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7(화)
아내가 아침부터 분위기를 조성했다. 나에게는 아침 먹고 일찌감치 나가라고, 애들한테는 아빠는 아침 먹고 나가실 거라고. 설거지와 주방 정리를 비롯한 내 능력 안에서 처리 가능한 일은 최대한 해놓기 위해서 애썼다.
"얘들아. 아빠 다녀올게"
그냥 집에 있다가 나갈까 고민을 많이 했다. 집중해서 해야 할 일이 있기는 했는데, 작은방에 들어가서 애들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무모한 생각을 했다. 집에 있어도 아내를 돕거나 애들이랑 놀 건 아니니까 차라리 나가는 게 서로에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일찍 나왔다. 도서관에 있다가 미술 수업을 받으러 갔다.
수업이 끝나고 아내에게 연락을 했다.
"여보"
"어. 지금 끝났어?"
"어. 이제 가는 중이야. 여보는 괜찮아?"
"응. 괜찮아. 지금 하람이가 놀러 왔어"
"아, 그래? 애들은 괜찮았고?"
"어. 뭐 괜찮았어"
질문과 대답 사이에 생성된 여백이나 아내의 억양은 "괜찮았다"라는 말 뒤에 많은 사연이 있다는 걸 짐작게 했다. 그 사연은 안 봐도 4K 영상이고. (나 때는 '안 봐도 비디오'라는 관용 표현을 썼는데, 요즘은 '안 봐도 4K 영상', '안 봐도 VOD'라는 표현을 쓴다고 하네. 그래서 나도 한 번 써 봤다. 난 젊은 아빠니까. 디 타워를 두타로 유추하는 젊은 아빠니까....또르르)
하람이는 아직 우리 집에 있었다. (하람이의 양육자인 505호 사모님과 동생 하성이도.) 내가 너무 빨리 등장하면 모두의 흥을 깰지도 모르니 아내에게 제안을 했다.
"여보. 그럼 내가 스타필드 가서 책 찾아갈까?"
"아, 그럴래요? 그러면 되겠네"
소윤이 책을 주문한 게 있었는데 아직 못 찾고 있었다. 사실 책 찾아가는 건 두 번째 이유였다. 주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제였나 소윤이가 딸기가 먹고 싶다면서 딸기를 사자고 했다. 아내는 가정 경제 지출 계획상 (아우, 거창해라. 그냥 돈이 없...) 아직 딸기 구매를 위한 지출은 시기상조니 조금 더 인내해야 한다고.
나의 사비(용돈)를 털어 딸기 한 팩을 샀다. PK 마켓보다 동네 롯데 슈퍼가 단 돈 몇 백원이라도 쌀 거라는 경험적 근거가 있었지만, 그냥 샀다. (가장의 가오가 있지. 고작 몇 푼...은 무슨, 그냥 귀찮았...) 온 우주의 용돈쟁이들은 알 거다. 특히 박봉에 시달리는 용돈쟁이들은. 딸기 한 팩이 어떤 의미 인지.
어쩌다 보니 내 손에는 선물이 두 개나 들려 있었다. 책과 딸기. 소윤이와 시윤이는 역시나 환호했고, 아내는 딸기에 놀랐다. (놀란 것까지는 아니고 예상치 못했다 정도)
아내와 아이들은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서 저녁을 간단하게 먹었다. 여건상 점심을 굶은 나에게는 아내의 정성스러운 라면이 도착했다. 라면에 무슨 정성 타령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아내의 라면은 다르다. 아내는 물이 끓고 면을 넣으면 바로 알람을 맞춘다. 라면 봉지에 쓰여 있는 시간대로 정확하게. 게다가 라면에도 간을 맞춘다. 따로 뭘 넣는 건 아니지만 물 양에 엄청 신경을 쓴다. 여럿이 먹는 대용량 라면이 아니고서야 라면의 간을 신경 써 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생소한 광경이지만, 그게 아내의 라면이다. 계란이 풀어지는 걸 싫어하는 날 위해 계란은 언제나 둥근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TV도 사랑을 싣지만, 라면도 사랑을 싣는다.
집에 있는 대부분의 책이 소윤이 수준에 맞지 않아서 한 권 한 권 새 책(중고더라도 새로운)을 구비하고 있다. 아내와 내가 세운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책들은 처분하고 적절한 책은 구매하고. 다행히 지난 광장시장 나들이 때 샀던 두 권의 책과 오늘 찾아온 책 모두 좋아했다. 소윤이만. 사실 시윤이에게는 글자가 좀 많은 편이긴 하다. 그러다 보니 읽어주는 시간도 길어지고. 시윤이는 책의 1/3 지점 정도에서 자리를 이탈하거나 집중력이 흐려지곤 한다. 소윤이는 끝까지 집중하고. 아직은 아니지만 소윤이가 어느 정도 줄거리를 숙지하면 내용이 의도하는 의미에 관해서도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고민하고 있다.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경험한
"이육사의 광야에서 매화가 의미하는 게 뭐라고?"
라는 식의 전개가 될까 봐. 아직은 소윤이가 주체적인 해석을 못하기 때문에 그게 되고 나면 시도해 볼 생각이다. 소윤이는 오늘도 새로 사 온 책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고(읽어주는 걸 들었고) 시윤이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는 못했다.
잘 준비를 하는데 소윤이가 아내에게 물었다.
"엄마. 오늘은 우리랑 같이 잘 거에여? 아니면 우리 재워주고 나갈 거에여?"
"아, 오늘은 엄마 나갈 거야"
요즘은 아내도 스스로 몸 관리를 해야 한다고 느끼는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롬이에게 해가 될까 봐 걱정하는 마음에서) 애들이랑 일찌감치 자는 경우가 많다. 그런 아내가 다시 나올 의지를 공식(?) 석상에서 표현한 건 정말 그러고 싶다는 뜻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도 기별이 없길래 조심스레 카톡을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문을 열고 확인하고 싶었지만 혹시나 애들이 아직 잠들지 않은 (만약에 거의 잠들었는데 나 때문에 각성하게 되는) 상황일까 봐 조심스레 카톡을 보냈다. 여러 차례. 알림음(혹은 진동) 듣고 깨라고. 답장이 왔다.
[소윤이가 긴가민가]
그 카톡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내는 다시 거실로 나왔다.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밤늦은 시간에 다시 아내를 만난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