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생신은 거들뿐

18.10.14(주일)

by 어깨아빠

소윤이는 진작에 일어나서 거실로 나갔다. 화장실에 다녀왔더니 시윤이도 깨 있었다. 내보내지 않고 방에서 좀 데리고 있었다. 강아지 같은 느낌이랄까. 내 품을 파고들기도 하고 올라타서 엎드리기도 하고 도망가기도 하고. 소윤이랑 다르게 이런 매력을 지녔다.


기척을 느낀 할머니(내 엄마)가 방 문을 열고 시윤이를 데려갔다. 아내는 여전히 자고 있었고 난 옆에 누워서 휴대폰 게임을 한참 했다. 할머니 생신 축하하러 온 건데 우리가 가장 큰 혜택을 누렸다. 아니지. 할머니에게 가장 큰 선물은 손주들이니까. 우리는 효도한 거야.


오늘은 교회도 신림동 교회에 가기로 했다. 느즈막히 일어났지만 아이들이 온전히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맡겨지니 준비할 시간이 충분했다. 아내가 그렇게 늦게 일어나고도 머리를 감았으니 말 다한 거다. 간만의 시댁 교회 방문이라 아내는 가장 최근에 산 옷을 입고 화장도 공들여했다. 노력을 기울인 준비가 무색하게 아내는 예배 시간 내내 자모실에서 나오지 못했다. 이제 시윤이는 잠들지 않는 이상 함께 예배드리기 힘든 아이가 됐다. 엄청 졸려 보였는데 아기띠를 집에 두고 왔다. 그냥 안아줘서는 자는 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자모실에 풀어놨다. 말이 자모실이지 워낙 오래돼서 그냥 다락방 같은 느낌이다. 그래도 우리 밖에 없어서 시윤이는 마음껏 돌아다니며 놀았다. 소윤이는 할머니와 함께 유아부 예배에 갔다. 거기 가면 뭐라도 간식을 준다는 걸 알고 있는 소윤이는 어제부터 유아부 예배에 가겠다고 노래를 불렀다.


"엄마. 나 내일 할머니랑 교화부 갈게여"

"할머니. 나랑 같아 교화부 가자여"

"아빠. 나 내일 교화부 예배 갈거다여"


자꾸 교화부란다. 니가 어느 부분 교화가 필요하긴 하지만 유아부란다.


"소윤아. 교화부가 아니라 유아부야"

"아 그래?"


저 능청, 누구를 닮았을까.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은 터라 점심은 따로 먹지 않았다. 시윤이는 집으로 가는 길, 유모차에서 잠들었다. 소윤이는 며칠째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난 후유증인지 꽤 이른 시간부터 졸음에 허덕이며 짜증을 분출하고 있었다. 아주 듣기 좋은 말로 소윤이에게 낮잠 잘 것을 권유했으나 단칼에 거절했다. 조금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잠깐 재울까 싶었지만 뭐, 소윤이랑 낮잠은 안 재우는 걸로 약속했고 소윤이도 일단 거절했으니 그냥 두기로 했다. 시윤이는 그대로 눕혔고 졸음을 호소하는 아내에게도 함께 좀 누우라고 권했다. 아내도 시윤이 옆에 누워 잠을 청했다. 소윤이는 할머니랑 같이 근처 학교에서 열리는 동네 축제를

구경하러 갔다.


혼자 남았다. 원래 근처 쇼핑몰에 운동할 때 입을 옷 좀 보러 갈까 했는데 너무 귀찮아서 그냥 집에 눌러앉았다. 거실 소파에 누워 리모컨을 쥐고 이리저리 채널을 바꿔 가며 시간을 보냈다. 이거야 말로 내가 가장 좋아했고 즐겼던 시간이다. 우리 집에는 TV가 없으니 이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아마 TV가 있었으면 지금보다 서너 배는 더 싸움이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오랜만에 TV 귀신이 되니 너무 좋았다.


소윤이랑 엄마도 돌아오고, 시윤이랑 아내도 깨고, 아빠도 교회에서 돌아오고 동생네도 도착했다. 소윤이는 점점 인사불성이 되어가고 있었다. 툭하면 짜증, 툭하면 울음, 툭하면 신경질. 저녁까지 먹어야 하는데 과연 잘 버틸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식당 예약 시간이 5시였는데 차를 타고 가야 했다. 그 상태라면 차에 태우자마자 잠들 것 같았다.


"여보. 잘 깨워"


역시나 소윤이는 차에 타자마자 눈이 풀리며 헤롱헤롱 댔다.


"소윤아. 어제 엄마가 산 게 있는데 이거 같이 먹어볼까?"


통하지 않았다. 먹긴 먹는데 눈은 점점 더 힘을 잃어갔다.


"소윤아. 안 돼. 자면 안 돼"


아내는 필사적으로 소윤이를 깨웠다. 거의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꽃을 사기 위해 아내랑 소윤이가 내렸다. 다행히 꽃을 사면서 소윤이는 조금 각성했고 큰 위기를 넘겼다. 저녁은 쿠우쿠우에서 먹었다. 파주에서 한 번, 신림동에서 한 번. 두 번째였는데 왠지 전국 어느 쿠우쿠우를 가도 비슷할 거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적어도 나에게 모임 장소를 정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거나 의견을 낼 수 있으면 쿠우쿠우는 무조건 피하게 될 것 같다. 그나마 소윤이가 조금 정신을 차리고 기분도 좋아져서 다행이었다. 물론 소윤이 비위를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좋아하는 음식을 대령한 나의 공도 크다. 시윤이는 저녁 식사다운 메뉴는 잘 안 먹고 튀김류 과자류 이런 것만 먹었다. 그냥 막 줬다.


