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21(토)
냉장고에 지난번에 쓰고 남은 돼지고기가 눈에 걸렸다. 오늘 쓰지 않으면 버려질 것 같은 예감에 그게 재료가 되는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애들은 파마늘당근호박가지돼지고기볶음밥. 아내와 나는 파, 마늘, 돼지고기로 낸 기름에 호박, 버섯, 가지, 당근을 넣고 볶아 짬뽕 스타일로 끓인 라면. 간만에 담당한 아침이니만큼 힘을 좀 줬다.
(사실은 어제 자기 전에 아내랑 같이 강호동이 지리산 대피소에서 라면 먹는 영상을 봤는데 정말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맛있어 보였다. 그래서 첫 끼부터 라면.)
"아빠. 어제 엄마랑 아빠랑 자러 들어왔을 때 엄마가 가위바위보 하자고 했는데 아빠가 일어나겠다고 했잖아여"
"어? 소윤이 다 들었어?"
"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아빠를 깨운 거에여"
"아, 그랬구나. 잘했어"
"아빠아. 엄마늠 언데 일어나여엉?"
"엄마? 글쎄. 좀 더 주무시라고 하자"
"왜여엉?"
"엄마도 피곤하시니까"
"왜여엉?"
"시윤이랑 누나 돌보느라 피곤하지"
"그대여엉?(그래여?)"
아침을 다 차리면 깨우려고 했는데 그보다 빨리 아내 스스로 일어났다.
"여보. 엄청 거창하네?"
"돼지고기 상할까 봐. 그거 쓰려고"
"맛있겠다. 맛있는 냄새난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엄청 맛있게 먹었고 (내가 밥 양을 많이 하지 않았다. 살짝 부족한 듯 줬다. 남기면 버리는 게 아깝기도 하고 아이들의 식사 성공(?)을 돕기 위해 서기도 하고.) 아내와 나도 만족스러웠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나의 보이지 않는 도움(밥 양 줄임)이 있었다는 건 알지도 못하고 완벽하게 식사를 마쳤으니 이제 준비된 간식을 달라고 요구했다. 끊임없이. 아내가 어제 자연드림에서 산 초코 과자를 가장 먼저 찾았다. 그다음은 요거트. 바나나 등등. 보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막 말했다. 막.
"이제 그만해. 충분히 먹었어"
오늘의 큰 일정은 두 개였다. 하나는 내일 있을 성탄 발표회 연습, 또 하나는 내 친구의 결혼식. 발표회 연습은 오후 1시였고, 결혼식은 5시였다. 결혼식은 모두 갈 필요는 없었고 나만 가면 됐다. 장소가 코엑스 근처라 꽤 멀었다. 친구는 중, 고등학교 동창이라 결혼식에 가면 아는 친구가 제법 있을 듯했지만 나와 어울렸던 무리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아무렇지 않게 같이 앉아 밥 먹을 만한 정도의 친구는 없을 법했다는 말이다. 15년 만이니 반갑게 악수는 해도 거기까지일 가능성이 컸다.
"여보. 시윤이는 내가 데려갈까?"
"진짜?"
"어"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내가 둘 다 데려갈까?"
까지 갔었다. 결론은 시윤이는 나와, 소윤이는 아내와. 이거였다.
"여보. 진짜 나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지? 난 괜찮아. 집에 가면 되니까"
"아니야. 내가 심심할까 봐 그래. 멀기도 하고"
"그래? 그런 거면 상관없는데. 혹시나 나 쉬라고 그러는 거면 괜찮다고"
"그런 것도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도 시윤이 데리고 가면 덜 심심할 거 같아"
그리하여 발표회 연습이 끝나면 소윤이는 아내와 데이트, 시윤이는 나와 데이트(?)가 예정되어 있었다.
시윤이는 교회에 가는 길에 차에서 잠들었길래 좀 안고 있으려고 했는데 주차하고 카시트에서 꺼냈더니 깼다. 더 잘 기미는 안 보여서 그대로 소윤이와 함께 연습하라고 들여보냈다.
