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함께 할 때

19.12.23(월)

by 어깨아빠

나만의 느낌일까. 아이들과 아내가 먼저 일어나고 나 혼자 방에 남아 자고 있을 때 들려오는 소리는, 홀로 남은 방 안의 평화로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소리일 때가 많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다투는 소리, 그걸 다스리는 아내의 목소리, 뭔가 말을 안 듣는 소윤이를 다스리는 아내의 목소리, 뭔가 말을 안 듣는 시윤이를 다스리는 아내의 목소리, 소윤이와 시윤이의 울음소리 등등. 물리적으로 내가 애 둘과 함께 있는 시간이 현저히 적긴 하지만 내가 애 둘과 있을 때랑은 다르다. 특히 아침 시간에. 이건 아내도 인정하는 기이한 현상이다. (혹시나 '내가 애들을 더 잘 본다' 이따위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애들이 내가 등장하면 설설 기는 것도 아니다. 날 무슨 우주의 심판자쯤으로 여기며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고, 아내를 자기 친구쯤으로 여기며 가벼이 여기는 것도 아니고.


"여보. 어이없다. 쟤네 좀 전까지 장난 아니었어" - 퇴근하고 왔을 때

"여보. 하아. 억울하다. 하루 종일 난리 치더니" - 하루 종일 떨어져 있다 만났을 때


원인은 정확히 모르지만 현상은 분명했다. 아내는 "확실히 여보도 있을 때 말을 더 잘 들어"라고 평했다. 전국의 수많은 육아 엄마가 분개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하루 종일 신경전을 하고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진 상태에서 다시 한번 아이와 붙게(?) 되면 여지없이 매서운 반응이 나올 때가 있다. 이때 퇴근(혹은 등장)한 남편이 그걸 보고 요따위로 말한다.


"아니 왜 애한테 그래. 애한테. 왜 그렇게 애를 못 잡아서 안달이야"


나도 대한민국의 여느 남정네와 다르지 않아서 '이 정도면 괜찮지 뭐'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꿈틀거림에도 불구하고 절대 밟지 않는, 금기하는 영역과 말, 행동 등이 있다. 그중 하나가 저따위의 말이다. 남편의 육아는 몸으로 하는 게 아니고 말로 하는 거라고 그랬다. (내가) 난 오히려 아내의 든든한 행동대장으로 등장할 때가 더 많다. [관상]에서 수양대군 역을 맡은 이정재가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처럼 늠름하고 위엄있게.


"어허. 누가 엄마 말을 안 듣고 있어. 어허"


물론 이미 심한 감정의 타격을 입어서 눈물, 콧물을 쏙 빼고 있었다면 위로자로 등장한다.


"이리 와. 아빠가 안아줄게"


아무튼 오늘 아침에도 주의-경고-선포(분노)의 단계를 밟아가는 아내의 목소리에 서둘러 방문을 열고 나갔다. 말없이 소파에 앉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분위기가 정리됐다.


무슨 놈의 월요일은 이리도 빨리 돌아오는지, 또 치과에 가야 했다. 원래 지난주에 조금 더 진도를 나가는 것도 가능했는데 소윤이가 몸이 좀 안 좋아서 평소보다 칭얼대는 바람에 중단했었다. 치과 가는 게 너무 귀찮아서 괜히 소윤이한테 잔소리를 한 번 했다. (이런 건 진짜 잔소리다.)


"소윤아. 오늘은 좀 참고 많이 받아. 그래야 다음에 덜 오지"


그게 뭐 소윤이, 다섯 살짜리 마음대로 되나. 그래도 그냥 푸념하는 거다. 소윤이는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은 하지 않았다. 억울할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아내는 저녁에 아는 동생과 약속이 있어서 나가야 했다. 평일 밤에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치과에 가려고 준비하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여보는 아예 이따가 치과 갔다가 거기서 바로 가"

"진짜?"

"어. 여보만 괜찮으면"

"나야 좋지"


소윤이 치과 치료는 오래 걸렸다. 은으로 씌우기 전에 본을 뜨는 과정이었는데, 한참 기다렸다. 아내가 소윤이와 함께 들어가고 나랑 시윤이는 로비에서 기다렸는데 졸음 참느라 혼났다.


"아빠아아. 다디 마여엉"

"아빠아아아아. 왜 다여엉"


모든 치료를 마치고 아내하고는 삼송역에서 헤어졌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덤덤하게 아내를 떠나 보냈다. 오히려 아내가 발을 떼지 못했다.


"여보. 나 가서 뭐 하지? 혼자? 심심하게?"

