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16(화)
아무리 조심해서 최대한 소음이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거실로 빠져나온다고 해도 이미 나의 알람 소리에 몸을 뒤척이기 시작한 소윤이 시윤이는 나의 탈출을 모른 체 하지 않는다. 먼저 나온 소윤이가 거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빠. 집이 그대로네"
어제의 난장판을 치우지 않았으니 여전히 난장판이었고 소윤이는 '그대로'라고 표현했다.
"어. 그러게"
"아빠 어제 시간이 없었어?"
"어어. 그러게. 아빠가 시간이 없었어"
소윤이가 다그치듯 물은 건 아니다. 오히려 엄청 밝고 즐겁게 그냥 일상의 대화를 나누듯 얘기했다. 무언의 압박으로 느껴졌던 기분 탓일까. 오늘은 무사히 자전거로 출근했다. 아내는 한살림에서 하는 요리교실(?)에 505호 사모님과 함께 간다고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강된장 하고 우엉잡채를 만들었는데 다시 가기는 힘들 것 같다고 했다. 요리 선생님이 하는 걸 그냥 지켜보면 되지만 소윤이 시윤이를 데리고는 그것 마저도 굉장히 벅찬 일이었다며. 그래도 요즘은 뭔가 아내나 소윤이나 극으로 치닫는 상황이 많이 줄어든 것 같다. (아니면 아내가 별로 말을 안 하는 건가?) 시윤이야 극으로 치달아봤자 세차게 우는 것 말고는 하는 게 없으니 크게 문제가 안되지만(이라고 쓰고 막상 크게 울면 그렇게 듣기 싫을 수가 없다) 소윤이는 다르다. 이제 완전한 하나의 인격체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면 서로 감정을 건드리는 경우도 많다. 나의 의도적인 연결인지는 몰라도 어린이집을 다니지 않고나서부터 소윤이의 전반적인 정서는 훨씬 평탄해졌고 덕분에 아내와의 하루도 큰 굴곡이 많이 없어졌다. 무려 낮잠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음에도 말이다. 요리교실 마치고는 마침 시윤이가 잠들어서 다 함께 (같은 동에 사는 또 다른 아기 엄마까지 총 세 명이서) 카페도 갔다.
일하다가 문득
'오늘은 아예 자전거 타고 집에 가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처음 생각한 건 아니었고 계속 마음에 두고 있기는 했는데 네이버나 다음에 검색해보면 2시간이 걸리는 걸로 나왔다.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한 번 불길이 일어난 마음은 금세 자신감으로 가득 찼다. 5시쯤 출발했다. 열심히 쉬지 않고 밟으면 1시간 30분 만에 도착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자신감을 안고. 기분이 좋았다. 논밭 사이를 달릴 때는 리틀포레스트의 주인공처럼 자연과 물아일체가 된 느낌이었다. 날씨도 너무 좋고. 경치도 너무 좋고. 평소에는 인도와 섞여있는 길을 달리려니 울퉁불퉁하고 사람도 피해야 하고 불편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잘 포장된 자전거 길을 달리니
타는 맛도 나고.
'캬아 이 맛에 자전거 타는구나'
하는 짜릿함이 있었다. 한 1시간 정도까지는.
한참을 달리고 지도를 확인했는데
'응? 아직 여기라고?'
혹시 GPS가 잘못되었나 휴대폰을 들고 열심히 팔자를 그려댔지만 나의 위치는 그대로였다. (예전에 아이폰으로 지도를 볼 때 GPS를 잘 못 잡으면 휴대폰을 들고 팔자를 그렸었다. 요즘에도 유효한지는 모르겠지만)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지도를 들여다보며 어디쯤 왔나를 확인했다. 1시간 30분쯤 되었을 때는
'도대체 언제 도착인가'
하는 심정이었다. 결국 2시간 만에 집에 도착했다. 35km, 2시간. 자주 할 짓은 아니다. 그냥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정말 격렬하게 운동이 하고 싶을 때 그럴 때나 한 번씩 할만한 일이다. 집에 오니 아무도 없었다.
"여보. 어디야?"
"어. 나 남옥 언니(505호 사모님)네 집. 집에 왔어?"
"어"
"알았어 이제 올라갈게"
잠시 후 아내와 아이들이 집에 왔다.
"아빠아아아"
"으빠"
언제나 반가운 나를 향한 아이들의 질주.
"여보. 나 파주에서 자전거 타고 왔어"
"어? 자전거로만?"
"응"
"대박. 안 힘들어?"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아"
아내는 소윤이 시윤이를 차례대로 씻겼고 그동안 나는 계란밥을 만들었다. 밥이 좀 부족해 보였다. 1.3인분 정도 되는 양을 두 개로 나눠 담았다. 아내는 시윤이를 먼저 씻겨서 내보냈고 소윤이가 씻는 동안 시윤이를 앉혀 놓고 밥을 먹였다. 처음에는 엄마랑 먹겠다며 화장실 문을 열려고(이제 키가 커서 손잡이에 손이 닿는다) 안간힘을 쓰면서 울었다.
"시윤이. 밥 안 먹어? 치운다?"
하고 싱크대 쪽으로 밥그릇을 들고 가니 입술을 쭉 내밀고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식탁 쪽으로 와서 앉겠다는 몸짓을 했다. 이제 정말 소통이 된다. 막상 앉으니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배도 고픈 데다가 밥 양도 평소보다 엄청 적고 소윤이가 샤워를 다 마치기도 전에 밥을 다 먹었다. 소윤이도 샤워를 끝내고 식탁에 앉았다. 평소 먹는 양을 감안해 시윤이에게 더 많은 양을 줬고 그만큼 소윤이 밥은 줄어들었다. 한 대여섯 숟가락 먹으니 끝이었다.
