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와 싸우는 가족

20.01.21(화)

by 어깨아빠

소윤이는 밤새 잠을 설쳤다. 막힌 코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었는지 내내 뒤척이고 징징대고 그랬다. 나랑 증상이 비슷했다. 신기하게 나도 소윤이랑 비슷하게 한 쪽 코는 아예 막히고 맑은 콧물이 줄줄 흘렀다. 괴롭기는 마찬가지지만 경험의 차이였다.


아내는 일어나자마자 소윤이를 데리고 소아과에 갔다. 일단 코는 보지 않아도 최악(?)의 상태라는 건 알겠는데 혹시라도 저번처럼 중이염으로 넘어갈까 봐 걱정하는 마음이었다.


"엄마아. 나두 가고 디퍼여어어어어엉"


시윤이는 자기도 따라가겠다며 떼를 썼다. 아내와 내가 번갈아 가며 좋은 말로 설득했지만 쉽게 굽히지 않았다.


"시여어엉. 더는(저는) 엄마가 더 좋아여어엉"


아니, 이 자식이 좋으면 좋은 거지 왜 비교를 해. 내가 지금 너한테 얼마나 열심을 쏟고 있는데 말이야. 잘 때 내치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 낮에도 그러겠다는 거야? 시윤이를 품에 불러서 귓속말을 했다.


"시윤아. 아빠가 핫초코 타 줄게"

"네?"

"핫초코"

"아, 시더여어어엉. 저는 그대도(그래도) 엄마당 가띠 가는 게 도아여어엉"


핫초코도 안 먹히다니. 내가 그런 존재였나. 정공법을 썼다.


"시윤아. 니가 아무리 떼쓰고 울어도 엄마랑 누나는 갈 거야. 그러니까 그만 떼써"


시윤이가 아직 어리지만 의외로 상황 판단을 한다. (우리 아들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애가 다 그렇다. 부모들이여 속지 마시라.) 시윤이는 정세를 읽었는지 금세 태세를 전환했다. 엄마와 누나를 기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기꺼이 보내줬다.


"아빠아. 꼬깜(곶감) 두데여엉"

"그래, 알았어. 곶감 줄게. 잠깐만"


시윤이는 곶감을 참 좋아한다. 열심히 곶감을 먹던 시윤이가 물었다.


"아빠아. 금데에(그런데) 그거늠 언데 둘 거에여엉?"

"뭐? 뭐 말하는 거야?"

"아니이. 아까아 아빠가 얘기한 거여엉"

"뭐?"

"아니이. 그거어어. 아빠가아 나함테 마햔 거어 이따나여엉. 그거여엉"

"뭐? 핫초코?"

"네에. 네에. 하또꼬. 언데 둘 거에여엉?"


곶감으로 대신하고 모른 척 넘어가려고 했는데 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시윤이에게 맛깔나는 핫초코를 한 잔 타서 대령했다. 시윤이는 1분도 안 돼서 다 마시고 컵을 반납했다. 엄마가 더 좋다던 시윤이는 엄마의 부재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 잘 웃고 잘 놀았다.


아내와 소윤이는 아침도 먹기 전에 병원에 간 거였다. 아내와 소윤이가 돌아오고 나서 아침상을 차렸다. 다행히 소윤이는 비염이 심하디 심할 뿐, 독감도 중이염도 일단은 아니라고 했다. 아내는 간 김에 독감 주사도 맞혔다고 했다.


가족의 아침을 챙겨 주고 난 준비를 하고 집에서 나왔다. 미술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잠시 505호 사모님이 놀러 와서 함께 점심도 먹고 그랬다고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의 전반적인 상태는 어땠냐는 나의 물음에 아내는 괜찮다고 답변했다. 막상 집에 가니 시윤이가 보지 않을 때 시윤이를 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고, 오른쪽 손을 들어 올리는 동작을 취하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단 한 마디의 유성 대화가 오가지 않았지만 알아차렸다.


'시윤이, 이 녀석이 또 힘들 게 했구나'


소윤이는 미열이 조금 있었다. 병원에서는 콧물이 가득 찬 것 말고는 이상이 없다고 한 걸로 보아 독감 주사 때문에 열이 나는 듯했다. 미열이었지만 상태는 바닥이었다. 하람이(505호 사모님 딸)랑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내내 누워 있기만 했다고 했다. 혼자 (쉬려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잠들기까지 했다.


