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건 다 조심해도 축구는 괜찮아

20.02.02(주일)

by 어깨아빠

우한 폐렴의 기세가 잠잠해지기는커녕 더 심해지는 덕분에 우리도 외부 활동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오늘은 소윤이와 시윤이도 새싹꿈나무 예배에 보내지 않고 어른 예배를 함께 드렸다. 애들도 애들이지만 임산부인데다가 천식까지 가진 아내가 더 걱정이다.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라고 말은 조심할 건 최대한 조심하는 게 도리니까.


예배드리고 나서 밥도 교회에서 안 먹으려다가 먹었다. 친구(와 그의 아내)가 오랜만에 (십수 년 만에) 교회에 와서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우린 폐렴 때문에 교회에서 밥 안 먹으려고. 너넨 먹으려면 먹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조심은 하되 때와 장소를 가리는 것 또한 도리니까.


밥 먹고 나서 교회 앞 카페에 가서 커피도 한 잔씩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이모와 삼촌을 매우 오래전부터 알고 봤던 것 마냥 살갑게 굴었다. 정말 가까운 사이, 이를테면 직계 가족이나 (소윤이의 탄생부터 함께해서 소윤이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주는) 울산의 이모들이나 아내의 정말 친한 친구쯤 되면 사실 별로 신경을 안 쓴다. 소윤이가 좀 귀찮게 하고 성가시게 해도 기꺼이 기쁨으로 받아주니까. 그렇지 않은 사이는 늘 조심스럽다. 혹시나 귀찮지는 않은지 부담스러워하는 건 아닌지 살피게 된다. 소윤이가 또 워낙 들이대는 유형이라. (시윤이는 걱정을 안 한다. 말 한마디, 몸짓 하나로 마음을 뺏는 시기를 보내고 있기 때문에.) 또 내 친구야 괜찮지만 친구의 아내는 또 다르니까. 아무튼, 소윤이와 시윤이는 내가 이런 신경을 쓸 정도로 삼촌과 이모를 반기고 좋아했다.


오늘은 목장 모임이 없었다. 카페에서 나와서 집으로 갔다. 소윤이는 금요일부터 벼르던 게 있었다. 아내가 대학 친구들을 만나고 오면서 가지고 온 게 하나 있었는데, [자연놀이]라는 이름을 가진 일종의 만들기라고 해야 되나. 솔방울, 잣방울, 나뭇가지, 찰흙을 이용해서 다람쥐나 사자, 고슴도치 같은 동물을 만드는 거였다. 금요일은 시간이 없었고, 어제도 어쩌다 보니 마찬가지였다. 소윤이답게 아침부터 수시로 물어봤다.


"엄마. 자연놀이 하는 거 잊지 않았져?"

"응. 이따 교회 갔다 와서 하자"


"엄마. 자연놀이 언제 할 거에여?"

"이따 교회 갔다 와서 한다고 했잖아"

"엄마. 자연놀이는 교회에 갔다 오자마자 할 거에여?"

"어. 소윤아. 이제 그만 물어봐. 엄마가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아, 자연놀이 얼마나 재밌을까"


아, 강소윤의 이 능청스러움. 얘기하지 말라고 하면 혼잣말이지만 모두 들을 수 있는 큰 목소리로 얘기한다.


집에 가자마자 자연놀이를 개봉했다. 아내도 나도 모두 함께 했다. 기왕 같이 하는 거 대충대충 하지 않고 아주 성의 있게. 소윤이가 딱 좋아할 만한 놀잇감이었다. 만들고 붙이고 끼우고. 시윤이는 찰흙을 손으로 몇 번 주무르고는 말했다.


"아빠아. 이것돔 보데여. 멋디뎌어?"

"우와. 이게 뭐야?"

"다다에여. 다다(사자)"

"오. 무서운데"

"으아아아"


시윤아. 사실 그거 그냥 덩어리였어.


"여보. 몇 시에 가?"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

"표정이 밝네?"

"아니야. 밝긴 무슨"


지난주에 명절이라 한 주 쉬고 2주 만에 가는 축구였다. 나라에 역병이 돌아서 외출을 자제하는 마당에 축구는 무슨 축구란 말인가. 라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그냥 집에 있을까' 상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혔다. '운동은 괜찮을 거야. 같이 밥 먹는 게 제일 위험하지 뭐'라는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옷을 갈아입었다.


"여보. 갈게"

"응. 여보"


아내는 장난스럽게 가지 말라며 붙잡기도 했다. 장난이었지만 진심을 잠재우기 위한 장난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알아도 가야 했다. 난 축구인이니까.


축구를 마치고 아내에게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았다. 어디 간다고 하지는 않았고 '505호에 놀러 갔나', '장인어른이랑 장모님이 오셨나' 추측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 문을 여는 순간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어디야?"

"나? 집?"

"집이라고?"

"응. 방금 막 들어왔...아, 여보 어디 갔구나. 어디야?"

"나 방이야. 애들이랑 막 들어왔어. 그럼 여보도 문 열고 인사해"


집이 너무 깨끗했다. 방금 전까지 애 둘이 거닐던 거실이라는 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당연히 없는 줄 알았다. 방 문을 열었더니 아내와 애들은 책을 읽으려던 참이었다.


"소윤아. 시윤아. 잘 자. 아빠한테 오지는 말고. 아빠는 오염됐어"

"오염이 뭐에여?"

"아. 더럽다고"

"왜여?"

"밖에서 축구하고 왔으니까"


원거리 뽀뽀와 인사를 마친 뒤 문을 닫고 나왔다.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아내는 저녁 계획을 전해줬다.


"아, 원래 여보한테 부대찌개 사 오라고 하려고 그랬는데"

"아, 부대찌개? 사 올게"

"그럴래?"

"응. 주소 보내줘"


씻고 나서 부대찌개를 사러 다시 나갔다. 다시 집에 왔을 때도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봉봉?]

[소윤이 잠들었는지 몰라서 안 나감]


아내는 잠시 후 나왔다. 부대찌개를 사 왔는데 집에 밥이 얼마 안 남았다고 했다. 다시 나갔다. 편의점에 가서 햇반을 사 왔다.


폭풍 같은, 뒤를 보지 않는, 용맹스러운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아내도 나도 배부르게 잘 먹었다. 아내는 저녁 식사가 끝나자마자 이렇게 얘기했다.


"어머. 마침 딱 시간이 됐네?"

"뭐? 사랑의 불시착?"

"어. 여보 나 좀 그래? 바로 드라마 보면?"

"아니. 봐. 괜찮아"


나도 너무 배가 불러서 드라마를 보는 아내 옆에 앉아 휴대폰 게임을 하며 소화를 시켰다.


한 40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방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시윤이가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엄마아아아. 으아아아"

"시윤아. 왜"

"엄마야....앙. 엄마가아....없떠더여...."


시윤이는 목멘 소리로 힘겹게 입을 뗐다. 아내와 나는 시윤이 뒤통수 뒤에서 서로 마주 보며 소리 없이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입모양으로 이렇게 얘기했다.


'너무 귀여워'


표독스러움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보기 힘든 순하고 불쌍한 얼굴로 울음을 머금고 엄마를 찾는 네 살 아들의 모습이 내년에도, 10년 후에도 생생했으면 좋겠다.


시윤이는 엄마도 함께 들어가서 자야 한다고 했다. 아내는 이미 녹았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아내는 시윤이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휴대폰은 물론이고 이어폰까지 챙겨서. 아직 드라마가 끝나기 전이었다.


사실 난 아내가 다시 나올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드라마를 다 보기는 한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내는 그게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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