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4(토)
막상 차 없이 서울 시내까지 가려니 조금 걱정이 됐다. 지하철이든 버스든 한 시간 정도는 걸릴 듯했다. 대중교통을 타고 여기저기 많이 다니긴 했고 결과도 늘 좋았다. 힘들긴 해도 기억에 더 많이 남았다. 다만 이번에는 아내가 걸렸다. 가뜩이나 속도 안 좋은데 괜히 사서 고생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내도 나랑 같은 마음이었다.
"여보. 우리 괜찮겠지?"
"힘들 거 같으면 그냥 차 타고 가자"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무리하지 말고 너무 힘들 거 같으면 그냥 차 타고 가지 뭐"
"아니야. 그래도 재밌을 거야"
아내는 마지막으로 마음을 굳혔다. 지하철은 조금 더 쾌적한 대신 갈아타야 하고 많이 걸어야 하는 단점이 있었고, 버스는 거의 한방에 가는 대신 답답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우리는 버스를 택했다. 아무래도 애들이 있는 데다가 아내도 조금이라도 덜 걸으면 좋을 테니.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 집에서 출발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기대가 잔뜩이었다. 어제 하루 종일 집에만 있어서 외출을 벼르고 있었고, 자동차가 아닌 버스를 타고 간다는 사실에 들떠 있었다. 거기에 아내와 내가 잔뜩 바람을 넣었다.
"소윤아, 시윤아. 우리 시장 갈 거야, 시장. 재밌겠지?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그럴 거야"
"무슨 시장이여? 원당 시장이여?"
"아니. 원당 시장은 우리 동네에 있는 거고. 광장 시장 갈 거야"
사실 아내와 나도 좀 신이 났다. 주말에는 인파가 어마어마하다는 후기가 많았지만 아내와 나는 그런 거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 편이다.
겨울철 외출, 특히 차 없는 외출은 옷이 최대의 짐이자 일이다. 어쨌든 밖은 추우니 두껍게 입혀야 하는데 버스에 타면 또 다 벗겨야 한다. 겨울옷이니 부피가 커서 껴안고 있기도 버겁다. 그러다 또 내릴 때가 되면 다시 입혀야 하고. 2-3년 전만 해도 난 추위를 많이 안 타니까 괜찮다며 내 옷이라도 얇게 입었겠지만 이제 그러기 힘든 나이가 됐다.
주황색 광역 버스는 좌석이 많은 대신 더 답답하다. 히터는 어찌나 빵빵하게 나오는지. 아내와 소윤이, 나와 시윤이. 이렇게 붙어 앉았다.
"시윤아. 우리 버스 타고 한참 가야 되는데 지금 조금 자는 게 어떨까?"
"시더여엉"
"그래? 이따가 재밌게 놀려면 지금 자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아빠. 저 안 돌려여엉(졸려여)"
"그래? 지금 자면 좋겠는데. 안 자고 싶어?"
"아빠. 더(저) 안 다고(자고) 디퍼여엉"
슬쩍 재워보려고 했는데 싫다고 하니 별 방법이 없었다. 카시트였으면 어떻게든 눈을 감고 자라고 했겠지만 버스에서는 왠지 그게 안 통할 거 같았다. 안 재우면 이따 저녁 시간이 힘들 게 뻔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주어지는 상황에 기민하게 반응하기로 마음을 먹고 멍하니 바깥 풍경을 구경했다. 시윤이가 조용하길래 뭘 하나 봤더니, 웬걸. 잠들었다.
"여보. 얘 좀 봐"
"어? 자네?"
"어. 안 졸리다고 하더니 바로 자네"
그냥 자는 것도 아니고 위로 고개를 15도 정도 들고 입은 반쯤 벌린 상태, 그야말로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어쨌든 다행이었다. 시윤이가 잠든 걸 확인하니 나도 잠이 쏟아졌다. 소윤이 옆에 앉은 아내는 소윤이의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하느라 잠들 틈이 없었을 거 같다.
아내가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시윤이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시윤이는 일단 안고 내렸다. 시윤이는 깨지 않았다. 광장 시장까지 가려면 버스를 한 번 갈아타야 했다. 그리 멀지는 않아도 어쨌든 조금 걸어야 했다. 혼자 걸었으면 '조금'일 거리였는데 시윤이를 안고 걸으니 천 리 길이었다. 오른팔이 떨어져 나갈 듯했지만 깨우지 않았다. 최소한의 시간은 자야 밤이 무난할 테니.
내 체격이 아무리 건장하고 튼튼해 보여도, 제법 큰 아들 녀석을 힘겹게 안고 있는 모습은 영 안쓰러웠는지 여러 사람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비록 다섯 정거장밖에 안 되긴 해도 감사하기 그지없는 자리 양보를 받았다.
