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는다

20.01.19(주일)

by 어깨아빠

오늘은 아내와 내가 마음대로, 갑자기 정한 Movie Day였다. 이렇게 벼른 날은 아침부터 그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 수월한 영화 관람을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아이들의 신속한 밤잠이다. 눈 뜨자마자 밤에 재울 생각이라니 좀 웃기지만 이게 현실이다. 밤에 금방 재우려면 낮에 재우지 않아야 하고 낮에 재우지 않으려면 (낮에 재우지 않으면서도 덜 피곤하게 하려면) 아침에 최대한 늦게 일어나야 했다. 애들이. 다행히 오늘은 평균보다 더 늦은 시간까지 자고 일어났다.


'좋았어. 절반의 성공이야'


아내가 주일 아침마다 나에게 물어보는 게 있다.


"여보. 여보 운동복 빨려 있나?"

"글쎄. 모르겠네. 상관없어. 아무거나 입으면 되지"

"그래도. 아마 빨았을 거야"


나의 축구 운동복이 세탁 및 건조까지 마쳤는지를 확인하는 거다. 정말 상관없다. 그깟 운동복 따위 뭐가 중요한가. 발열 내의 위에 반바지 입고서라도 하면 되지. 축구 열정은 그렇게 금방 식지 않는...(멍멍)


날이 흐렸다. 급히 일기예보를 확인했다.


[수도권 전 지역 오후 한때 눈이나 비, 강수량은 1-5mm]


안도의 한숨을 몰래 내쉬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오늘도 친구 아내가 함께 예배를 드렸다. (친구 놈은 늦잠 자느라 못 나왔다.) 새싹꿈나무 예배를 마친 소윤이와 시윤이는 식당에서 이모를 보더니 매우 반가워했다. 보통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던 교회라 그런 건가. 평소에 더 자주 보는 뭇 이모들을 만났을 때는 오히려 안 그러는 녀석들이 유독 유난을 떨며 흥분했다.


소윤이는 이모에게 물었다.


"이모. 그런데 밥 먹고 잠깐 카페 갈 시간 있어여?"


밥 먹듯이 카페를 찾는 여섯 살짜리 아이로 키운 부모는 대체 누구인가. 소윤이의 바람대로 잠시 카페에 들러 차를 한잔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카페에서도 여전히 허용치 이상의 흥분 수위를 넘나들었다. 덕분에 아내에게 제지도 많이 당했다. 난 관망했다. 곧 떠나야 하니까.


집에 아내와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다시 교회로 갔다. 아내는 집에 있을 거라고 했다.


"오늘은 무지출 데이야"


어제 먹고 남은 팝콘이 아내의 믿는 구석이었다. 고작 팝콘이 뭐 그렇게 대단하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 옥수수를 튀겨서 팝콘을 만드는 일은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엄청난 이벤트고, 또 그게 먹는 거라면 더더욱 그렇다.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을 빠르게 보내는 것 이상이다. 그들의 온 관심과 집중을 잠시나마 다른 무언가(팝콘)로 돌리는 쉼표 같은 순간이 될 거다. ('잠시나마'가 핵심 단어다. 수십 분, 몇 시간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자.)


축구까지 끝내고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집에 소윤이 외숙모가 와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고 했다. 괜찮았냐는 물음에 "괜찮았지. 안 괜찮은 순간도 많았지만"이라고 대답했다. 지난 주의 "지나가면 다 괜찮지"와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아내는 오늘의 거사를 위한 행동 계획을 하달했다. 내가 집에 돌아가면 일단 애들을 씻기고, 그다음 내가 씻고, 그다음 소윤이 외숙모를 차로 데려다주고, 아내는 그 사이에 애들을 재우고, 난 돌아오는 길에 치킨을 사고, 집에 와서 노트북을 펴고 치킨을 뜯으며 함께 영화를 보면, 끝.


소윤이와 시윤이는 낮잠을 잔 아이들처럼 쌩쌩하고 신이 난 모습이었지만 소윤이 외숙모는 뭔가 지쳐 보였다.


"여보. 예지 심심해서 왔는데 여기 와서 진 다 빼고 간다"


다 그런 거다. 손주, 조카를 둔 직계 가족은 다 불나방이 되는 거다. 저기 가면 불태워야 한다는 걸 아는데도 자꾸 찾게 되는 건강한 어리석음이 샘솟는다. 강렬해 보였던 불빛이 좀 사그라드나 싶으면 누가 자꾸 새 불빛을 꺼내든다. (내년에는 롬이 불빛...)


소윤이와 시윤이는 감자탕의 등뼈 사이에 있는 물렁살을 쪽쪽 빨아먹듯 떠나는 순간까지 책을 읽어달라며 숙모의 남은 체력을 빼먹었다. 겨우(강제로) 오늘의 종료를 선언하고 나와 숙모는 집에서 나왔다. 지난주에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지난주에는 삼촌이 있었다는 점? 많이 다른 건 지난주는 엄마가 떠났고 오늘은 아빠가 떠났다는 점? 확연히 다른 건 지난주에는 떠나는 엄마를 보며 떠나갈 듯 울던 녀석들이 오늘은 떠나는 아빠를 보며 너그러이 손을 흔들었다는 점? 아빠 떠날 때도 좀 울고 그래 봐라, 짜식들아.


소윤이, 시윤이 외숙모를 무사히 집에 데려다주고 자연드림에 들러 아내가 부탁한 반찬거리를 사고 치킨 가게에 들러 미리 주문해 놓은 치킨을 찾고 빵 가게에 들러 아내를 위한 뺑오쇼콜라와 얼그레이 스콘을 사서 집에 돌아왔다.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나의 소리를 들었는지 카톡이 왔다.


[여봉. 난 조금만 있다 나갈게요. 셋팅 고고]


아내는 금방 나왔다. 아침부터 착실하게 준비한 덕분에 무사히 거사(오해 금지. 영화 시청)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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