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23(목)
오늘도 특별한 일 없이 한가로운 하루를 보냈다. 밥 (그것도 아침 겸 점심으로) 해 먹고 과일 좀 먹고 간식 좀 먹고.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었는데 이상하게 내 안에 뭔가 모를 답답함과 화가 농축되는 느낌이었다. 어제부터. 그 누구, 무엇도 원인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해결책도 없었다. 원인이 있어야 제거를 하니까. 그냥저냥 꾸역꾸역 시간을 보내기는 했는데 아내와 아이들에게 알게 모르게 까칠함과 무기력함으로 표가 나지 않았을까 싶다. 가뜩이나 집에만 있으니 더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오후에 명절 선물을 사기 위해 온 가족이 집을 나왔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방방 뛰며 흥분했다.
"아빠. 저 놀이터에서 그네 잠깐만 타도 돼여?"
질문은 형식일 뿐 이미 그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시윤이도 그 뒤를 따랐고. 날이 추워서 그렇게 많이 놀지는 못했다. 놀이터에서 놀기는 했어도 워낙 짧은 시간이었고 걸어서 10분 거리의 한살림에서 모든 선물을 다 샀기 때문에 외출의 목적이 너무 빨리 달성됐다.
"여보. 우리 이제 집에 가는 건가?"
"그러게"
아침 겸 점심이라고는 해도 아침에 가까웠기 때문에 점심을 거른 셈이었다. 애들이 배고프다고 막 난리를 친 건 아니었지만 아마 배가 고팠을 거다. 아내와 나도 엄청 배가 고팠다. 저녁을 제시간에 먹기에는 (저녁 시간까지 기다리기에는) 힘들었다. 아내는 이른 저녁을 제안했다. 일단 아내와 나는 김밥을 샀다. 집에 가서 라면을 끓여 함께 먹기로 했다. 애들은 집에 가서 간편 김밥(김, 밥, 씻은 김치, 계란, 시금치)을 싸 주기로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집에 가는 길에도 놀이터에 들러서 잠깐 놀았다.
"아빠. 놀이터에서 잠깐 놀아도 돼여?"
"안 돼. 너무 추워"
"별로 안 추워여"
"엄마, 아빠는 추워"
"아니, 나랑 시윤이는 놀이터에서 잠깐 놀고 엄마 아빠는 앉아서 쉬어여"
"그래도 가만히 있으면 춥지"
"그럼 놀이터를 걸으면서 산책을 해여"
"그럼 힘들잖아"
"아니져. 어차피 산책한다고 했으니까 그냥 동네를 걷는 거나 놀이터를 걷는 거나 마찬가지져"
"그래도. 소윤이는 분명히 엄마랑 아빠 쉬라고 했으면서 그네 밀어달라, 안아달라 부를 거잖아"
"아니에여. 안 그럴게여"
"아닐 거 같은데"
"진짜에여"
안 부를 리가 있나. 소윤이는 아직 그네를 혼자 타지 못한다.
"아빠. 그래도 내가 아빠 좀 쉬라고 한참 있다 부른 거다여? 알고 있어여?"
고오마압네. 춥지만 않았어도 좀 더 놀았을 거다. 문을 나서자마자 "아우 춥다"소리가 절로 나오는 정도의 날씨는 아니어도 계속 찬 바람을 맞다 보면 어느새 손발이 얼음장 같아지는, 가랑비에 옷 젖듯 추위에 젖는 날씨였다. 적당히 놀고 귀가를 통보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저녁을 준비했다. 아무리 간편 김밥이어도 은근히 손이 많이 갔다. 김치 씻고, 계란 부치고, 시금치 데쳐서 살짝 무치고. 애들 김밥 싸주고 아내와 나의 라면도 끓여서 식탁에 앉았다.
"아빠. 이게 뭐에여?"
"응?"
"점심이냐구여 저녁이냐구여"
"저녁이라고 봐야지"
"아빠아. 금데 왜 암 깜깜해여엉?"
"응. 이제 곧 깜깜해질 거야"
저녁 먹고 쉬는데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처가(파주)에 왔는데 시간이 되냐고. 일단 애들이 잘 시간으로 약속을 잡아놨다. 그렇게 거실에서 빈둥대고 있는데 소윤이가 나에게 물었다.
"아빠. 오늘 누구랑 잘 거에여?"
"음, 오늘? 아빠랑?"
그냥 장난으로 툭 던진 말이었다. 사실은 아내가 재울 생각이었다. 그 말을 들은 소윤이가 갑자기 매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요즘 아내와 나의 불만(?) 중에 하나는 소윤이가 울지 않아도 될 일에 울음으로 일관한다는 거다. 마치 울음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느낌이랄까. (실제로 울음으로 해결되는 건 없는데도 말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켜보니 울음은 더 깊어졌다. 뭐 내 마음이 조금 더 온전했다면 보다 너그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난 이런 일에 소윤이가 그렇게 쉽게 감정을 잃는 게 싫었다. (소윤이는 몰랐어도) 장난으로 시작했던 아빠와 함께 잔다는 말은 현실이 되었다. (사실 딸한테 뭐라 그럴 게 아니었다. 내 안의 감정도 다스리지 못하는 하루였다.)
누나와 아빠의 사태(?)를 감지한 시윤이는 아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엄청 이른 시간에 방에 들어갔다. 아내는 뜻밖의 수혜자였다. 내가 애들을 재우는 동안 잠깐 나가서 빵까지 사 왔다. 갑자기 주어진 밤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애들을 재우고 나오자마자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약 네 시간의 외출을 마치고 나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내의 라떼를 샀다. 얼음을 넣지 않은 아이스 라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