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하지 않는 삶

20.01.08(수)

by 어깨아빠

바빴다. 일단 소윤이의 치과 진료가 오전에 잡혀 있었다.


요즘 우리 집의 흐름상(아이들이 일찍 일어나지 않고, 일찍 일어나더라도 자기들끼리 노느라 부모를 깨우지 않는) 오전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의지(알람)가 필요했다. 알람은 요란스럽게 울렸지만 아내와 나는 푹신한 잠자리를 벗어나는 데 한참 걸렸다. 누구를 만나러 가거나 공식적인 자리에 가는 게 아니니까 동네 마실 나가는 느낌으로 나와서 그나마 준비 시간을 줄였다. (아내와 내 얘기를 하는 거다.)


소윤이의 마지막 치과 진료였다. 사실 진료라고 하기에도 거창했다. 지난번에 본을 뜬 은을 씌우기만 하면 됐다. 소윤이는 큰 어려움 없이 진료를 받았고, 이로써 소윤이는 두 개의 은니 보유자가 됐다. 소윤이는 무척 좋아하고 자랑한다. 첫 은니(총 두 개)를 씌우고 나서는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저 은니 했어여"


라고 자랑을 했다. 아내와 나에게 이렇게 얘기하기도 했다.


"아빠. 저는 은니가 너무 좋아여"

"왜?"

"매끄러운 느낌이 너무 좋아여"


소윤이와 아내가 진료실에 들어가 있는 동안 시윤이랑 로비에서 기다렸다. 네스프레소 머신이 있어서 커피를 한 잔 마실 수 있냐고 요청했더니 (커피를 마시려면 직원에게 말하라고 했다) 직원분이 오셔서 컵을 받쳐 놓고는 커피를 내렸다. 직원분은 전화를 받으러 가고 난 그 앞에 서서 기다리는데 커피가 멈출 생각을 안했다. 잔에 가득 담긴 맥주처럼 거품이 끝까지 차올랐다.


'멈추겠지? 멈추겠지?'


결국 멈추지 않았다. 콸콸 넘치길래 어떻게 해야하나 당황하다가 버튼 하나를 꾹 눌렀다. 커피는 멈췄지만 현장은 참혹했다.


"저기, 커피가 안 멈추던데요. 넘쳤는데"

"그래요? 그럴 리가 없는데. 왜 넘쳤지"

"그러게요. 가만히 보고 있었는데"


괜히 곤란했다. 그럴 리가 없다는 상황이 내 눈 앞에서 펼쳐졌으니까. 유일한 목격자가 용의자로 몰리는 곤란함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소윤이의 치과 진료를 마친 뒤에는 하나로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내일 집에 손님이 오기로 했고 식사를 대접하기로 했다. 필요한 재료를 사야 했는데 대형 마트는 의무 휴뮤일이었다. (하나로 마트는 의무 휴무에 적용되지 않는다.) 아내가 미리 작성해 놓은 구매 품목을 보며 하나하나 카트에 담았다. 장을 보고 나니 딱 점심시간이었다. 아내는 입구에 들어설 때부터 얘기했다.


"요즘 저기가 핫하더라"


지역 거주민 카페(온라인)에서 평이 좋다는 말이었다. 하나로 마트 안에 새로 생긴 국수집이었다. 점심은 거기서 먹기로 하고 들어갔다. 메뉴는 딱 하나였다. 칼제비. 매장 입구에 걸린 현수막에는 분명히


[칼칼하고...]


의 표현이 있었다. 주문을 받으시는 아주머니에게 물어봤다.


"아, 칼제비가 혹시 매운가요?"

"아니요. 안 매워요. 하얀 국물이에요"


뭐지. 그럼 왜 칼칼하다고 써 놓은 거지. 아내와 나는 실패 경험이 많다. 안 맵다고 그래서 시켰는데 막상 받아보면 매콤한 기운이 물씬 풍길 때가 많았다. 우리는 애들 기준에서 맵지 않냐고 물어본 건데 저쪽에서는 성인을 기준으로 답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연유로 이번에도 의심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정말 안 매웠다. 덕분에 모두 잘 먹었다.


흐리던 날씨가 조금씩 개는, 구름에 가려졌던 햇볕이 조금씩 떨어지는 오후에 집에 돌아왔다. 아내는 아침부터 너무 부지런히 움직였는지 피곤하다면서 방에 가서 잠깐 눕겠다고 했다. 나도 나른하니 잠이 쏟아져서 같이 누울까 싶었지만 그러면 아이들이 가만히 두지 않을 듯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거실에서 놀고 있었고, 난 소파에 누웠다. 그대로 꽤 달콤하게 (오래) 잤다.


"어. 여보"

"나도 잤어. 여보"


애들이 깨우지 않은 걸 보면 둘이 잘 놀았나 보다. 아까 장 보면서 고기도 샀어야 했는데 그걸 잊었다. 내가 다시 나가서 사 오기로 했다. 아내가 좋아하는 근처 카페에 들러서 아내의 라떼도 한 잔 샀다. 아이스 라떼지만 얼음을 뺀 미지근한 라떼로. 집에 가는 동안 얼음이 녹아서 밍밍해지는 걸 막기 위한, 평소에 미지근 라떼를 즐겨 마시는 아내의 취향을 고려한 세심함이 폭발하는 순...(멍멍) 아내는 예상치 못한 커피에 매우 만족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요즘 의미 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걸 연습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밥을 먹는데 둘 (소윤, 시윤) 다 같은 숟가락으로 먹겠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거나, 서로 같은 자리에 앉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거나, 씻을 때 누가 먼저 씻는가를 가지고 버틴다거나. 뭐 각자에게는 나름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체로 너무 소모적인, 불필요한 분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엄마, 아빠가 정해주는 대로 수긍하는 걸 연습하고 있다. 버리는 삶을 연습해야 하는 건 아내와 나도 마찬가지지만 (여전히 잘 안 되고 있지만) 그래도 가르칠 건 가르쳐야 하니까.


누구와 자는가 하는 건 그중에서도 가장 큰 사안이다. 당연히 엄마랑 자는 걸 원하고. 자는 문제는 다른 것들과 좀 다른 성질이라는 걸 이해하기 때문에 대부분 아내가 함께 들어간다. 다만 아내가 '오늘은 아빠랑 자라'라는 의사를 표시할 때는 내가 들어간다. 물론 애들도 바로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오늘도 소윤이와 시윤이는 엄마랑 자고 싶다며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문제는 소윤이의 태도였다. 졸려서 그랬는지 요즘은 잘 보이지 않는 아주 격정적인(무례한) 태도를 보였다. 강력한 훈육의 시간이 이어졌다. 처음 아빠랑 자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지막하게 엄마랑 자고 싶다는 말을 내뱉었던 시윤이는 사태를 지켜보더니 더 이상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순순히 움직였다. 방에 들어가서 잠들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엄마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이것이 둘째의 생존 방법이다.


소윤이는 한참 동안 슬픈 기운을 떨쳐내지 못하더니 좀 놀고, 책도 읽고 그랬더니 자기가 먼저 얘기했다.


"아빠. 이제 기분이 좀 나아졌어여"


그렇게 엄마랑 자고 싶다더니 막상 들어가서는 내 손을 찾아서 잡고, 끌어안고 그랬다. 시윤이는 진작에 잠들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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