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17(수)
아내는 내가 출근할 준비를 모두 마쳤을 때까지 일어나지 않고 자고 있었다.
아침을 차려 달라는 것도 아니고.(아침에는 계란과 고구마를 주로 먹는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달걀이랑 고구마 좀 챙겨주고 커피나 한 잔 타 달라는 건데 그것도 못해주나. 내가 지금 누구 좋으라고 아침마다 자전거를 끌고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이런 생각들이 겹치며 뭔가 불쾌해졌다.
"여보오. 나 간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는 아내를 향해 소리쳤다. 직감적으로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아내는 벌떡 일어나서 현관으로 달려왔다.
"여보. 화났어?"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지하철에 앉아 있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이때는 진짜 괜찮았다. 지하철에 앉아서 할 게 없으니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스스로의 옹졸함에 살짝 민망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거기에 아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미안함을 표시하면 민망함은 배가 된다. 아내는 목장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오늘도 나의 자전거 출근의 유산인 차를 타고 편리하게 이동했다. 목장 모임 때는 수월했는데 목장 모임 마치고 밖에서 밥 먹을 때는 힘들었다고 전했다. 하긴 내가 같이 있을 때도 애 둘 데리고 밥 먹으려면 요즘은 혼이 나갈 지경인데. 혼자서 둘을 데리고 먹으려면 만만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벅찬 일일 거다. 아무리 다른 집사님들이 계시다고 해도 진짜 적극적으로 나서서 능숙하게 돌봐주시는 분이 계시지 않는 한 아내 홀로 싸우는 싸움이다.
목장 모임 마치고 나서는 친정에 올라온 수정이(아내 베프. 채은이 엄마. 포항 거주)를 만나러 수정이 친정집에 간다고 했다. 이때 소윤이와 작은 실랑이가 있었는데 아내는 소윤이를 재우려고 시도했고 소윤이는 아마 그러기 싫었겠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던 건 아내의 협박 때문이었다.
"소윤아. 지금 좀 자. 안 그러면 엄마 수정이 이모네 안 가고 집에 갈 거야"
눈을 감고 있기는 했지만 잠들지 않는 소윤이에게 아내는 다시 엄포를 놓았다.
"거 봐. 소윤이 잔다고 하고 안 자네"
"엄마. 눈을 감고 있어도 잠이 안 오는데 그걸 뭐라고 하면 안 되지이"
논리상 아내가 패배했다. 소윤이는 솔직했고, 당당했다. 정말 자려고 했으나 잠이 오지 않아서 안 잔다는데 그걸 뭐 어쩌겠나. 소윤이의 또랑또랑한 반박에 웃음이 터진 아내는 결국 포기하고 수정이네 집으로 향했다.
[여보. 그럼 이따가 이 쪽으로 올래? 아니면 내가 그쪽으로 갈까?]
수정이네 친정이 탄현이라 사무실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자전거로 갈 만한 거리인가 봤더니 그건 아니었다. 한 시간은 걸릴 거리였다.
[여보. 자전거로는 못 가겠다]
[그럼 그냥 대화역에서 만날까?]
[그럴까 그럼? 그러고 저녁까지 먹고 들어갈까? 마트 같은 데서 시간 좀 보내다가]
[그것도 좋지]
어설프게 복귀하다 애매하게 잠드는 걸 방지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어제 2시간 동안 장거리 퇴근을 한 장점 중에 하나는 대화역까지 가는 게 껌으로 느껴진다는 거다. 2시간도 탔는데 30분이 별거냐 이런 마음이랄까. 순식간에 대화역에 도착해서 아내를 기다렸다. 소윤이가 어린이집을 다니지 않고 나서부터 생긴 변화가 또 하나 있다. 어린이집 다닐 때는 내가 퇴근해도 자기 하는 거 하느라 바빴는데 요즘은 뭘 하고 있다가도 웬만하면 나한테 달려와서 안긴다거나 오늘처럼 밖에서 만났을 때는 정말 반갑게 맞아준다. 물론 그 옆에 앉은 시윤이도 아빠 아빠를 떠나가라 불러대며 나를 띄워준다. 이 맛에 퇴근하는 거지.
근처에 있는 킨텍스 이마트 타운으로 갔다. 트레이더스도 한 바퀴 돌고 이마트도 한 바퀴 돌고. 그런 다음 푸드코트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나는 분명 뭘 '먹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나에게 물었다.
"여보는 먹고 싶은 거 없어?"