앉아 있는데도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그만큼 힘들었어도 시윤이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품에 폭 안겨서 자는 모습이 엄청 아기 같았다. 내 품에 안겨서 그렇게 오랫동안 자는 건 흔한 일은 아니었다. 손을 만지작거리고 볼에 뽀뽀를 해도 미동이 없었다. 근지구력이 한계치에 도달할 때마다 자세를 바꾸느라 번쩍 들어 올려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고대하던 광장 시장에 도착했고 시윤이도 깨웠다. 다행히 시윤이는 푹 잤는지 깨자마자 미소를 지었다. 바로 내려놨는데도 거부가 없었다. 잘 걸었다. 이건 아주 잘 잤다는 증거였다.
예상대로 사람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까딱해서 애들 손을 놓치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인파에 휩쓸려 애들을 잃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아내와 나는 각자 한 명씩 맡아서 손을 꼭 붙들었다. 애들한테도 반복적으로 주의를 줬다.
"엄마, 아빠 손 절대 놓으면 안 돼. 그럼 잃어버려. 꼭 잡아"
광장 시장 입구부터 아무 계획 없이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의류, 포목을 취급하는 상점이 모인 거리가 나왔다. 사람이 뜸했다. 먹거리 골목이 곧 나왔고 거기부터 사람이 많았다. 한 바퀴 쓱 돌면서 뭘 먹을까 살필만한 인파가 아니었다. 점포가 그렇게 많아도 파는 품목은 거의 비슷하기도 했고. 오기 전에 간단히 알아본 정보에 의거해서 원조로 알려진 꼬마 김밥 집에 자리를 잡았다.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실내 공간이 있기는 했는데 매우 협소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냥 서서 먹거나 걸으면서 먹었지만 애들이 함께하는 우리에게는 불가능했다.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서 자리를 잡았다.
꼬마 김밥과 떡볶이를 샀다. 광장 시장에서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을 나름대로 종합해 보자면 꼬마 김밥, 녹두전, 육회, 생대구탕 정도였다. 육회와 생대구탕은 애들이랑 먹기 힘든 음식이니 애초에 접었다. 녹두전이 남았는데 이게 줄이 어마어마했다. 다만 포장 손님은 줄이 없었다. 기왕 자리 잡은 거 녹두전도 사서 같이 먹으면 될 일이었다. 아내와 애들은 앉혀 놓고 내가 가서 녹두전을 샀다.
세 개 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일단 유명세에 비해 전혀 비싸지 않았다. 가격에 바가지나 거품이 없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꼬마 김밥과 녹두전을 아주 잘 먹었다. 아내와 나도 음식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여보. 완전 대성공이다"
"그러게. 가성비가 엄청 괜찮네"
이 느낌을 뭐라고 해야 되지. 뭔가 특별한 게 없는데 엄청 즐겁고 잘 되고 있는 거 같은, 아무튼 매우 좋은 느낌. 난 원래 이런 시장 구경과 먹거리를 좋아하기도 하고. 아무튼 난 엄청 만족스러웠다. (나머지 가족도 그렇게 보였다. 내 마음이 아니니 100% 확신은 못하지만.)
"여보. 우리 이제 뭐해?"
"그러게"
"우리 사실 먹으러 왔잖아. 이제 목적 달성했네"
"그러니까"
사람이 좀 없었으면 슬슬 걸으며 구경이라도 했을 텐데 도저히 그러기 힘든 상황이었다. 거기다가 아내와 나의 유일한 목적은 먹거리였다. 그걸 해결하고 나니 딱히 나아갈 방향이 없었다.
일단 광장 시장을 벗어났다. 여러모로 자극적인 음식을 먹어서 그런가 갈증이 많이 났다. 정확히는 커피가 생각났다. 아내도 같은 생각이었다. 바로 옆에 할리스가 있었다.
"여보. 일단 저기 들어갈까?"
"그럴까?"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도 특별한 즐거움을 줘야 하니 편의점에 들렀다. 소윤이는 딸기 우유, 시윤이는 초코 우유를 골랐다. 아빠 재량으로 빼빼로도 하나 샀다.
할리스 2층 창가 자리에 쪼르르 앉아 바깥 풍경을 보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소윤아, 시윤아. 너무 재밌지 않아? 아빠는 진짜 재밌는데"
아이들의 흥을 고취시키기 위한 발언이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다행히 아빠 혼자 신나서 날뛰는 느낌은 아니었다. 아내도 애들도 즐거워하는 건 분명했다. 다만 이후의 행선지가 불분명했다.
"여보. 이제 우리 뭐 하지?"
"그러게. 어디 갈까"
내가 교보문고를 제안했다. 물론 엄청 사람이 많겠지만 어차피 야외에는 있기 힘든 날씨였다. 딱히 갈 곳도 없었고. 다시 버스를 타고 광화문으로 갔다. 예상대로 교보문고에도 사람이 북적거렸다. 교보문고에 들어서며 아내와 나는 다시 대화를 나눴다.
"여보. 우리 여기서 뭐해?"
"나도 몰라"
소윤이와 시윤이게 책을 한 권씩 사주기로 했다. 처치홈스쿨 추천 도서 중에 골라서 두 권을 샀다. 시윤이는 아직 한글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두 권 다 소윤이 수준에 맞춰서 (그림은 적고 글씨는 많은) 샀다. 그렇지만 시윤이가 서운하지 않도록 적당히 느낌을 줬다.