작년에는 소윤이만 발표회 무대에 섰는데 그때는 소윤이가 엄마, 아빠하고 떨어지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아내와 함께 걱정했었는데, 시윤이는 작년 소윤이보다 한 살 어림에도 불구하고 그런 염려조차 없었다. 벌써 일 년이 지났구나 싶기도 하고 확실히 소윤이랑 시윤이 키우는 게 다르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사실 세 살은 별로 없었다. 퍼포먼스의 완성도를 생각하면 당연히 빠지는 게 맞지만 완성도가 최우선의 가치인 무대는 아니기 때문에 시윤이도 무대에 서는 게 가능했다. 아내와 나는 과연 시윤이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본당에서 리허설하는 걸 구경했는데, 맙소사. 너무 잘 따라했다. 예상을 뒤엎었다. 아내는 본능적으로 터져 나오는 시윤이를 향한 애정 표현을 틀어막느라 애를 썼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저 멀리 무대에 있었지만 시윤이를 향한 과한 애정 표현은 삼가는 게 습관화되어 있다.) 아내와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잘 하네. 역시 둘 다 무대 체질이네"
작년에 소윤이도 그랬다. 엄마, 아빠랑 떨어져서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돌변하더니 율동도 엄청 열심히 했다. 시윤이도 비슷했다.
생각보다 연습이 일찍 끝났다. 계속 기다리자니 너무 많이 남았고 그렇다고 어딘가를 가자니 좀 부족한, 애매한 시간이었다. 그냥 교회에 좀 더 머물렀다. 아내는 날 여의도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행신에서 삼성동까지 대중교통으로 여정은 매우 고약했다. 아내가 여의도까지 가주면 그나마 갈아타지 않고 한 번에 가는 게 가능했다. 아내는 소윤이와 망원동 [미아논나]에 갈 거라고 했다. 소윤이는 잠들어 있어서 따로 인사를 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시윤아. 엄마한테 인사하고"
"엄마아. 안녀엉"
시윤이랑 둘이 그렇게 멀리, 오랜 시간을 같이 있는 건 처음이었다.
"아빠아. 우디 어디 가늠 거에여엉?"
"아빠 친구. 삼촌 결혼식에"
"누구 땀똔이여엉?"
"시윤이가 모르는 삼촌이야"
"아빠아. 땀똔 겨돈식 빠이 가고 디퍼여엉"
"시윤아. 풍관 삼촌 아니야. 아빠 친구야"
"뭐다구여엉?"
"아니야"
시윤이가 내가 말하는 '삼촌'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런 것 같기는 했는데 자꾸 빨리 삼촌 만나고 싶다고 얘기하는 게 혹시나 자기 진짜(?) 삼촌을 생각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여의도까지 데려다준 덕분에 아주 편하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물론 내려서 좀 걷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아들과의 데이트로 여겨도 무방할 정도였다. 특별히 뭐 한 건 없지만 함께 지하철을 타고, 앉아서 시답잖은 수다를 나눈 게 처음이었으니까.
시작 시간보다 좀 일찍 도착했다. 가뜩이나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텐데 일찍 도착했더니 한산한 느낌까지 들었다. 결혼하는 친구에게 인사를 건네고 바로 식당으로 갔다. 식당도 한산했다. 시윤이 손을 꼭 잡았다.
'시윤아. 고마워. 같이 와 줘서'
식사는 뷔페식이 아니었다. 자리에 앉으면 갈비탕이 나오고 밑반찬과 곁들임 요리가 준비되는 식사였다. 그러다 보니 직원들이 철저하게 차례대로 자리를 배치했다. 내가 식당에 갔을 때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안내해 주는 대로 앉았다. 모르는 무리와 함께.
'시윤아. 정말 고마워. 니가 있어서'
시윤이가 먹을 만한 음식이 많지는 않았다. 일단 갈비탕의 고기를 좀 뜯어줬다. 새우 요리가 두 개 있었는데 거기 있는 새우도 좀 줬다. 회전 원탁 테이블에 놓인 요리를 양껏 덜어먹는 식이라 내 자식 먹이겠다고 무식하게 많이 떠오기에는 좀 곤란했다.
"아빠아. 때우 또 주데여엉"
"아, 새우는 일단 그것만 먹어"
"왜여엉?"
"아. 다른 사람도 먹어야 되거든"
시윤이는 배가 고팠는지 없는 반찬에도 숟가락질이 부지런했다. 난 잘 먹었다. 내가 먹을 건 아주 많았다. 뷔페가 아니라서 오히려 번잡스럽지도 않고. 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여서 일곱 명의 남자분들은 친구의 회사 선배였다. 그들은 엄청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나갔다.
