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28(화)
짐을 챙겨서 오전에 나왔다(나만). 물론 내 본분(아침 차리기, 설거지 등)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다 해 놓고. 아내는 자기도 애들을 데리고 어디라도 나가겠다고 했다. 장모님이 반찬을 해 놓으셨는데 그걸 가지러 갈 겸 파주에 갈 생각이라고 했다.
오후쯤 아내에게 연락을 해보니 파주는 포기하고 그냥 동네에나 나갈 거라고 했다. 장모님이랑 연락이 어긋나는 바람에 시간이 좀 늦어졌고, 늦은 시간에 멀리(파주가 멀리는 아니지만) 가자니 부담스럽다고 했다.
[킥보드는 무리겠지?]
[아마도]
사실 킥보드 태운다고 더 힘들어지거나 그러는 건 아닌데 위험 요소가 늘어난다. 아이들의 기동성이 향상되면 아내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속도가 그만큼 빨라지는 거니까. 우리 애들은 대체로 그러지 않는 편이긴 해도 사고는 늘 방심에서 비롯된다. 배부른 아내 혼자 킥보드 탄 망아지 같은 녀석들을 통제하는 건 생각보다 힘들지도 모른다. 고민될 때는 그냥 평범하게.
외출이라는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아내와 아이들은 아주 늦은 시간에 그야말로 잠깐 바람이나 쐬면서 장을 보러 나오는 느낌이었다. 아내는 나에게 휴대폰 케이블을 전해주러 잠시 내가 있던 카페에 들렀다. 잠시 들른 건데 소윤이와 시윤이는 겉옷을 벗고 자리를 잡았고 아내는 자기도 커피를 한 잔 마셔야겠다며 텀블러를 가지고 갔다. 아내는 오는 길에 산 치즈 치아바타와 크랜베리 식빵도 투척했다.
"아빠. 빵 주세여. 두 개 다 주세여"
"그래. 알았어"
"아빠. 더두여엉"
"응. 시윤이도 줄게"
아이들이 빵을 먹는 동안 난 슬며시 노트북과 공책을 정리해서 가방에 넣었다.
"여보. 왜 다 정리했어?"
"이제 가야지"
"왜? 우리 잠깐 있다 가려고 했는데. 여보는 더 있다 와도 돼. 진짜 그럴 생각 없었는데"
"아니야. 가야지"
소윤이와 시윤이는 식빵과 치아바타를 모두 먹었다. 남김없이. 아내는 치과 맛(치아를 연마할 때 나는 향과 맛)이 나는 이천햅쌀프라프치노인가 뭔가를 마셨다. 아내와 나는 저녁 메뉴를 고민했다. 집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반찬이나 재료가 마땅치 않았다. 일단 가는 길에 한살림에 들르기로 했다. 애들의 볶음밥에 들어갈 분쇄된 돼지고기를 샀다. (파, 마늘, 계란은 늘 똑같다. 추가로 뭐가 들어가느냐만 달라질 뿐.) 아내와 나는 라면을 먹기로 했다. 롬이를 생각하면 아내에게 라면은 먹이기 싫지만 한살림 라면은 그나마 조금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골랐다. (실제로 원재료의 차이가 많이 나기는 한다.)
아내는 많이 지쳐 보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애 둘을 데리고 나오는 건 역시 만만치 않은 일이었고 더군다나 시윤이는 졸리다는 이유로 시종일관 징징대는 바람에 아내의 몸과 마음은 기력을 잃었다.
"여보. 나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
"뭘 어째. 어떻게든 하지.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야"
말이라도 '그러게. 여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이렇게 해주면 좋았을 텐데 (평소에는 대부분 그런 식으로 말한다.) 오늘 유독 쌀쌀맞았다. 머리로는 '오늘 좀 힘들었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눈으로는 아내의 부른 배를 보며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원래 집에서 나갈 때, 막 들어왔을 때가 제일 힘든 법이니까.
애들 볶음밥을 먼저 해주고 아내와 나의 라면을 끓였다. 나름 정성을 들여 끓였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렸다. 나와 아내가 라면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았을 때는 소윤이만 남아서 밥을 먹고 있었다. 시윤이는 졸리다는 핑계로 아내의 도움을 좀 받은 탓에 금세 식사를 마쳤다.
땀을 뻘뻘 흘리며 면발 흡입에 열중하고 있는데 혼자 놀던 시윤이가 얘기했다.
"아빠아. 똥 마뎌워여어엉"
"하아. 그래. 이리 와 봐"
시윤이의 바지와 팬티를 내리고 (이동식) 아기 변기에 앉혀주고 다시 식탁에 앉았다.
