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5(수)
오전 내내, 오후에도 계속 집에 있었다. 집에 머문다고 해서 결코 한가하지는 않다. 일은 늘 존재하니까. 한가해 보이면 아이들이 다가오고, 한가해 보이지 않으려면 뭔가 해야 한다. 물론 아이들이랑 노는 것도 즐겁긴 하지만 사람이라는 존재는 누구나 한계치라는 게 있으니까. 애들이랑 노는 것도 마찬가지다. 적당한 거리와 시간이 필요한 법인데 함께 있으면 그걸 확보하기가 어렵다.
어디라도 나가고 싶었는데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돈이 많이 들지 않고, 인공적이지 않으며,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는 곳을 열심히 고민했다. 집 가까운 곳에 얼음 썰매장이 있길래 갈까 했는데 시간이 늦어서 갑자기 준비하고 가는 게 뭔가 내키지 않았다. 날도 얼음 꽝꽝 얼 정도로 춥지 않았고.
"여보. 그냥 스타필드나 갈까. 마트 구경이나 할까"
정확히는 마트였다. 조금 큰, 구경할 게 많은 마트. 엄마, 아빠가 외출 장소를 스타필드로 정했다는 걸 안 소윤이가 바로 물었다.
"저 스타필드에 가서 꼭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얘기해도 되여?"
"응. 얘기는 얼마든지 해도 되지"
"저, 거기 게임하는데 거기 가서 딱 하나만 하고 싶은데 해도 될까여?"
"아빠한테 물어볼까? 아빠 소윤이가 하나만 하고 싶은데 되나요?"
소박하기도 하지. 아이들에게 천 원의 행복을 선사하기로 했다. 대신 미리 약속을 받았다. 딱 하나씩만 하기로. 소윤이는 바람에 날아다니는 공을 자그마한 바구니로 받는 게임 (막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받는 게 아니다. 그냥 통안에 든 바구니와 연결된 손잡이를 움직이는)을 한다고 했고, 시윤이는 자동차 게임을 하겠다고 했다.
"여보. 나도 하고 싶은 거 얘기해도 돼?"
"응. 얘기는 얼마든지 해"
"나 축구화 사 줘"
"응. 얘기는 많이 해"
도착하자마자 게임하는 곳에 가서 소윤이와 시윤이의 욕구부터 해소했다. 소윤이가 선택한 게임은 그전에 누가 동전을 넣고 그냥 갔는지 두 판이나 더 작동이 됐다.
"아빠. 아빠. 이거 또 돼여"
소윤이는 자기가 커다란 버튼을 누르면 무조건 게임이 다시 시작된다는 믿음을 가졌지만, 금방 깨달았다.
"아, 이제 안 되네"
시윤이는 자동차에 앉아 핸들을 잡고 열심히 돌렸다. 화면 속의 시윤이 캐릭터는 갈 곳을 잃고 방황했지만 시윤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시윤아. 재밌어?"
"네"
"재미 없으면 그만해도 돼"
옆에서 지켜보던 소윤이가 잽싸게 말을 얹었다.
"시윤아. 재밌어? 재미없으면 내려와도 돼. 그럼 누나가 할게"
그러면서 은근슬쩍 핸들에 손을 얹었다. 자동차 게임의 생명은 핸들이다. 시윤이가 아무리 한쪽 방향으로만 무의미하게 핸들을 돌린다 해도, 시윤이는 알고 있다. 이 핸들을 온전히 자기만 돌리는 것이 자동차 게임에서 누리는 최고의 권리라는걸. 시윤이는 누나의 팔을 걷어냈고, 아내와 나도 소윤이에게 비켜주는 게 맞는다고 알려줬다.
허락된 한 개의 게임을 각각 마치고 나서 빠르게 자리를 이동했다. 소윤이와 시윤이 모두 아주 잠시, 미련을 보였다.
"아빠. 정말 딱 한 개만 더 하고 싶은데 안 될까여?"
"아빠아. 따아아악. 항개망여어엉"
아마 내 지갑에 천 원짜리가 있었으면 허락했을지도 모르겠다. 고민했지만 가던 길을 재촉했다.
"얼른 와. 너희 이렇게 떼쓰면 다음에는 이 한 번도 못 하는 거야"
이럴 때 아이들이 기특하다. 아쉬움 가득이지만 마음을 접고 따라온다. 스타필드에 특히 저녁 시간에 가 보면 알겠지만,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하다. 그 속에서 아내와 나의 말을 따라 고분고분 그러나 즐겁게, 끌려오지 않고 스스로 걸어가는 소윤이와 시윤이를 보면 더욱 뿌듯하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해도 기쁘게 살 수 있다는 걸 알려준 쾌감이라고나 할까.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는 게임 한 판을 자제시키고 커피 캡슐을 사러 갔다. 사람은 그런 거다. 부모도 사람이고. 내가 잘나서 자녀를 키우는 게 아니라 자녀를 키우면서 나도 성숙하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 소윤이가 조금만 더 크면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아빠. 커피 캡슐 사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에요?"
그때 끊어야지. 지금은 말고.
