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22(수)
소윤이는 아직 열이 조금 있었지만 어제보다는 훨씬 정상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잘 웃고 장난도 잘 치고. 완전히 정상일 때에 비하면 뭔가 더 차분하고 순한 느낌이 완연하긴 했다.
아내는 오전에 장모님에게서 만나서 점심을 함께 먹자며 연락이 왔다고 했다. 아내와 애들은 장모님을 만나러 가고 난 집에 홀로 남았다. 아내와 아이들이 나가면 나도 곧바로 나가서 잠깐 카페라도 가려고 했다. 막상 아무도 없는 고요와 적막이 내 것이 되니 그게 왜 그렇게 달콤한지. 소파에 앉아서 한참이나 '홀로의 즐거움'을 만끽(그래봐야 무의미한 휴대폰질)하다가 뒤늦게 집에서 나왔다.
아내는 나가기 전에도 나 혼자 집에 두고 가려니 발길이 안 떨어진다더니 가서도 자기만(애들과) 나와 있으니 영 어색하다는 얘기를 했다.
장모님과 시간을 보낸 아내와 아이들은 집에 들어가는 길에 카페에 있던 나를 태워서 들어갔다. 시윤이는 낮잠을 안 잔 데다가 차량 탑승 시간이 10분을 넘어갔기 때문에 매우 피곤한 상태였다. 아내의 말을 빌리자면 온갖 생쇼(운전하느라 다른 동작은 못하고 오로지 목소리로만 이루어지는)를 하며 겨우겨우 잠드는 걸 막았다고 했다. 시윤이는 매우 시무룩한(졸린) 표정으로 날 힘없이 쳐다봤다.
사실 난 소윤이부터 살폈다. 어쨌든 이마가 조금 뜨끈한 상태로 나갔는데 혹시 더 심해지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됐다. 다행히 소윤이는 비슷했다. 열은 조금 있었지만 오히려 아침보다 멀쩡해 보이기도 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장모님과 샤브샤브를 먹었다. 지난 토요일, 웬만한 어른 못지않은 월남쌈 먹부림을 선보였던 소윤이가 오늘은 영 지지부진했다고 아내가 말해줬다.
"엄마. 월남쌈 먹은 지 얼마 안 돼서 오늘은 별로 맛이 없어여"
라는 말도 했다고 했다. 게다가 몸도 최상이 아니라 많이 피곤해 하기도 했고. 시윤이도 비슷했다고 했다. 졸릴 때 견디지 못하는 두 가지 상황이 있는데 하나가 밥 먹는 거고, 나머지 하나가 차 타는 거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졸음이 쏟아지나 보다. 오늘도 밥 먹으라고 앉혀 놨더니
"너무 졸려서 힘드여어어"
라고 얘기하며 숟가락질이 더뎠다고 했다. 그러던 소윤이와 시윤이가 갑자기 기운을 차리는 순간이 있었다.
"그럼 너네 힘들어서 디저트는 못 먹겠네?"
"아니에여. 그건 먹을 수 있어여"
"아니에여어엉. 먹으꺼에여어엉"
샐러드 바에 마련된 팥빙수, 아이스크림 등을 말하는 거였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갑자기 생기를 찾더니 눈이 똥그래졌다고 했다. 역시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다.
별로 열심을 내지는 않았어도 어쨌든 늦은 시간에 점심을 먹은 거라 평소처럼 저녁을 차려주면 잘 먹을 거 같지는 않았다. 밥은 생략하고 간단히 요기만 할 정도의 저녁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지난번에 장모님이 주신, 냉동실에 있던 감자떡을 쪘다. 아내도 저녁 생각이 없다길래 아내가 먹을 것도 함께 쪘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각각 5개씩을 줬다. 송편보다 아주 조금 큰 크기였다. 양 자체로는 그리 많은 건 아니었다. 다만, 나도 맛을 봤지만 호불호가 있을지도 모르는 맛이었다. 일단 감자피 특유의 '지나친' 쫄깃함이 있었고 그 속을 채우고 있는 소가 하얀 밤가루(?)였다. (개인적으로 송편을 먹을 때 가장 선호하지 않는 하얀 가루.) 입에 넣자마자
'아, 이건 애들의 맛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게 왔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 한 입, 두 입까지는 애써 (맛있는) 연기를 하던 시윤이가 먼저 고백을 했다.
"아빠. 맛이 없더여어엉"
몇 번이나 맛이 없냐고 물었고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그의 행동은 반대였다. 손에 쥐고만 있을 뿐 줄어들지 않았다. 시윤이는 몸의 반응이 제법 솔직하게 나오는 편이다. 정말 맛이 있으면 그렇게 손에 쥐고만 있지 못한다. 그에 비해 소윤이는 약간 연기가 가능한데 오늘도 그랬다. 표정이나 악관절의 움직임을 보면 맛이 없는 게 분명했지만 소윤이는 어떻게든 먹으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좀 먹기도 했고. 그렇지만 소윤이고 결국 두 개 정도 남기고 손을 들었다.
"엄마. 이제 그만 먹을래여"
다른 거 다 떠나서 엄청 폭발적으로 맛있는 맛이 아니었다. 내 취향으로는 절편이나 가래떡이 수백만 배는 맛있었다. (애들도 내 입맛이랑 비슷한가 보다.) 아무튼 다음부터 애들한테 감자떡은 안 주기로 결심했다.
아내는 여느 날처럼 해가 지자 급격히 피곤해 했다. 오늘은 아예 애들 재울 때 작정하고 들어갔다.
"여보. 내일 봐"
(참, 시윤이의 배변 훈련은 순항 중이다. (사실 배변 훈련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렀다.) 웬만한 상황에는 소변이고 대변이고 분출하기 전에 분명히 의사를 밝힌다. 다만 훈육, 과 흥분, 깊은 슬픔 등 뭔가 변의를 덮을만한 상황에 처했을 때 가끔 실수를 하기도 한다. 시윤이의 반응을 보면 일부러 참은 건 아닌 듯하다. 기저귀를 차고 있다고 착각을 했거나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발사를 했거나 그랬던 거 같다. 그래도 고마운 건 아직은 혼자 서서, 다시 말해 자기가 입은 옷 이외의 다른 의류나 침구류를 오염시키지 않을만한 곳에서 실수를 해줬다. 이불 빨래를 선사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