"시윤아. 다 싸면 얘기해"
면발 조금과 계란만 남은 상황이었다. 꼬마 김밥도 함께 먹고 있었다. 어떻게든 시윤이의 거사가 완료되기 전에 나의 식사를 마치기 위해 속도를 올렸다. 라면을 반으로 쪼개서 반은 입에 넣고 나머지 반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아빠아. 다 따떠여어엉"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어떻게든 입에 있는 걸 넘기고 남은 걸 넣으려고 했지만 그 짧은 시간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시윤이가 혼자 일어나다가 변기를 넘어뜨리기라도 하면(시윤이는 화장실이 아닌 거실에서 일을 보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변기에 오래 앉아 있는 거 싫어하는 놈한테 아무 이유도 없이 더 앉아 있으라고 하는 건 너무 비인격적인 육아가 아닌가, 그대로 가만히 두면 냄새가 확산될 테고 그럼 아내도 영향을 받을 텐데'
남은 건 포기하고 시윤이에게 갔다. '거의' 다 먹은 거지, '다' 먹은 건 아니었다. 매우 불쾌했다. 왜 하필 지금. 시윤이의 장이 원망스러웠다. 왜 꼭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뭐 좀 하려고 하면 똥을 싸는 건가. 아직 직접 배변 초보인 시윤이에게 과도한 찬사와 칭찬을 선사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주 무미건조하게
"시윤아. 잘 했어. 다음에도 이렇게 해"
라고 얘기했을 뿐이다. 시윤이도 웃지 않고 대답만 했다.
시윤이 엉덩이 닦아주고, 아기 변기에 있는 잔해를 어른 변기에 톡 떨어뜨린 뒤 아기 변기에 묻은 잔해도 씻어내고. 모든 공정을 마치고 났더니 남은 라면과 김밥을 먹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났다.
"에이"
내 그릇을 식탁에서 거둬 싱크대로 처넣었다. 아내는 나에게 특별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눈빛으로 안쓰러움과 미안함을 건넸다.
오늘도 이른 시간에 애들을 재웠다. 워낙 빠른 시간이라 아내는 나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내도 많이 피곤했는지 함께 잠들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고 잠에서 깨서 거실로 나왔다.
아내는 한참 자유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방에 들어가서 누웠다. 이때 소윤이와 시윤이도 깨서 물도 마시고 오줌도 싸고 그랬다. 그렇게 평화롭게 깊은 밤을 보내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시윤이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치 어디 부딪혔을 때 아파서 우는 것처럼 격앙된 울음이었다. 급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내와 내가 동시에 물었다.
"시윤아. 왜 그래? 왜? 왜 울어?"
난 그때까지만 해도 무서운 꿈을 꾸다 깼나 싶었다. 얼른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윤이가 토하기 시작했다. 레미콘에서 시멘트가 쏟아지는 딱 그런 느낌으로 아주 많이. 허여멀건한 무언가를 많이 뱉어냈다. 밥이었다. 이불 위로 한가득 쏟아낸 시윤이는 자기도 놀랐는지 더 크고 매섭게 울어댔다.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일단 한차례의 구토가 끝난 뒤 화장실로 데리고 갔다. 입은 물론이고 코를 통해서도 토가 나왔다.
"시윤아. 괜찮아?"
"아니여어. 힘드여여어"
"어디가 힘들어?"
"배가 아파여어어"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 알기는 어려웠다. 또 토할 거 같냐는 물음에 아니라고 답하길래 일단 소파에 앉아서 좀 안아줬다. 토가 묻은 옷도 갈아입히고. 아내는 토사물을 처리했다. 이불도 다 걷어내고. 아닌 밤중에 생난리였다. 일단 간단한 조치만 하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시윤아. 혹시 또 토하고 싶으면 엄마나 아빠한테 얘기해. 알았지?"
"네"
"시윤이가 문 열고 나와서 변기에 토 해도 되고"
"네"
방문을 닫고 나와서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한 20분쯤 지났을까. 다시 아내와 시윤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급히 문을 열었더니 시윤이가 또 울면서 토할 거 같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급히 화장실로 데리고 갔다. 아까에 비하면 양도 적고 내용물도 거의 없었다. 시윤이는 도무지 토하는 상황이 어색한지 계속 서럽게 울었다. 시윤이는 토한 적이 별로 없기는 하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아주 어렸을 때도 시윤이는 분유나 모유를 먹고 게워낸 적이 별로 없다. 소윤이는 반대였고. 시윤이는 그 느낌이 너무 싫고 무서운지 아주 서럽게 울었다. 열이 나거나 설사를 하면 장염을 의심해 볼 텐데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토하기만 했다.
다행히 그 뒤로는 깨지 않았다. [네 살 아이 구토, 열없는 구토] 이런 걸 검색했다. 아내와 내가 추측하기로는 졸린 상태에서 너무 많이 먹은 탓에 좀 체했나 싶었다. 카페에서 빵도 많이 먹고. 단순 소화불량을 의심했다. (혹은 바랐다.) 손, 발이 차다거나 열이 난다거나, 기운 없이 축축 처진다거나 하는 증상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동안 내가 너무 교만했나. 애들이 아무 문제없이 잘 크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했나. 애들한테 너무 날카로웠나. 감사가 결핍된 하루하루를 보냈나.
자려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시윤이의 머리부터 발까지 구석구석 매만졌다. 이마, 목덜미, 겨드랑이가 뜨겁지는 않은지, 손과 발이 차갑지는 않은지, 맥박이 너무 빠르지는 않은지. 볼을 쓰다듬으니 귀찮다는 듯 자세를 바꾸는 게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거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