'시윤아. 새우 너 다 먹어라'
시윤이가 먹을 만한 게 정말 새우와 고기밖에 없었다. 갈비탕의 고기는 진작에 바닥을 드러냈고 남은 새우를 시윤이에게 줬다. 엄청 잘 먹었다. 밥을 많이 먹기는 했지만 반찬은 먹은 게 없어서 배가 덜 찼을까 봐 떡도 줬다. 그것도 아주 잘 먹었다.
"아빠아. 빨리 누나한테 가고 지퍼여엉"
"그래? 왜?"
"그냥여"
시윤이는 가장 먼저 누나를 찾았다. 아마 시윤이도 어색했을 거다. 셋까지는 자주 있는 일이어도 둘, 그것도 아빠하고만 있는 건 매우 이례적이니까. 그래도 시윤이는 엄청 즐겁게, 열심히, 맛있게 식사를 했다. 내가 하나도 고단함을 느끼지 않았으니까 말 다 한 거다.
시윤이가 다 먹어갈 때쯤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한테 자기도 왔는데 어디냐고 연락이 왔다. 연회장에서 나올 때쯤에는 사진 촬영이 한창이었다. 식장에 가서 친구 몇 명하고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 나니 오늘의 결혼식 끝.
"시윤아. 이제 가자"
"아빠. 우디 이데 어디 가여엉?"
"엄마랑 누나 만나러 가야지"
"빨리 엄마 보고 지퍼여엉"
"그래. 얼른 가자"
아내는 망원동에 있었다. 시윤이랑 내가 합정까지 가기로 했다. 낮잠을 아주 어설프게 잔 시윤이는 지하철에서 칭얼대다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앉아 있을 때는 상관없었다. 당산에서 내려서 합정까지 (한 정거장) 가고, 거기서 아내가 있는 곳까지 가는 여정이 너무너무 힘들었다. 잠들어서 축 늘어진 시윤이를 안고 움직이니 땀이 줄줄 흘렀다. 숨소리가 절로 거칠어졌다.
"하악. 하악. 여보호. 너무후 힘들허어. 하악.하악"
오늘 하루 동안 쓴 체력 중 90%를 이때 사용했다. 간만에 육체의 한계를 느꼈다. 잠깐이지만 둘 다 데리고 가겠다고 생각했던 건 오만이었고, 생각에만 그친 건 하늘이 도운 거였다. 큰일 날 소리였다.
시윤이를 카시트에 앉히고 출발하려는데 시윤이가 눈을 떴다.
"여보. 쟤 깼는데?"
"그래?"
"자는 척한 거 아니야? 안겨서 오려고"
"설마"
아내가 시윤이한테 자는 척 한 거냐고 물었더니 실실 웃으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물론 진실은 알 수 없다. 진짜 잤을 가능성이 크긴 하지만 자는 척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리였다. 아무튼 고단했다.
소윤이는 엄마와 데이트를 하긴 했지만 한 곳(망원의 미아논나)에서만 머무른 게 내내 아쉬웠는지 자꾸 어디를 가자고 했다. 어디를 가고 싶냐고 물으면 콕 집어서 얘기는 못하고 그냥 아무 데나 어디든 가고 싶다고 했다. 엄마랑 데이트를 하기로 했는데 너무 못 돌아다녀서 그대로 집에 들어가기에는 아쉽다나 뭐라나.
스타필드에 가기로 했다. 정확히는 스타필드에 안에 있는 트레이더스에. 카트에 태워서 이곳저곳 구경했다. 시간에 쫓기는 것도 아니니 아주 느긋하게. 오랫동안.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갈 때쯤 되니 아내와 내가 지쳤다.
"여보. 너무 피곤해"
"그치? 이제 가자"
아내와 나는 방전 직전이었다. 특히 아내는 애들보다 먼저 잠들 게 분명했다. 서둘러서 애들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면서 시윤이한테 물었다.
"시윤아. 아빠랑 데이트해서 좋았어?"
"ㄴ..아니여어?"
"안 좋았어?"
"좋아떠여엉"
"뭐가 좋았어?"
"그양. 밥 먹구, 떡 먹구 그연게(그런게)"
"그랬구나. 아빠도 좋았어. 시윤이 때문에 안 심심하고"
진짜야. 너 없었으면 너무 심심할 뻔했다. 돌아올 때 대가를 톡톡히 치르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