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3(월)
하나님이 우리 아이들에게 주신 여러 가지 중에 특히 감사한 건, 지난날의 폭풍과 파도를 마음에 담아 두지 않고 달이 지는 동안 모두 소멸되게 만드셨다는 거다. (물론 늘 의심한다. 우리 아이들이 혹시나 치명적인 상처로 아파하지는 않는지.) 아내와 내가 나름대로 채찍 뒤에는 풍성한 당근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한몫을 하지 않을까 자찬해 본다. (어제도 아내는 정말 오랜만에 - 롬이를 임신한 뒤 배가 부르고 나서는 거의 그런 적이 없는데 - 애들 사이, 바닥에 누워서 잤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지난밤의 격동을 잊었는지 왜 엄마가 자기들 옆에서 잤는지를 더 궁금해했다.
"엄마. 어제 왜 우리 옆에서 잔 거에여?"
"엄마아. 왜 옆에서 자떠여엉?"
"엄마? 오랜만에 소윤이랑 시윤이 옆에서 자고 싶어서 그랬지"
위기는 기회다. 흠집이 나고 패였을지도 모르는 아이들의 마음에 아내가 침투하는 거다. 멀쩡한 마음에 손을 대는 것보다 효과가 좋기도 하다. 소윤이와 시윤이 모두, 내가 좋아하는 각자의 대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오늘의 첫 일정은 점심이었다. 아파트 차원에서 진행하는 [무료 점심 제공 행사(?) - 이하 '행복한 밥상']가 있었다. 방학 기간에 부모님 없이 지내야 하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점심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인데 신청자가 적어서, 사실상 특별한 장벽 없이 누구나 가서 먹을 수 있었다. 아내는 작년부터 쏠쏠한 혜택을 봤다.
그게 오늘부터 시작이었다. 난 집에 남고 아내와 아이들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잠깐 소파에 앉아 쉬다가 할 일을 좀 하려고 했는데, 소파에서 채 엉덩이를 떼기도 전에 아내와 아이들이 돌아왔다.
"여보. 엄청 빨리 왔지"
"그러게. 왜 이렇게 빨리 왔어?"
"그냥. 얼른 먹고 왔지"
'왜 그랬어. 왜!! 왜!!' (이것은 마음의 소리입니다.)
그다음은 시윤이 안과를 가야 했다. 눈에 난 다래끼가 가라앉기는 했지만 의사 선생님의 진찰을 필요해 보였다. 아내가 알레르기 증상 때문에 가 본 적 있는 안과에 가기로 했다.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약 넣고 먹으면 괜찮아지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우리 애들이 병원에서 난동 부리는 유형은 아닌가 보다. 시윤이도 순순히 턱을 대고 의사 선생님께 눈을 내줬다. 의사 선생님은 렌즈로 살피고 손으로 만져보시더니 말씀하셨다.
"하아. 이 정도면 꽤 굳었네요"
"네?"
"이건 3일 전에 생긴 게 아니에요. 그전에 생겼는데 발견을 못했겠죠. 딱딱하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눈으로 보기에 괜찮으니까 수술은 안 해도 될 것 같기는 한데, 나중에 다시 커지면 그때는 수술해야죠"
"아. 이게 약으로는 안 나아지죠?"
"네. 이건 이번에 생긴 게 아니라서. 어른이었으면 바로 수술했겠지만 애라서. 일단 지장은 없으니까"
"약으로 좋아지고 이러지는 않나요?"
"한 번 굳은 건 약으로 안 되죠. 그건 수술을 해야 되고"
"아"
이런 된장. 어렴풋하지만 시윤이의 다래끼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언젠가 생겼다가 알아서 사라진 적이 있었는데, 그게 사라진 게 아니었는 모양이네. 속상했다. 애들이 아픈 것에 생각 보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편인데 이건 아니었다. 아마 미리 찾아봐서 그랬나 보다. 다래끼가 굳었을 때는 칼로 째고 빼내야 하는, 즉 수면 마취를 하고 시술을 해야 한다는 후기를 봐서.
자기 자식 몸에 칼을 대고 생 살을 찢는데 데 아무렇지 않을 부모가 몇이나 되겠나.
지난 과거가 후회스러웠다. (이것도 나답지 못했다. 난 기침을 방치하면 폐렴으로 '발전'한다거나, 콧물을 놔두면 비염으로 '발전'한다는 식의 접근을 매우 싫어한다. 그건 그냥 현상을 유발하는 '바이러스' 때문이지 '방치'가 원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달랐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아도 '처음 시윤이 눈에 다래끼가 났을 때, 굳지 않게 조치를 취할걸'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일단 진정 국면이었고, 약을 쓰면 더 확실할 거라고 하셨다. 의사 선생님의 뉘앙스로 유추하자면, 다래끼 그 자체가 큰 위험은 아닌 듯했다. 다만 보기에 좋지 않고, 본인이 불편하니까 치료하는 느낌이었다. 일단 약으로 진정시키고 만약에 다음에도 재발하면, 특히 눈으로 보기에 심하면 그때는 수술을 해야겠다고 말씀하셨다.
약을 처방받아서 나오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번에는 이렇게 지나가도 언젠가 다시 생기고, 결국 칼을 대야만 할 거 같은 예감이었다. 선생님처럼 시윤이의 눈꺼풀을 매만져 보니 조그맣지만 딱딱한 알맹이가 느껴졌다.
