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12(금)
아내의 친가 식구 및 어른들 모임이 서천(막내 고모부 댁)에서 있었다. 반차를 냈다. 대략 점심 먹고 1-2시쯤 출발을 예상했다. 오늘도 아내와 애들은 주차장에 내려와 출근하는 나를 배웅했다. 그러고 나서 바로 집에 안 들어가고 소윤이 어린이집 다닐 때 차 타던 곳(바로 맞은편 아파트 입구)에 등원 차량 동기(?)들을 만나러 갔다. 두 명은 감기 때문에 못 만나고 두 명만 만났는데 아내 말로는 소윤이가 영 심드렁한 반응이었다고 했다.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라서 그런 건가 아니면 이미 어색해져서 그런 건가. 특히 평소에 등원 지도해주시던 선생님(소윤이가 좋아함)과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하필 그 선생님이 안 나오셔서 많이 실망한 눈치였다고 했다. 퇴사자가 퇴사한 직장 근처에 가면 때로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것과 비슷한가.
아무튼 나는 9시에 출근해서 1시도 되지 않아 집으로 돌아왔으니 애들 입장에서는 엄청 금방 집에 돌아왔다. 서천으로의 출타 준비가 전혀 진행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살짝 당황했지만 두 아이와 함께 있으면서 짐을 싼다는 게 뭐 쉬운 일도 아닌 데다가 오늘 밤에는 서천에서 내일 밤에는 신림동에서, 그러니까 2박 3일 치 짐을 싸야 하니 양도 만만치 않을 터였다.
아내가 소윤이를 데리고 병원에를 좀 다녀오라고 했다. 시윤이는 잠든 지 얼마 안 된 상태라 그동안 짐을 좀 싸겠다고 했다. 소윤이랑 데이트하는 기분으로 출발했다. 소윤이가 원하는 간식도 사주겠다고 공언해서 소윤이 기분도 띄워놨다. 병원에 도착했는데 점심시간이었다. 한 30분을 기다려야 오후 진료가 시작될 시간이라 잠깐 고민하다가 일단 슈퍼로 갔다. 소윤이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했다.
"소윤아.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하면 사주기는 할 건데 지금 소윤이가 기침을 좀 해서 병원에 온 거잖아. 그러니까 아빠는 소윤이가 아이스크림 말고 다른 걸 먹으면 더 좋기는 할 것 같아. 그래도 아이스크림 먹고 싶으면 사주긴 할 거야"
내 말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한 소윤이는 갈등했다. 거기에 아빠가 이렇게 청유형 화법을 구사하니 오히려 마음도 더 약해진 듯했다. 머리로는 아이스크림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마음은 자꾸 아이스크림이었다.
"아빠! 나 그럼 저거 먹을게!"
소윤이가 반갑게 가리킨 곳에는 플라스틱 컵에 담긴 솜사탕이 있었다. 과연 솜사탕이 아이스크림보다 아이들의 몸에 덜 해로운 게 맞는가 하는 것에는 확신이 없지만. 일단 솜사탕을 사줬다. 바람이 차서 밖에 어디 앉아서 먹기는 힘들었다. 맞은편 롯데리아로 가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하나 시켰다.
"아빠는 왜 아이스크림 먹어여?"
"어. 여기서 솜사탕 먹으려면 뭐라도 하나 사야 되는데. 이게 제일 싸"
소윤이는 정말 맛있고 행복하게 솜사탕을 먹었다. 내가 치킨을 먹을 때 저런 모습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에 하나도 좋을 게 없는 솜사탕이지만 소윤이가 너무 맛있고 즐겁게 먹으니 그냥 뭐 한 트럭이라도 사주고 싶었다.
"소윤아 그렇게 맛있어?"
"네. 이건 입에 넣자마자 없어진다여"
다시 병원에 갔다. 소윤이는 늘 그렇듯 콧물 과다로 인한 기침이었다. 아내와 나는 혹시 천식 때문에 기침하는 것일까를 제일 걱정하고 있다. 다행히 최근에는 그런 진단을 받지 않고 있다. 아내와 통화했을 때
"여보. 몇 시쯤 출발할 거야?"
"글쎄. 여보가 몇 시쯤 오지? 한 2시 30분?"
"그 정도 될 것 같은데"
"그럼 일단 그때를 목표로 해야겠다"
집에 돌아갔는데 별로 진척이 없었다. 살짝 짜증이 났다. 뭐랄까. 나의 고질병이라면 고질병이고 습성이라면 습성인데. 오늘 같은 경우는 딱히 약속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아내랑 정확히 몇 시에 나가기로 딱 정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뭐 상황이 되는대로 출발해도 문제가 없다는 건 보통 아내의 생각이고
나도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본능으로는 따라지지 않는 그런.