"심심해? 그럼 우리랑 놀아"

"여보. 안녕"


소윤이와 시윤이는 그냥 집에 들어가기가 아쉬운지 자꾸 어디를 가자고 했다. 시윤이도 덩달아 그랬고. 나도 그냥 집에 가기에는 뭔가 갑갑한(?) 시간이라 고민을 좀 했다. 마땅히 갈 데가 없는 게 문제였다. 어디 밖에 머물 곳이라도 있으면 얼마든지 그러고 싶었지만 겨울의 한복판을 지나는 중이었다.


"소윤아. 그런데 갈 데가 없어"

"아빠. 그럼 그냥 카페 가자여"

"카페? 카페 가서 뭐 하게?"

"그냥. 앉아서 얘기도 하고 커피도 마시는 거지여"

"아니야. 카페는 답답할 거 같아"

"맞아여.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여"

"그럼 어디 가? 소윤이 가고 싶은데 있어?"

"아빠. 저는 아무 데나 상관없으니까 아빠가 정해도 돼여"

"그래? 그럼 그냥 집에 가자"

"아빠. 아무 데나 상관없지만 집은 안 돼여"

"생각이 안 나는데"

"아빠. 그럼 도서관 갈까여?"

"도서관? 그런데 시윤이랑 도서관 가면 아빠가 소윤이랑 거의 못 놀아줘. 시윤이 신경 쓰느라"

"그래도 괜찮아여"

"아니야. 안 괜찮을 거야. 소윤이도 아빠도"

"그럼 어디 갈까여?"

"그냥 스타필드나 가자"

"좋아여"

"진짜 좋아? 집에만 안 가면 돼?"

"네. 좋아여"


나 스타필드 안 좋아하는데 안 좋아한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자주 가는 듯하다. 저번에 왔을 때도 있었던 대형 레고 전시장이 여전히 있었다. 애들이 직접 블럭을 만지며 놀 공간도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곧장 거기로 달려갔다. 시윤이는 아무래도 능력의 한계가 있다 보니 누나보다 먼저 흥미를 잃었다. 그래도 누나 옆에 붙어서 누나가 하는 걸 열심히 따라 했다. 꽤 한참 놀았다. 소윤이는 만들던 레고에 힘을 너무 세게 줘서 부서지는 일을 겪고 크게 울기도 했다. 소윤이에게 레고인이라면 거쳐야 하는 숙련의 과정이니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다음에 할 게 없었다.


"소윤아. 우리 이제 뭐 하지?"

"몰라여. 아빠가 정해야져"


둘 다 배가 고프다고 했다. 오늘도 점심을 건너 뛴 셈이었다. 어묵 가게에 가서 어묵을 한 개씩 사 줬다. 소윤이는 치과 치료를 했기 때문에 웬만하면 2시간 정도 지나고 뭘 먹어야 했는데 배가 너무 고프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


"소윤아. 대신 왼쪽은 치료했으니까 오른쪽으로만 씹어야 돼. 꼭. 알았지?"

"네. 그러고 있어여"


어묵으로 대충 허기를 채우며 다음 일정은 어떻게 진행할까 고민하다가 묘안을 떠올렸다. 소윤이가 며칠 전부터 이케아에서 파는 [과자집 만들기]를 사고 싶다고 했다. 아내는 사 주려고 했는데 품절되고 없었다. 노브랜드에서도 판다길래 전화해 봤더니 거기도 없고. 소윤이에게 과자집 만들기는 직접 과자를 사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었다.


"소윤아. 우리 오늘 과자집 만들기 할까?"

"어떻게여? 다 팔렸잖아여"

"아니. 직접 과자 사서"

"진짜여? 좋져"


"우와아. 찐난다아"


웨하스, 에이스, 빼빼로, 오레오. 단출한 구성이었지만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아빠. 이걸로 진짜 만들 수 있어여?"

"글쎄. 아빠도 해 본 적은 없는데 아마 되지 않을까?"


저녁은 집에 돌아와 주먹밥으로 해결했다. 영양의 측면을 고려했을 때는 마땅한 재료가 없었다. 참치와 김, 아몬드를 넣고 밥과 버무렸다. 특식의 느낌을 주기 위해 바닥에 상을 펴고 앉아서 하나씩 입에 넣어줬다. 기특하고 고맙게도 소윤이와 시윤이는 이런 소소한 일탈(?)에도 큰 행복과 즐거움을 느낀다.


밥을 다 먹고 나서는 대망의 과자집 만들기. 소윤이와 시윤이는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난 내심 걱정했다. 이게 내 생각대로 될지 안 될지 모르니까. 머릿속으로 실패했을 때의 변명 혹은 태연하게 넘어갈 방안을 구상하며 과자집 만들기를 진행했다.