"아빠. 나 오늘은 엄청 잘 먹었지여?"
"우와 그러게"
소윤아 사실 원래 밥이 별로 없었어.
아주 화기애애하고 웃음이 끊이지 않다가 소윤이가 자기 전에 읽을 책을 골라오면서 분위기는 급속도로 냉각됐다.
"아빠 오늘은 몇 권 읽어줄 거에여?"
"한 권"
"한 권 너무 조금인데"
"그래도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알았어여"
역시나 세 권을 골라왔다.
"아빠 이거 세 개가 너무 읽고 싶은데여"
그동안은 애교로 넘어갔는데 뭔가 소윤이가 자꾸 이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더 이상 약속을 약속으로 생각하지 않는 그런 느낌이었다. 뭐라 정확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상대하다 보면 뭔가 제동을 걸어야 할 때라는 느낌이 올 때가 있다. 물론 잘못짚을 때도 많지만.
"소윤아 오늘은 안 돼. 오늘은 한 권이야"
"아빠아. 세 개가 너무 읽고 싶어여어어"
"한 권으로 약속했잖아. 자꾸 이렇게 어기면 어떻게 해"
소윤이는 짜증을 내고 말았다. 책을 매트리스 위에 내던지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거다. 당연히 엄청 따끔하게 혼났고 소윤이는 서럽게, 아주 서럽게 울었다. 울음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오늘은 굉장히 서러운 울음이었다. 한참을 울었다. 먼저 아내가 소윤이의 마음을 좀 풀어주고 나중에는 나도 가세했다.
"소윤아. 많이 서러웠어?"
"응(훌쩍훌쩍)"
"아빠가 소윤이 미워서 그런 건 아니야. 소윤이가 나쁜 행동을 하면 아빠는 그걸 고쳐줘야 하는 의무가 있어. 아빠가 고쳐주지 않으면 소윤이가 다른 친구들이나 어른들한테도 이렇게 행동하게 되잖아. 엄마 아빠는 소윤이를 이해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해 못할 수도 있거든. 아빠도 소윤이 혼내면 굉장히 슬퍼. 그래도 나쁜 행동을 하면 혼내야 돼. 소윤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쁜 행동을 해서 소윤이를 안 좋게 생각하면 그게 더 슬프니까. 알았지? 아빠는 소윤이 미워해서 그런 거 아니니까 그만 울고"
"응(훌쩍훌쩍)"
"아빠가 토닥토닥해줄까?"
"해줘"
경험상 토닥토닥을 수용했다는 건 나의 말을 받아들였다는 거다.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그러고 나서는 금방 잠들었다. 자전거를 2시간이나 탔더니 더 이상 아무 운동도 할 수가 없었다.
"여보. 헬스장 갔다 와"
"여보 먼저 갔다 와"
"난 오늘 못 가"
아내는 배가 고프니 일단 뭐라도 먹고 가야겠다며 낮에 한살림에서 가지고 온 강된장과 우엉잡채, 집에 있던 쌈을 반찬으로 꺼내 밥을 먹었다. 굉장히 맛있게 잘 먹었다. 평소에 대충 애들이 남긴 걸로 때우거나 있는 반찬 한 두 개 꺼내서 먹는 것에 비해 굉장히 잘 갖춰서 열심히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운동하러 갈 준비를 하던 아내가 말했다.
"후우. 여보 너무 배가 부른데? 너무 많이 먹었나 봐"
아내는 집을 나서는 순간에도 배가 너무 부르다는 말을 했다. 헬스장 마감 1시간 전쯤 갔으니 금방 돌아와야 할 아내가 기별이 없었다. 어디 들렀다 오나 하고 할 일을 하고 있는데 카톡이 왔다.
[곧 집에 감, 운동하고 군것질 좀 했음]
?
분명히 배가 부르다고 했는데? 아니 배가 터질 것 같다고 했지.
[운동하고 나니까 뭔가 먹고 싶던데]
아내는 자기도 민망했는지 무수히 많은 ㅋㅋㅋ 를 함께 찍어 보냈다. 뭘 먹었냐는 나의 물음에
[빵 같은 거 먹고 싶어서 좀 돌아보다가]
까지만 카톡이 왔고 바로 뒤 아내가 집으로 돌아왔다. 빵 같은 걸 먹고 싶었던 아내는 과연 무엇을 먹었을까?
정답은 붕어싸만코. 그 시간에 문 연 빵집도 없고 그래서 붕어싸만코로 대신했다는데 뭔가 꿩 대신 닭으로 적합한 것 같기도 하고. 아내가 그리 힘들어하지 않는 걸 보니 운동도 그리 강도 있게 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먹이를 찾아 초원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어슬렁어슬렁, 설렁설렁했을 게 분명하다.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던 아내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여보"
"어어어. 나 졸았어?"
아니. 잤어.
"아. 나 왜 이렇게 졸리지?"
"응, 배불러서 소화시키느라"
결국 아내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중간에 먼저 들어가 잠을 청했다. 아내는 자기도 어이가 없는지 계속 실소를 내뱉었다.
필라테스 할 때는 일주일에 한 번이라 한 번만 먹었는데 헬스는 갈 때마다 뭔가 먹는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