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성탄 전야

19.12.24(화)

by 어깨아빠

아침(겸 점심)으로 온 가족이 파스타를 먹었다. 자기는 파스타 안 좋아해서 안 먹을 거라던 시윤이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많이 먹었다.


"여보. 양을 얼마나 해야 되지?"

"음. 여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넣어도 괜찮을 거야"


덕분에 네 식구 모두 파스타로 배부른 아침(겸 점심)을 보냈다.


성탄절 전날이었지만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계속 집에서 머물다가 애써 나갈 일을 만들었다. 내가 쓸 색연필을 굳이 일산까지 가서 사고 아내는 간 김에 백화점에 들러서 선물 받은 화장품을 교환했다.


아내는 나가기 전에 저녁을 뭘 먹을지 고민하다가 이렇게 얘기했다.


"아. 아구찜 먹고 싶다"

"먹자. 그럼"

"둘이 먹기에는 좀 그렇잖아. 애들 먹을 것도 없고. 너무 비싸고"

"그런가"


대화를 듣고 있던 소윤이가 말을 더했다.


"엄마. 그럼 제가 사 줄게여"

"소윤이가?"

"네. 저번에 할머니들이 주신 걸로 제가 사 줄게여"

"진짜야? 소윤이가 사 줄 수 있어?"

"네. 제가 사 줄게여. 먹어여"


소(小)자를 먹자니 양이 아쉬울 거 같은데 중(中)자를 먹자니 너무 많고 비쌀 거 같고. 아내와 그런 얘기를 주고받았는데 또 소윤이가 말을 보탰다.


"엄마. 그럼 중자 먹어여. 제가 사 줄게여"

"그래? 비싸"

"엄마. 그럼 그때 그거 두 장이면 되여? 두 장으로도 안 되여?"

"아니. 두 장이면 충분하지"

"그럼 제가 사면 되겠네여"


옆에서 듣고 있던 시윤이는 자기도 사 주겠다면서 덩달아 성화였다.


성탄절 전날이라 평소보다 차가 많은 건지 생각보다 차가 막혔다. 색연필 사고 백화점 들러서 식당에 가는 길이 꽤 오래 걸렸다. 오늘도 어쩌다 보니 점심을 건너 뛴 (중간에 간단히 빵을 먹기는 했지만) 소윤이와 시윤이는 진작부터 배가 고프다고 난리였다. 이미 집에서 나갈 때부터 배가 고프다고 했는데 백화점에서 식당에 갈 때는 절정에 달했다.


"아빠. 너무너무 배가 고파여. 못 참겠어여"

"아빠아. 배가 고빠여엉"


조금 미안했다. 점심을 굶긴 것도. 곧 도착할 식당에서 먹을 음식이 아구찜이라는 것도. (애들은 주먹밥을 먹어야 했다.) 거의 다 왔다는 인류 역사를 함께한 거짓말로 아이들을 달랬다.


긴 시간을 달려서 드디어 식당에 도착했지만 음식이 나오기까지 또 한 세월이었다. 애들도 애들이지만 아내와 나도 극도의 허기에 시달렸다. 일단 소윤이와 시윤이의 주먹밥부터 좀 달라고 해서 애들 배부터 채웠다. 게 눈 감추는 것보다 몇 배는 빠르게 주먹밥이 사라졌다. 본 음식은 자리에 앉고 30분이 지나서야 나왔다. 애들 몫의 밥을 한 공기 더 시켜서 반씩 나눠주고 그나마 애들이 먹을만한 밑반찬과 함께 먹였다. (구운 김과 맵지 않은 생선살, 동치미 정도였다.) 아내와 나도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에 따로 애들을 챙길 여력이 없었, 아니 발휘하지 않았다.


"자. 소윤아. 시윤아. 여기 김 잘라주고 반찬 줬으니까 이제 알아서 먹어"


그러고 나서는 정말 잘 먹는지, 안 먹는지 신경도 안 쓰고 우리의 아구찜을 해체하는데 집중했다. 배를 좀 채우고 정신을 차려보니 소윤이와 시윤이의 밥그릇도 깨끗했다. 특히 시윤이는 밥으로만 거의 두 공기 가까이를 먹었다.


"아, 잘 먹었다. 소윤이, 시윤이가 잘 먹어줘서 엄마, 아빠도 엄청 배부르게 먹었네?"

"엄마. 다 먹었어여?"

"응. 이제 가자"

"엄마. 엄마. 제가 계산할게여. 저 돈 그거 주세여"

"알았어. 자"


소윤이는 아내에게 5만 원짜리 한 장을 받아 계산대로 가서 직접 계산을 했다.


"여기여. 잘 먹었습니다"


그걸 본 시윤이가 자꾸 자기도 계산을 하겠다고 하길래 천 원짜리 한 장을 건네줬다.


"시윤아. 그럼 시윤이는 이따 이걸로 엄마, 아빠 커피 사 줘? 알았지?"

"내가 꺼삐 따줄게여엉"


All the money leads to Mom.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고 모든 돈은 엄마에게로 통하지만, 아내는 어쨌든 딸이 사주는 밥을 먹는 기분이 꽤 유쾌하다면서 즐거워했다. 소윤이는 엄청 뿌듯해했다.


"엄마, 아빠. 맛있었어여?"

"어, 엄청 맛있었어"

"제가 사주니까 더 맛있져?"

"응. 당연하지"


밥을 먹고 있을 때 형님(아내의 오빠)가 아내에게 연락을 했다. 애들 재우고 밤에 만나자고. 장소는 우리 집. 일단 애들 취침까지의 진행 상황을 봐 가며 정확한 시간을 정하기로 했다. 얼른 가서 재우고 싶었지만 이미 카페에도 가기로 약속을 했다. 또 너무 기나긴 배고픔을 준 것도, 긴 기다림 끝에 먹인 게 주먹밥이라는 게 미안하기도 해서 카페에 가서 빵을 좀 먹이고 싶었다. 대신 미리 얘기했다.


"소윤아, 시윤아. 길게는 못 있고 잠깐만 앉아 있다가 오자? 알았지?"

"네"


시윤이는 계산대 앞에 선 아내에게 가더니 집요하게 천 원짜리 한 장을 건네며 얘기했다.


"엄마아. 이거루 사여어엉"

"그래. 알았어. 시윤이가 사는거야"

"아니. 이거루우우"


안타깝게도 '현금없는 매장' 정책을 시행하는 스타벅스였다. 얼렁뚱땅 시윤이의 천 원을 건네받고 얼버무렸다.


"우와. 시윤아. 고마워. 시윤이가 사주는 거네"


평소에 소윤이와 시윤이가 자는 시간보다는 늦었지만 누군가를 만나 회포를 풀기에 많이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외삼촌, 외숙모의 방문을 소윤이와 시윤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입조심을 하면서 둘을 재웠다.


형님네 부부와의 대화는 아주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다행히도 소윤이, 시윤이 모두 한 번도 깨지 않았다. 그러다 형님네가 가자마자 소윤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삼촌과 숙모가 있을 때 나와도 뭐 큰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괜히 배신감이 들지도 모르니까.


"아빠. 지금 새벽이에여?"

"응. 새벽이야"

"조금 더 자야 되여?"

"아니. 많이 자야지"

"엄마, 아빠는 왜 안 잤어여? 지금까지?"

"아. 엄마랑 아빠는 뭐 얘기 좀 하느라고"

"이제 잘 거에여?"

"어, 자야지"


소윤아. 너도 나중에 크면 끼워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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