"아빠아. 이거늠 내꺼에여엉?"
"아, 둘 다 누구 꺼는 아니야. 누나랑 시윤이가 같이 읽으면 돼"
의외로 교보문고에서 시간을 좀 보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막무가내로 돌아다니거나 헤집지 않는 게 큰 도움이 됐다.
오늘 아침 아내와 오늘의 동선을 의논할 때 얘기다.
"여보. 우리 오늘 어디 가지?"
"그러게. 갈 만한 데 있나?"
"디 타워 갈까?"
"디 타워? 두타?"
"응? 두타? 아니"
"아, 두타 아니야?"
나도 가 본 적 있다. 디 타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타가 이름을 세련되게 디타워로 바꿨구나'하고 생각했다. 아내에게 두타를 언급하고 뭔가 이상하다는 바로 감지했다.
"여보. 나 너무 옛날 사람 같네. 두타라니. 언제 적 두타야"
아내는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러분, 저 디타워에 있는 닥터 로빈도 가 봤답니다. 옛날 사람 아니에요.)
아무튼 우리는 디 타워에 갔다. 1층인가 지하에 아내가 가 봤던 카페가 하나 있었다. 카페 자체의 자리는 몇 개 없었는데 지하철역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앉을 만한 공간이 많았다. 거기 잠시 앉기로 했다. 아내는 갈증이 난다며 커피를 한 잔 더 마시겠다고 했다. (아까 할리스에서 커피를 마셨었다.) 완곡한 나의 만류에도 아내는 거침이 없었다. 아내는 아이스 라떼를 한잔 시켰다.
아내가 라떼를 두세 모금 마셨을 때쯤 소윤이가 아내의 라떼를 발로 밀었다. 완전히 모르고 그런 건 아니었다. 본인의 자리가 좁고 불편하니까 의도를 가지고 컵을 발로 밀었는데 그게 쏟아져 버렸다. 순전히 실수였어도 열받을만한 상황에, 의도가 개입되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아내는 침착했다. 난 옆에서 아까 산 책을 살펴보다가 나중에 상황을 파악했다. 나도 침착했다.
여기서 오늘 아내와 나의 하루가 다 설명된다. 아내와 나의 마음이 그토록 너그러웠다. 오늘만큼은 오대양 육대주 부럽지 않은 넓은 마음이었다. 소윤이에게 짜증과 분노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휴지를 가지고 와서 잔해물을 치웠다. 참은 게 아니고 참을 게 없었다. 나는 그랬다. (아내도 그래 보였고.)
지하철로 한 정거장을 이동해서 저녁을 먹으러 갔다. 메뉴는 김치찜. 시윤이가 꼬꼬맹이 시절일 때 한 번 갔던 곳이었다. 난 예전에도 몇 번 갔고. 아내는 나 때문에 알게 돼서 시윤이가 꼬꼬맹이 시절일 때 간 게 처음이었고. 고기를 즐기지 않는 아내지만 김치찜은 잘 먹는다. (물론 고기는 거의 안 먹고 김치만 먹는다.) 여기는 맛도 있고.
지난번에 왔을 때 하고 다른 게 있었다면 소윤이도 김치찜을 먹는다는 거다. 이제 소윤이도 이 정도의 매운맛은 소화가 가능하다. 김치도 먹고, 고기도 먹었다.
"아빠. 너무 맛있어여"
소윤이는 흰밥에 적당히 쉰 김치와 잘 익은 고기를 올리고 김과 함께 한 입에 먹는 맛을 알아버렸다. 맵다고 하면서도 꾸준히 김치와 고기를 먹었다. 시윤이는 김과 계란말이뿐이었지만, 그래도 잘 먹었다. 아내는 적당히 양을 조절했다. 맞다. 오늘도 나만 배 터지게 먹었다.
"아빠. 이제 우리 어디 가여?"
"어디 가긴. 집에 가야지"
"아빠. 바로 집에 가기는 너무 아쉬운데 롯데 마트 같은 데라도 가면 안 될까여?"
"뭐가 아쉬워?"
"아니, 그냥. 바로 집에 들어가는 건 뭔가 아쉬워여"
"그래. 그럼 롯데 마트 들렀다 가자"
롯데 마트에 가기 전에 한살림에 들러서 장을 봤다. 롯데 마트에 들를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순전히 아이들 때문에 잠시 들어가서 한 바퀴 돌았다. 마트 앞 광장에서 잠시 울산의 은율이네와 영상 통화를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딱히 목적도 없고 재미도 없었지만 그저 귀가 시간을 늦추기 위해 어떻게든 이유와 핑계를 찾아 밍기적 거리려고 했다.
"자, 이제 집에 가자. 시간이 많이 늦었어"
집에 가서 마지막 후식으로 딸기까지 먹었다. 그러다 보니 잠자리에 든 건 꽤 늦은 시간이었다. 모두 피곤했지만 뭔가 행복한 기운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