아침 9시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아무리 두 아이들이 방해한다고 해도 또 내가 한 녀석을 맡아 외출까지 했는데 진행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요일이라 조금만 늦어도 교통 체증에 걸려들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또 싫은 소리 하면 싸움밖에 안 된다는 걸 아니까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다. 결국 네 시가 거의 다 되어서 출발을 했다. 도대체 내가 반차를 쓴 이유는 무엇인가하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별 생각이 다 들고 짜증이 솟구치려 했지만 잘 막아냈다.
'여행이다 여행이다 여행이다'
출발하자마자 시작되는 교통 정체에 큰 위기가 찾아왔지만 잘 참았다. 소윤이는 출발하자마자 잠들어서 거의 두 시간을 푹 잤다. 시윤이도 도착하기 한 시간 전쯤 잠들었다. 아무튼 둘 다 늦은 시간에 푹 잤다. 어차피 오늘은 일찍 재울 생각이 없으니 상관없었다. 장인어른 장모님에 이어 우리가 두 번째였다. 이어서 나머지 식구들이 도착했다. 우리를 포함해 먼저 도착한 식구부터 저녁 식사를 했다. 풍성했다. 김치찜에 계란 장조림에 잡채에 갖가지 김치에. 뭐 아무튼 전라도 식구들 모임다운 풍성함.
조금 늦게 오신 할머니(가영이 할머니), 작은 아버지, 큰 고모부 식구가 저녁을 드시기 위해 상이 차려졌다. 이미 저녁을 먹은 식구들도 옆에 또 상을 펴서 홍어를 먹었다. 물론 그 사이 쉴 틈 없는 각종 간식 공세는 끊이지 않았다. 앉아 있으면 끊임없이 먹어야만 한다. 먹지 않으려면 자는 수밖에 없다.
"오메오메. 좀 먹어야"
"아따 이것 좀 들어야"
"아따 이것도 맛만 봐야"
"왜 안 먹어야. 좀 먹어야"
맛만 봐야 하는 게 수십 가지고 먹는 게 눈에 띄지 않으면 안 먹은 거다. 지금도 배 터지게 먹고 있는데 다음 먹어야 할 것이 끊임없이 예고된다. 배는 꺼질 틈이 없다. 소윤이, 시윤이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끊임없이 계속 손에 쥐고 있었고 항상 먹고 있었다. 먹을 것도 원없이 먹고 귀여움도 원없이 받았다. 현재로서는 소윤이 시윤이 말고는 어린애들이 없어서(소윤이 다음 어린애는 막내 고모의 중학교 2학년 막내아들이고, 소윤이 시윤이가 할머니의 유이한 증손주다) 항상 귀여움을 한 몸에 받는다. 시윤이의 성장으로 많은 눈길을 빼앗긴 소윤이는 눈에 띄게 시윤이 행동을 자주 따라 한다. 아무도 못알아 차리면 내가 얼른 반응해준다.
중간에 어쩌다 보니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모이게 된 시간이 있었다. 남자의 구성은 이랬다.
장인어른
작은 아버지
큰 고모부
둘째 고모부
셋째 고모부
그리고 나
율도(장인어른의 고향이자 아내 친가 식구들의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곳) 시절 얘기, 군대 얘기, 각종 과거 및 추억 얘기, 농사 얘기가 주제였다. 농사 얘기를 한참 하셨는데 그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전문 용어와 내용이 가득했다. 게다가 둘째 고모부는 완벽한 네이티브 전라도어를 구사하셔서 정말 집중하고 들어야 맥락으로 이해가 가능했다. 가끔 이야기를 보태기는 했어도 주로 리액션봇 역할일 수밖에 없었다.
"아아. 그래요?"
"아아. 네에"
"아아. 진짜요?"
그래도 내 나름대로 관찰자 시점을 적용하니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언제나 가족 모임, 특히 이렇게 형제들과의 모임을 할 때 가장 excited한 모습을 보이시는 장인어른.
충청도 사투리를 쓰지만 섞여 있으니 전라도 말처럼 들리는 말투로 끊임없이 개그를 시도하시는 큰 고모부.
외국어 듣기 평가 같은 느낌을 주는 전라도 말투와 억양, 단어를 구사하고 아내한테나 할머니한테나 츤데레미가 가득하신 둘째 고모부.
왠지 운동을 엄청 잘하실 것 같고 대인관계도 좋으실 것 같고 고모한테도 잘하실 것 같은 셋째 고모부.
장인어른과 안 닮은 듯 닮으신 작은 아버지.
소윤이랑 시윤이는 남자들이 모여있는 거실과 여자들이 모여있는 방 사이를 막 뛰어다니고 왔다 갔다 하면서 놀았다. 뭐 특별히 노는 건 아닌데 여기를 가도 예뻐하고 저기를 가도 예뻐하니 그냥 그 자체가 신이 났겠지. 11시가 넘어가니 둘 다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우리의 방으로 배정된 곳으로 데리고 갔다. 아내랑 나도 애들과 함께 누웠다. 피곤하기도 했던 데다가 다시 일어날 의지가 없으니 누가 먼저인지 모를 정도로 다 금방 잠들었다.
드디어 잔다. 배가 꺼질 틈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