'그래. 가만히 앉아 있기만이라도 해라'


초코 퐁듀가 있었다. 여러 가지 과자에 흐르는 초콜렛을 묻혀서 먹는. 보통은 과자를 집어서 초코를 묻히고 자리로 돌아가 초코가 묻은 과자를 먹는 게 일반적이지만 소윤이의 흥을 위해 컵에 초코를 좀 받았다. 소윤이가 자리에서 직접 초코를 찍어 먹을 수 있도록. 와. 소윤이는 나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나는 그래 봐야 뭐 좀 초코를 옷에 많이 묻히거나 그럴까 봐, 기껏해야 그 정도 걱정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소윤이는 내가 떠준 초코를 아예 그릇째 들고 마셨다. 입 주변은 온통 까맣게 되고 옷과 손은 초코 범벅이 되고. 찰랑거리는 초코액을 컵째 들고 마시는 네 살짜리의 모습은 생각보다 괴기스럽다.


"소윤아. 그건 아무래도 너무하다 들고 마시는 건 좀 아니지"


몇 번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삼국지의 장비처럼 호탕한 웃음이 지으며 두어 번 더 마셨다. 모든 또래 아이들이 다 그런지 몰라도 유독 소윤이는 적당한 선을 넘을 때 쾌감을 느끼나 보다. 적당히가 없다 적당히가. 소윤이 시윤이는 할머니 양 옆에 앉아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시윤이는 열심히 박수 치고) 기쁨조의 역할을 잘 감당했다. 시윤이는 장난도 많아지고 엄마 아빠 외에 가끔씩 "냥(안녕)" 과 같은 새로운 단어를 말하기도 하면서 후발주자(?)로서의 존재감을 키워가고 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정신없이 식사를 마치고 각자 집으로 가기 위해 나왔다. 소윤이는 할머니 집에 다시 갈 거라며 잠깐 떼를 쓰기는 했지만 졸릴 때는 이것도 제 풀에 꺾인다. 차에 타자마자 몇 마디 하더니 잠들었다. 시윤이는 낮잠을 꽤 많이 자서 안 잘 줄 알았는데 같이 잤다. 조기퇴근의 희망이 비치기 시작했다.


아내는 집에 가면 [뷰티풀 인사이드]를 볼 거라고 했다. 다음 드라마는 그걸로 정했다면서 자기 나름대로 시뮬레이션을 했다. 가자마자 드라마를 다운 받아 놓고 다운 받는 동안 집도 치우고 씻고 어쩌구저쩌구. 그중 하나라도 제대로 이뤄내면 다행일 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또 어딘가 눌러앉아서 빈둥빈둥 거리다가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건투를 빌어줬다. 아내와 나 모두 커피에 대한 열망이 강했고 윌에 들러 커피를 샀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니소윤이 시윤이 모두 살짝 잠에서 깼다.


'설마. 설마. 설마'


아내도 아마 이 마음이었을 거다. 빈둥이고 뭐고 애들 깨면 다 말짱 도루묵이다. 내가 시윤이 아내가 소윤이를 안고 방에 들어가 함께 누웠다. 다행히 둘 다 금방 다시 잠들었다.


"여보. 됐다"


아내와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조기퇴근을 자축했다. 아내가 드라마를 보는 동안 나는 방에서 일기를 썼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소윤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다급히 들어갔고 한참 동안 나오지 않길래 그대로 잠들었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나왔다.


"잠들었어?"

"어"


그 늦은 시간에 나와서는 갑자기 열심히 집을 치우고 설거지도 하고 쓰레기 정리도 하고 그랬다. 그걸 굳이 이 늦은 시간에 시작하지 말고 지금은 일단 자고 내일 하지 그러냐는 게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늘 일관된 나의 입장이고.


눈에 보이면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치워 놓고 자야 속 편하다는 게 마찬가지로 아내의 주된 반박.


그럴 거면 집부터 치워놓고 다른 걸 하든가 하지 탱자탱자 놀 때는 언제고 굳이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잠도 안 자고 이걸 하느냐는 말이다가 나의 재반박.


나도 좀 쉬고 노는 시간이 있어야 하니까 그렇지 라는 게 아내의 재재반박.


오늘은 아주 초기단계에서 서로 입을 다물었다. 서로 포기하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고 그렇게 맞춰가고 있다. 6년간 살아보니까 나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고 생각이나 행동 자체를 스스로 바꾸는 경우는 굉장히 드문 것 같다. 오랜 부부 사이에서 포기라는 말이 왜 자주 등장하는지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행위의 쟁취를 포기한다는 거지 상대방을 포기한다는 게 아니니 뭐 꼭 그렇게 나쁜 의미도 아니고. 아무튼 아내는 늦은 시간 열을 올려 집 정리를 하더니 집이 진짜 깨끗해지긴 했다.


"여보. 그래도 집 진짜 깨끗해졌지?"

"그러게"


아내는 갑자기 날더러 내일 자유시간을 가지라고 했다.


"왜? 내일 월요일인데?"

"그냥. 난 목요일에 친구들 만나니까 그걸로 자유시간 하면 되지"

"그래도. 그건 그거고"

"아니야. 여보 나갔다 와. 할 일도 많잖아"

"난 괜찮은데"


월요일에 나의 자유시간이라니 뭔가 꺼림칙했지만 일단 그러겠다고 했다. 꺼림칙한 마음의 반대편에서는 이미 내일 뭘 할지, 시간을 어떻게 쓸지 고민이 시작되고 있었다.



(덧붙임)

아내가 블로그에 먼저 발행한 일기를 보더니 [뷰티풀 인사이드]가 아니라 [뷰티 인사이드]라며 엄청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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