미술 수업을 끝내고 집에 돌아갔을 때 모두 정상이 아니었다. 소윤이는 열 때문에, 아내는 졸음 때문에, 시윤이도 졸음 때문에. 집 안에 생기가 없었다.


"여붜. 나 쥐금 너무 줠려서 잠깐뫈 눌게"


아내는 혀가 꼬부라지는 발음으로 잠깐 눕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아내가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 눕자 소윤이도 따라 들어갔고, 시윤이도 마찬가지였다. 난 거실 소파에 앉아 다소 특별한 유형의 자유를 누렸다. 방에서 들리던 소윤이와 시윤이의 소리가 잠잠해졌다. 아마도 소윤이는 그냥 누워있을 테고 (이미 낮잠을 잤으니까) 시윤이는 잠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다. 만약 그렇다면 얼른 가서 시윤이를 깨워야 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고요함과 평화가 너무 달콤했으니까.


"어? 시윤아. 시윤아"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꺼내서 정신을 차리라고 하는 것처럼 다급하게 시윤이를 부르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급히 안방으로 들어갔다. 시윤이는 자고 있었고, 아내는 방금 막 깬 듯했다. 나도 거들어서 시윤이를 깨웠다. 시윤이는 엄청난 짜증과 함께 겨우겨우 잠에서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소윤이는 여전히, 아니 오히려 조금씩 더 쳐지고 있었다.


잠시 거실에 나왔던 소윤이는 다시 방에 들어가서 누웠다.


"소윤아. 많이 힘들어?"

"아니여. 그냥 피곤해서 그래여"


아내는 어젯밤에 내가 나갔다 왔다는 사실도 오늘 저녁을 먹으며 알았다.


"아, 그랬어? 마노아? 나도 가고 싶다"

"여보도 오늘 갔다 와. 애들은 안 자면 바로 나오고"


침대에 누워 있던 소윤이에게 가서 슬쩍 아빠랑 자면 안 되겠냐고 물었는데 다짜고짜 눈물을 흘렸다.


"여보. 오늘은 일단 여보가 재우기는 해야겠다. 대신에 안 자면 바로 나와 바로"


졸음을 완전히 떨쳐낸 시윤이는 입과 몸을 한시도 가만히 두지 않고 집안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소윤이는 얼마나 힘들었으면 책 읽는 것까지 마다할 정도였다. 정말 드문 일이었다. 얼른 들어가서 자고 싶다고 했다.


소윤이의 빠른 쾌유와 아내의 1분 1초라도 빠른 외출을 위해 취침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여보. 오늘은 애들 안 자면 바로 나와요. 알았죠?"


애들도 들으라고 일부러 큰 목소리로 아내에게 얘기했다.


안타깝게도 둘 다 금방 잠들지 않았다. 시윤이는 아까 잠깐 눈을 붙인 게 피로 해소에 큰 도움이 되었나 보다. 소윤이도 피곤하다더니 낮잠 잔 게 아직 유효했는지 쉽게 잠들지 못했고. 아내는 10분의 말미를 준 뒤 가차 없이 방에서 나왔다. 소윤이가 특히 서럽게 울었지만, 상황 자체는 받아들였다. 아내가 나오고 나서도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길래 방문을 열었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중얼거리던 시윤이가 화들짝 놀라 나를 쳐다보고는 급히 자기 자리에 가서 엎드렸다. 근엄한 목소리로 주의를 줬지만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엄청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애들을 재우는 데 힘을 쓴 아내는 다소 멍한 상태였다. 자꾸 소파에 들러붙으려고 하길래 내가 떠밀었다.


"얼른 나갔다 와. 잠깐이라도. 나가고 싶다며"


늦기는 했어도 기분을 환기시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좀 쉬다 오라고 내보냈더니 아내는 내 걱정이 됐는지 (자세한 사연은 밝힐 수 없지만) 뜬금없는 사랑(혹은 위로)의 카톡을 장문으로 보냈다. 돌아오는 길에는 위로의 선물이라며 치킨도 한 마리 튀겨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시윤이 태어난 지 1000일째 되는 날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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