에 그려놨던 그림을 지우고 새로 그림을 그렸다. 소윤이, 시윤이, 나, 아내를 그리고 트리도 그렸다. 말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도 그렸다. 글을 읽으며 상상이 되는 그림보다 1000배 정도 허접한 그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빠. 진짜 잘 그린다. 너무 잘 그린다"
"아빠아. 딘따 달 그렸따여어"
아직 아이들이 어린 편이니 경솔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자녀와 부모의 관계가 삐걱거리는 건 '조건'이 끼어들 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자녀든 부모든 조건 없이 사랑을 주고받으면 견고해진다. 나의 바람이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장성해서도 지금 그들을 바라보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 그들도 지금처럼 아빠를 슈퍼맨으로 봐주는 것. 거기에 건강하기까지 하면 얼마나 좋을까.
자녀가 둘이어서 좋은 점은 (수도 없이 많지만..) 오늘 같은 날, 같은 공간에 있어도 잠시나마 분리가 가능하다는 거다.
"소윤아, 시윤아. 좀 놀고 있어. 아빠는 여기서 컴퓨터 좀 할게"
"네"
물론 해결해줘야 하는 민원이 끊이지 않지만 꽤 길게 (10분 이상) 날 찾지 않고 자기들끼리 노는 시간도 생긴다. 덕분에 책상에 앉아 할 일도 하고 그랬다. 집중은 잘 안됐지만.
"시윤아. 이제 낮잠 한숨 자자"
"왜여?"
"시윤이 졸리니까"
"누나늠여?"
"누나도 같이 들어가서 누울 거야"
"자기 시더여어어. 으아아아앙"
"그래도 자야지. 이리 와 봐"
안아서 토닥여줬다. 소윤이에게는 선택권을 줬다. 거실에 혼자 있어도 되고 따라 들어와도 된다고. 대신 따라 들어오면 떠들거나 장난치지 않고 조용히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소윤이는 같이 들어가겠다고 했다. 시윤이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고 잠이 들었다. 시윤이가 잠든 걸 알았지만 일부러 모른 척하고 누워 있었다. 소윤이도 시윤이가 잠든 걸 알았지만 그전에 몇 번 잡담을 하다가 나에게 주의를 들은 게 있어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간간이 하품도 하고 졸린 기색을 비추길래 혹시나 했는데 역시 그런 일은 없었다.
"소윤아. 이제 나갈까?"
"네"
점심을 챙겨줘야 했는데 오늘도 아침이 늦었고, 마땅한 반찬도 없었다. 아내가 아침에 끓여 놓은 단호박 스프가 있길래 그걸 좀 주고 냉장고에 있는 요거트와 견과류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윤아. 단호박 스프 먹을까? 점심 대신에?"
"좋아여"
살짝 데워서 그릇에 담아줬다. 한 숟가락을 입에 넣은 소윤이가 말했다.
"아빠. 엄청 맛있다여"
"그래? 또 있으니까 많이 먹어"
잠시 후
"아빠. 이거 뭐 씨 같은 게 있어여"
"그래? 그냥 먹어도 돼. 호박씨는"
"그런데 안 씹어져여"
"그래? 그럼 한 쪽에 뱉어 놔"
가만 보니 먹는 게 영 시원찮았다.
"소윤아. 맛이 없어?"
"아니여. 맛이 없지는 않은데 씨 때문에 먹기가 싫어여"
"그래? 그럼 아빠가 씨 걸러줄게"
체에 밭쳐서 씨를 걸러내고 조금 더 고운 스프로 만들어줬다.
"이제 괜찮아?"
"네. 아주 작은 씨가 조금 씹히긴 하는데 그 정도는 괜찮아여"
"그래. 얼른 먹어"
그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소윤아. 맛 없어? 맛이 없으면 안 먹어도 돼"
"맛이 없는 건 아닌데 입맛에 좀 안 맞아여"
"못 먹겠어?"
"네"
"그래, 그럼 먹지 마. 그럼 대신 요거트 먹자"
"요거트가 있어여?"
"어, 냉장고에 있던데"
"어디여?"