"음. 글쎄"
애들만 먹일 생각이었는데 아내의 질문 한 방에 본능이 대답했다. 그러고는 뭐에 홀린 듯 일본 라면을 골랐다. 애들은 뚝배기 불고기. 아내는 수정이네서 군것질 많이 해서 배부르다고 안 먹는다고 했다. 시윤이는 뭐가 못마땅한지 식사 시작한 지 5분도 안돼서 땡깡을 피우고 식판을 뒤집어엎었다.
'으. 좀만 더 지나 봐라. 얄짤없다'
소윤이도 깨작깨작 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잔소리하기 싫어서 그냥 내가 앉아서 먹여줬다.
나는? 물론 엄청 맛있게 잘 먹었다.
아내는? 배불러서 먹을 생각 없다던 아내가 가장 마지막까지 숟가락을 놓지 못하고 싹싹 비우고 있었다.
"여보. 혹시 셋째는 아니지?"
태중의 아이를 의심해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먹부림이었다. 매콤한 걸 먹었더니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당겼는데 아침에도 한 잔 사 먹어서 참고 있었다.
"여보. 커피 한 잔 사줘?"
황송하게도 아내가 먼저 물었다. 마다할 이유 없이 덥석 낚아챘다. 소윤이는 아까 엄마랑 얼린 젤리를 먹기로 약속했다면서 집에 갈 때도 안 자고 집에 가서 얼린 젤리 먹고 자겠다며 결의를 다졌다. 굳은 의지는 보이지 않는 힘을 생성하는지 차에 타고 집에 가는데 소윤이가 정말 잠들지 않을 것 같았다. 시윤이는 진작에 잠들었는데 소윤이는 그렇지 않았다.
"아빠. 나 집에 가면 얼린 젤리 먹고 잘게여?"
"어 그래. 그건 엄마가 약속했으니까. 혹시 소윤이가 잠들면 내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줄게"
"나 안 잘거에여"
이것저것 수다도 떨고 얘기가 그치니 혼자 흥얼흥얼 노래를 읊조렸다. 마치 난 졸리지 않고 이렇게 노래를 부를 정도로 멀쩡하다는 걸 과시하려는 것처럼. 정말 소윤이가 버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아내와 마음의 준비를 했다.
"여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일찍 갈 걸. 괜히 돈 쓰고 시간 쓰고 그렇게 되겠네"
아내랑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뒷좌석이 조용해졌다. 잠들었나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왠지 초점 없는 소윤이의 눈동자를 마주할 것 같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여보. 소윤이 자나?"
"그러게"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자 점차 확신이 생겼고 용기 내어 뒤를 돌아봤다.
"여보. 잔다"
막상 밖에서 저녁 먹고 이것저것 하면서 시간 보내다 보니 이른 시간에 퇴근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애들 재우는데 시간을 쓰지 않았다는 걸로 만족했다. 집에 도착해서 애들 눕혀놓고 바로 헬스장으로 갔다. 운동하고 돌아왔는데 도둑맞은 집이 필요한 영화감독이 있다면 그대로 내어줘도 좋을만한 상태의 집은 그대로였다. 난 집이 더럽고 어지럽혀져 있어도 절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가 하지 않는 일은 아내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고.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아내가 맡아서 하니까. 싫든 좋든 나도 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별 말을 하지 않는다. 아내는 그렇게 늘 아무 말 없는 나를 향해 오늘도 먼저 보호막을 쳤다.
"나 한나랑 한 시간이나 통화했어"
물론 아무 말을 않을 뿐 청결하고 정리되어 있는 상태를 선호한다는 걸 아니까 나오는 반응이다. 스스로도 언제나 집을 깨끗하게 유지하며 청결히 관리하는 만점 주부이고 싶은 이상과 그렇지 못한 현실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발언이기도 하고.
"아. 너무 늦기 전에 치워야지"
그 말을 한 게 10시 20분이었다.
"여보, 이미 늦은 거 아니야?"
아내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 이제 치워야지"
이 말은 11시 20분에 내뱉었다.
"여보. 한 시간이 금방 지났네?"
역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아내의 이런 점이 좋다. 너무 칼 같이 치우고 정리하고 닦고 쓸고 그랬으면 내가 숨 막혔을 텐데 은근히 허당인 구석이 많다.
여보. 누누이 말하지만 여보는 최고의 살림꾼이자 육아 전문가야. 그러니 자신감을 가져. 진심이야.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