저녁에는 처가 댁에 가서 밥을 먹기로 했다. 난 중간에 미용실에 들러서 머리를 잘랐다. 아내와 아이들은 장모님과 함께 마트에 갔다고 해서 나 먼저 처가댁으로 복귀했다. 아무도 없는 집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그 뭐랄까, TV 리모콘을 감싸 쥐고 엄지손가락으로 버튼을 누를 때 느껴지는 묘한 쾌감이 있다. 지금은 누리지 못하는 과거의 즐거운 순간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랄까. 잠깐 동안이었지만 UFC KO 모음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아내와 아이들, 장모님이 돌아왔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자잘한 것 여러 개를 손에 들고 있었다. 종이접기 책, 가위, 색칠하기 책, 색연필 등등. 이제 엄마, 아빠를 통해서는 조달하기 힘든 여러 가지를 할머니, 할아버지를 통해 공급받는다. 아내는 그런 거 사주지 않으셔도 된다고, 아니 사주지 말라고 말씀을 드리지만 흐르는 사랑을 막을 수는 없나 보다. 그래도 아내의 강력한 권고 덕분에 그야말로 장난감일 뿐인 건 피하고 계신다.
장모님은 장인어른의 퇴근이 늦으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자고 하셨지만, 아내와 나는 기다렸다가 같이 먹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장인어른은 식당으로 바로 오시기로 했다. 청국장과 두부 요리를 파는 곳이었는데 가격 대비 음식이 괜찮고, 애들이랑 먹기에도 좋았다. 소윤이는 청국장의 맛에도 눈을 떴다.
"엄마. 저 청국장에 있는 콩 주세여. 많이"
시윤이는 콩나물을 집중 공략했다. 시윤이는 그때그때 꽂힌 반찬을 한 놈만 패는 모습을 종종 보인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만난 것치고는 식사 태도가 매우 좋았다. 이른 점심 때문에 배가 고파서 정신없이 먹느라 그랬는지는 몰라도.
"아빠아. 밥 먹구우 까빼 가꺼에여엉?"
"카페? 가서 뭐하게? 시윤이는 커피도 못 마시는데"
"아이잉. 그래두여어엉"
카페에서도 소윤이와 시윤이가 먹을 게 많았다. 각종 과자(할아버지 제공)나, 빵(할아버지 제공)이 넘쳐났다. 여러모로 기분이 좋은 소윤이와 시윤이가 가끔씩 귀를 닫기는 했지만 봐 줄 만한 수준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모두 돌아오는 길에 잠들었다. 아내는 걱정했다.
"쟤네 어떻게 안고 가지?"
"왜?"
"이제 내가 시윤이 안기 너무 힘들 거 같아"
"아, 그렇구나. 그러게"
도착해서 주차를 하는데 아내는 자기가 시윤이를 안겠다고 했다. 아무리 엄마는 슈퍼맨이라지만 27주 차 임산부가 14kg을 안고 10층까지 가는 건(물론 계단은 아니지만) 무리였다.
"여보. 그냥 내가 안을 게"
"누구를?"
"둘 다"
"안 돼. 여보가 어떻게 둘 다 안아"
"왜. 평소에도 가끔씩 그렇게 하잖아"
"아, 그건 엄청 잠깐이고. 괜찮아. 내가 안으면 돼"
"아, 안 된다니까. 그러다 롬이 큰일 나"
"여보가 어떻게 둘을 안아"
"일단 해 보고 안 되면 내려놓으면 되지. 일단 내가 소윤이를 안을 테니까 여보가 시윤이를 안아서 나한테 넘겨 줘"
그러면서 소윤이를 안으려고 카시트 벨트를 풀었는데 소윤이가 눈을 떴다. 일단 자라고 하면서 안기는 했는데 고개를 툭 떨구지 않는 게 자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
"소윤아. 안 잘 거야?"
"네"
"그래. 그럼 걸어서 가. 아빠가 시윤이를 안아야 돼"
반대쪽에서 시윤이를 꺼내던(?) 아내에게 얘기했다.
"여보. 얘 깼어?"
"엥?"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둘이 합치면 30kg이 넘을 텐데. 아무리 아빠도 슈퍼맨이라지만 허리 뼈 하나를 내어줬어야 할지도 모른다.
시윤이는 그대로 방에 눕혔고 소윤이는 양치를 해주고, 옷도 갈아입혔다.
"아빠. 책은여?"
"지금 너무 늦었어. 오늘은 그냥 자"
아내가 나 대신 대답을 했다. 내가 다시 말했다.
"소윤아. 책 한 권 골라"
"오잉? 엄마, 아빠가 책 읽어주신대여"
아내에게 눈짓으로 마음을 전했다. 아내도 읽은 듯했다.
"아빠. 그런데 왜 책 읽어줘여? 엄청 늦었잖아여"
"그냥. 요즘에 엄마, 아빠가 소윤이한테 잔소리를 많이 한 거 같아서. 물론 잔소리는 아니고 소윤이에게 꼭 필요한 거지만 그래도 소윤이는 속상할지도 모르잖아. 시윤이 없을 때 이렇게라도 소윤이 기분 좋게 해주려고"
"아빠. 저는 하나도 안 속상해여"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소윤이는 기분 좋게 책 한 권을 읽고 자러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