일단 웨하스를 넓게 쌓아서 직사각형을 만들었다. 각 과자를 붙이는 접착제로는 딸기잼을 사용했다. 제법 접착성이 좋았다. 굳으면 더 좋을 것 같았고. 쌓은 웨하스 위에 에이스와 오레오도 겹쳐서 쌓았다. 빼빼로도 빈 공간에 눕혀서 쌓았다. 디자인의 측면에서 큰 의미는 없었다. 그저 건축 재료의 다양성을 충족하기 위함이었다. 지붕은 에이스로 만들었다. 내 생각대로 견고하게 고정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잼을 발라 임시로 고정을 시키긴 했다. 물론 각 공정에 소윤이와 시윤이를 열심히 참여시켰다. 그들이 원하는 건 완성된 과자집이 아니고 본인이 완성시킨 과자집이니까.


"소윤아, 시윤아. 어때? 괜찮지?"

"네. 아빠. 아빠 아이디어 진짜 좋다"

"아빠아. 딘따 딥 가따여엉"


소윤이는 스페인에 방문해 가우디의 건축물을 보고 가우디를 극찬하는 관광객처럼 나를 극찬했다. 계속. 연신.


"와아. 아빠.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여?"

"아빠 진짜 아이디어 좋다"

"아빠. 딸기잼은 진짜 잘 붙는 거 같아여. 아이디어 진짜 좋다"

"아빠가 이런 걸 잘 만드네"


소윤이 옆에 있으면 자존감 무너질 일이 없다.


과자집의 최고의 딜레마는 이거다.


'먹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아빠. 우리 엄마한테 보여주고 내일 먹자여"

"그럴까? 바로 먹기에는 너무 아쉽지?"

"맞아여"


시윤이도 동의했다. 완성된 과자집은 냉장고에 넣었다. 정확한 근거는 없었지만 실온에 두는 것보다는 형태가 오래 유지될 것 같았다.


"자. 이제 자자"


(소윤이가 안 잔 날에는) 평소에도 이르게 재우는 편이지만 오늘은 더 빨랐다. 잘 준비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으려고 하는데 마침 아내에게 영상 통화가 왔다. 애를 둘이나 낳았고 셋도 낳을 예정인 출산과 육아의 고인 물이면서 간만에 얻은 외출 시간에 애들 보고 싶어서 영상 통화를 하는 걸 보면 엄마는 어쩔 수 없다.


"소윤아. 시윤아"

"엄마아아아아아 (둘이 뗴창)"


소윤이와 시윤이는 엄마가 없는 동안 뭘 했는지 미주알고주알 전했다. 그러다 시윤이가 과자집 얘기를 꺼내려고 하자 소윤이가 급히 시윤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사실 시윤이가 이미 다 말하고 난 뒤였다.


"엄마아. 우디 과다딥 만들어떠여엉"


이러고 나서 소윤이가 자기 손으로 급히 시윤이 입을 막았으니까. 순간 소윤이의 얼굴에 당황, 슬픔 등의 감정이 스치는 게 보였다. 급히 내가 말을 보탰다. 아내는 눈치 못 챘을 리가 없지만 소윤이를 위한 연기였다.


"엄마. 우리 벌써 저녁도 먹고 잘 준비도 다 했어요"


아내도 모르는 척 내 말을 받아줬다. 소윤이는 나를 향해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윤아. 이런 게 바로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거야. 잘 알겠지?


아내와 통화를 마치고 둘을 데리고 방에 들어갔다. 둘 다 낮잠을 자지 않은 매우 건전한(?) 상태였기 때문에 금방 탈출에 성공했다. 나오자마자 냉장고에 넣어 놓은 과자집이 붕괴되지 않고 잘 있나 확인했다. 그 모습 그대로인 걸 확인하고는 살짝 흔들어 봤다. 잼이 굳으면서 더 견고하게 붙은 느낌이었다. 다행이었다. 쉽게 무너질 것 같지는 않았다.


아내는 집에 돌아와서 이상 증세를 호소했다.


"여보. 오늘은 왠지 발걸음이 안 떨어지더라. 괜히 혼자 가기 싫고"

"그럼 다음부터는 둘 다 데려가. 언제든 내어줄게"

"아니. 오늘은 진짜 이상했다니까"


이런 게 참 묘한 거다. 아이들이랑 같이 있으면 그렇게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막상 혼자 떨어져 나오면 계속 생각나고 보고 싶고 어색하고. 심지어는 아내처럼 자유의 국경선을 넘기가 꺼림칙한 상황에 이르기도 하고.


그래도 나가라. 부지런히. 더 부지런히. 더 격렬하게. 내년 4월이 되면 다시 창살 없는 감옥살이를 할지도 모르니. 폭풍전야의 고요함을 충분히 만끽하시라. 여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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