"냉장고에"
냉장고에 있던 요거트를 꺼내들고 유통기한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소윤이가 말했다.
"아빠. 그건 엄청 오래된 거에여"
"그러네. 아빠는 이거 먹어도 되는 건 줄 알았어"
"그거 엄마가 예전에 사 놓은 거에여. 아빠 몰랐어여?"
"어. 몰랐네. 어쩌지. 소윤이 먹을 게 없네"
"괜찮아여"
아내에게 모임이 끝나고 오늘 길이라며 전화가 왔다. 역시나 두 시간은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아내를 기다리는 동안 낮잠을 자던 시윤이가 깨서 나왔다. 다행히 아내는 요기가 될 만한 걸 많이 사 왔다. 치킨 샐러드, 감자 샐러드, 식빵 등등. 감자 샐러드를 식빵에 채워 하나씩 먹었다. 아내와 나는 치킨 샐러드도 먹었다.
저녁에는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만났다. 아내가 장인어른, 장모님과 통화하며 약속을 잡는데 소윤이와 시윤이는 끊임없이 물었다.
"엄마. 오늘 할머니, 할아버지 만나는 거에여?"
"엄마아. 함무니 와여어?"
마치 간식을 주기로 하고 안 줬을 때 묻는 것처럼, 끈기 있게. 질리도록.
"아직 몰라. 좀 기다려 봐. 그만 물어보고"
소윤이와 시윤이의 간절한 바람대로 근처 고깃집에서 만나 저녁을 먹었다. 가장 실패가 없는 음식이 고기인 듯하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오늘도 엄청 많이 먹었다. 시윤이는 고기를 잘라주기가 무섭게 그릇을 비웠고, 소윤이는 모두 식사를 마치고 난 뒤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쌈을 싸 먹었다.
밥 먹고 나서는 카페도 들렀는데 할머니 찬스를 이용해 오늘 먹을 쿠키는 물론이고, 내일 먹을 쿠키까지 얻어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니 말을 썩 잘 듣지는 않았지만 아내와 내가 자주 가는 독립된 공간이 있는 카페라 그나마 좀 편히 있었다.
꽤 늦은 시간에 집에 돌아와 애들을 씻기고 재우려는데 아내가 소윤이 머리를 들춰보면서 말했다.
"여보. 소윤이 머리 언제 감겼지?"
"글쎄. 오래되긴 했지"
소윤이가 끼어들었다.
"양양에서 감고 안 감은 거 아니에여?"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야"
아내는 머리가 너무 기름지고 비듬도 있다면서 감겨야겠다고 했다. 날씨가 추워지고 나서는 별로 신경을 안 쓰긴 했다. 나는 매일 감으면서. 잠시 후 소윤이가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등장했다. 시윤이가 물었다.
"아빠. 나늠여?"
"시윤이는 안 감아도 돼"
"왜여어?"
"그냥. 너무 늦었어"
시윤이도 언제 감았는지 기억이 안 났다. 그래도 오늘은 아니었다. 아내도 나도 지쳤으니까.
오늘도 내가 애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멀쩡하던 소윤이는 오늘도 방에 들어갈 때가 되자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였다. 뭐 그 정도야 충분히 이해한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시윤이는 낮잠을 잤으니까 금방 잘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소윤이는 아니었다. 당연히 일찍 잠들어야 했다. 낮잠도 안 자고 엄청 늦은 시간이었으니까. 이 녀석이 잠들지 않고 버텼다. 버텼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는데 아내와 내가 보기에는 의지를 가지고 잠을 쫓으며 자기 나름의 소극적인 시위를 한 거다. 계속 울고, 이런저런 핑계 대면서 나오려고 하고. 시윤이는 누나처럼 소란(?)을 피우지는 않았지만 똘망똘망 눈을 뜨고 안 자려고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야밤에 뜻하지 않은 격렬한 육아(훈육)의 시간이 이어졌다. 소윤이는 처음 들어간 지 2시간이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정확히 언제 잠들었는지는 모르지만.)
하아.
좀 웃으면서 자면 좋으련만. 나의 정신 상태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는데 소윤이가 울며 잠든 게 속상했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잠들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