마트로 가는 길에 어묵 가게를 본 소윤이가 어묵이 한 개 먹고 싶다고 했다. 평소에 자주 사 주던 조그만 어묵이 없어서 큰 걸 사서 반씩 나눠줬다. 아내와 나도 큰 걸 하나 사서 나눠 먹었다.
시윤이는 요즘 나에게 안아달라는 요구를 많이 한다. 오히려 더 어릴 때, 걸음마를 막 떼었을 때는 안 그랬다. 요즘에도 아내한테는 안아달라는 말을 안 한다. 얘도 아는 거다. 엄마는 자기가 아무리 요구해도 그게 불가능하다는걸. 그러니 내가 있으면 조금 걷다가 힘들다면서 내 앞을 막아서고 두 팔을 벌린다. 그 모습이 너무 아기 같아서 가능하면 안아주기는 하는데 나도 오래 가지 못한다. 정말 많이 힘들다.
"시윤아. 아빠 힘들어"
"아빠아. 저두 힘드여여어엉"
"시윤아. 걷는 게 힘들어?"
"네에"
"그런데 아빠는 시윤이까지 안고 걸어야 되잖아. 그럼 아빠가 더 힘들지"
"아니에여어엉. 내가 더 힘드여여어엉"
"왜?"
"아빠늠 힘이 째니까(세니까)여어엉"
"그건 그런데 그래도 아빠도 힘들어"
"그대여엉?"
"그럼"
안아줬다가 내려놨다가 다시 안아줬다가를 반복한다. 이럴 때마다 소윤이가 마음에 걸린다. 소윤이는 정말 안고 걷기가 너무 힘들 정도로 컸다. 아주 가끔씩 안아주기는 하는데 시간이 매우 짧거나, 앉아서 안는 게 대부분이다. 그래서 소윤이 눈치를 살피는데 서운해하지는 않는 듯하다. 안아달라고 하지도 않고.
마트 카트에 앉힌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시윤이는 잠들었다. 카트가 좀 작은 편이라 시윤이를 눕히기 힘들었다. 최대한 편한 자세를 만들어 주기는 했는데 그래봐야 구깃구깃한 자세였다. 그래도 시윤이는 깨지 않고 계속 잤다. 엄청 피곤했나 보다. 그 시간에 자면 밤이 두려웠지만 별 방법이 없었다. 어차피 바로 집에 갈 것도 아닌데 깨우기는 어려웠고.
트레이더스 식당가에서 짜장면과 (거대)조각 피자를 샀다. 마트 구경을 하다가 치킨 스낵랩도 샀다. 시윤이는 일단 그대로 두고 식사를 시작했다. 짜장면은 인공의 맛이 물씬 풍겼다. 중국집에서 바로 만든 것과 비교하자면 인공 조미료의 향이 훨씬 강하게 느껴졌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그냥 냉동식품 맛이었다. 다음부터는 안 사 먹을 거다. 소윤이는 너무 잘 먹었다. 조금, 아니 많이 미안했다. 요즘은 이런 허접한 바깥 음식을 먹이면 마음이 무겁다. 집에서 엄마, 아빠가 만들어 주는 것보다 좋은 음식은 없다는 게 우리의 기본 철학이니 일단 바깥 음식은 뭐든 섭섭하기 마련이지만, 그중에서도 오늘처럼 질이 떨어지는 음식은 더 그렇다.
끝 무렵에 시윤이도 억지로 깨웠다. 잠을 덜 자고 깬 시윤이는 입을 삐죽 내밀고 특유의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계속. 그 와중에 한 입 크기로 잘라서 들이미는 피자는 잘 받아먹었다. 거의 한 조각을 다 먹었다. (한 조각이 한 조각이 아닌 거대한 크기다.)
"아빠아. 조금띡 기분이 도아지고 이떠여어엉"
집에 돌아갈 무렵에는 오히려 허용치 이상으로 흥분 상태였다.
차에 가기 전에 시윤이 팬티를 두 장 구입했다. 미루고 미뤘던 시윤이의 배변 훈련을 내일부터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내가). 시윤이는 종종 팬티를 향한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곤 했다. 누나가 팬티를 입는 걸 보면 자기도 팬티를 입고 싶다는 말을 했다.
"시윤아. 그러면 기저귀를 떼야 돼. 기저귀를 떼려면 쉬 마려울 때 그냥 쉬 하지 말고 엄마, 아빠한테 쉬 마려워요 이렇게 얘기해야 되고, 똥 마려울 때도 그냥 싸지 말고 똥 마려워요 이렇게 얘기해야 돼"
사실 시윤이 탓은 아니다. 게으르고 두려움에 시도조차 하지 않은 아내와 내 탓이지. 시윤이는 새로 산 팬티를 보며 엄청 기뻐했다.
"시윤아. 내일부터 우리 기저귀 말고 변기에 쉬 해보자. 알았지?
"네"
"시윤이는 오빠니까 잘 할 수 있지?"
"네에"
한동안 특이점이 없던 아내와 나의 육아 인생에 큰 변곡점이 찾아 오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