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시는 핫초코 얘기 하나 봐라

20.01.06(월)

by 어깨아빠

오전에는 한가했다. 여유롭게 밥 먹고 예배드리고. 오후에는 바빴다. 보건소와 산부인과를 가야 했다. 보건소 가기 전에 형님(아내 오빠)을 만나러 잠시 동네 카페에 갔다. 물론 내가 용건이 있어서 간 건 아니고 애들이 보고 싶다고 해서 성사된 아주 짧은 만남이었다.


보건소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간단한 검사를 받으러 간 거였다. 아내와 아이들이 검사를 받는 동안 난 근처 시청에 가서 주민등록등본과 가족관계증명서를 떼야 했다. 무인 민원 발급기가 있다고 해서 갔는데 지문 인식 단계에서 자꾸 오류가 났다.


[지문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스캔하여 주십시오]


거기 쓰여 있는 대로 수십 차례를 해도 마찬가지였다. 무인 민원 발급은 포기하고 창구에 가서 직접 접수하려고 했는데, 등본은 가능하지만 가족관계증명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발급기를 통해 뽑거나 가까운 주민센터에 가야 한다고 했다. 지문 인식이 안 된다고 했더니 그럴 리가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일단 다시 밖으로 나와 다시 무인 민원 발급기가 놓인 부스에 들어갔다. 마찬가지였다. 짜증이 오르고 있는데 어쩌다 보니 지문이 한 번 인식됐는지 주민등록등본은 출력이 됐다. 가족관계증명서는 어림없었다. 손가락을 이리저리 아무리 갖다 대도 소용없었다. 기계의 문제라고 하기에는 다른 사람들은 너무 잘 뽑아갔다. 내 엄지손가락 지문이 그렇게 이상한가.


다시 보건소로 가서 두 장의 서류를 아내에게 건넸다. 보건소에 서류를 내고 바로 산부인과로 이동했다. 롬이를 보는 날이었다. 아내의 임신성 당뇨 검사도 잡혀 있어서 평소보다 조금 일찍 갔고 시간도 오래 걸릴 예정이었다.


가는 길에 내가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병원에 가면 핫초코를 주겠다고 애들한테 말했다. 산부인과에 핫초코를 뽑아 먹을 수 있는 자판기가 하나 있었다.


아내가 접수와 기초 검진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소윤이와 시윤이를 데리고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내게 물었다.


"아빠. 핫초코는여? 언제 줄 거에여?"

"아, 그래. 잠깐만 기다려 봐"


앉아있던 곳 바로 뒤에 자판기가 있었다. 엉덩이를 떼고 일어서서 핫초코 버튼을 누르기까지 5초면 충분할 만큼 가까웠다. 손가락이 핫초코 버튼에 닿기 직전, 행동을 멈췄다. 5초의 짧은 시간에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저거 제대로 관리도 안 하고 씻지도 않을 텐데 뭐 좋다고 애들한테 주나'


마침 애들이 나한테 집중하고 있는 게 아니라서 대충 어물쩍대고 넘어가려고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그렇게 만만한 애들이 아니었다.


"아빠. 핫초코 왜 안 줘여? 주기로 했잖아여"

"아빠아. 빠이(빨리) 주데여엉"


일단 주겠다고 했으니 약속은 지켜야 했다. 대신 병원에서가 아닐 뿐. 이건 애들 입장에서는 궁금하기도 하고, 조금 실망도 할 법한 일이었다. 한 번 생각이 나자 끊임없이 (집요하게) 핫초코의 제공 시기를 묻는 소윤이에게 일단 병원에서는 안 되고 나중에 사 줄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나중에'는 '오늘 안에'라는 의미라는 것도 알려줬다. 소윤이는 계속 물어봤다. 왜 여기서는 못 먹는지, 오늘 중에 언제를 말하는 건지. 글로 써 놓으면 그게 뭐 어떻다고 그러나 싶지만, 막상 겪어보면 괴롭기 그지없다. 소윤이 특유의 집요함, 끈질김이 있다. 제대로 마음을 붙잡지 않으면 "아, 그만 좀 하라고! 그만 좀!" 으로 결말을 맺기가 아주 쉽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허다하고.)


대기 시간이 길다는 건 미리 알았기 때문에 약간의 준비를 해갔다. 연습장, 연필, 소윤이 공부책 등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 내 가방도 챙기는 나를 보며 아내가 말했다.


"그건 왜 챙겨?"

"아, 혹시 모르니까. 필요없을까?"


아내는 부질없는 짓을 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내가 당뇨 검사 시약을 먹고 기다리는 동안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소윤이는 아내와 함께 뭔가를 했다. 난 주차장에 가서 가방 속에 들어있던 책 한 권을 가지고 왔다. 아무것도 할 게 없어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장난을 치는 시윤이(종이와 연필이 있었지만 시윤이는 아직 그림 그리는 재미를 모른다.)와 적당히 눈을 마주치며 책을 읽었다. 한 5분 읽었더니 졸음이 쏟아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여보. 집어넣어"

"아, 그럴까"


저번처럼 소윤이는 롬이와의 만남을 엄청 기다렸고 시윤이도 겉으로는 그런 듯 보였지만 막상 보러 들어가서는 관심이 없는 걸로 보아, 연기였다. 소윤이는 의사 선생님의 세세한 설명을 귀 기울여 들으면서 어디가 발인지, 손인지, 얼굴인지를 알아차리고 엄청 신기해했다.


진료를 마치고 나서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물었더니 둘 다 치킨이 먹고 싶다고 했다. 아내와 나는 가성비를 고려해 근처 돈까스 가게를 가자고 했고. 치킨은 오늘 말고 다른 날 먹자며 설득하는 나를 향해 소윤이가 얘기했다.


"아빠. 그러면 우리한테 왜 물어봤어여. 그냥 엄마, 아빠가 결정해서 갔어야져"

"아, 그건 그런데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지"


결국 소윤이는 돈까스로 마음을 바꿨다. 끝까지 치킨이 먹고 싶다던 시윤이는 돈까스가 나오자 이렇게 물었다.


"아빠아. 이게 띠낀이에여엉?"


음식을 시켜 놓고 기다리는데 소윤이가 얘기했다.


"아빠. 아까 그거 혹시 잊은 거 아니져?"


하도 핫초코, 핫초코 노래를 부르길래 한 번만 더 핫초코 얘기하면 핫초코는 없을 거라고 엄포를 놓았더니 금기어를 쏙 빼고 물어본 거다. 자기 나름대로 얼마나 고민을 했을까. 내가 막 웃었더니 자기도 왜 웃는지 안다는 듯 같이 미소를 지었다. 그놈의 핫초코는 집에 돌아와서 한 잔씩 타줬다. 어떤 마침표 같은 거였다.


자, 이제 됐지. 타줬으니까 얼른 마시고 이제 자.


매일매일 애들이랑 시간을 많이 보내서 좋기는 한데 애들 자라고 들여보내 놓고 나면 나도 모르게 깊은 날숨이 새어 나오네. 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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