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예뻐, 여보 예뻐

18.10.18(목)

by 어깨아빠

저녁때 아내의 고등학교 친구 모임이 예정되어 있었다. 장소는 합정. 아내는 6시에는 나가겠다고 친구들에게 공언을 해놓았다고 했다. 부지런한 퇴근이 필요했기 때문에 차를 가지고 출근했다. 일하고 있는데 음성메시지가 도착했다.


"아빠 사랑해여. 아빠 내가 예에쁜 안경을 만들었어여. 봤어여어?"


애교가 철철 넘치는 목소리로. 답장을 보냈다.


"소윤아. 아빠도 소윤이 많이 사랑해"


아내가 카톡을 보냈다.


[안 그래도 아빠 목소리 듣고 싶었는데 이랬음]


어제 어떤 목사님의 칼럼에 보니까 대한민국에 4대 종교가 있다고 하던데. 기독교, 천주교, 불교, 대학교 이렇게. 실은 5대 종교가 있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 대학교, 딸의 애교.


평소에도 퇴근이 매우 빠른 편이지만 특별히 마음의 부담을 갖고 더 서둘러 퇴근했다. 한참 저녁 먹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바통을 이어받았다. 싱크대 앞에서 닭가슴살을 굽고 있는데 소윤이가 와서 막 매달리고 아양을 떨었다.


"아빠?"


하면서 눈 마주치면 눈웃음 짓고 계속 옆에서 장난치고. 유난히 오늘은 나를 기다렸다는 게 느껴졌다. 역시 한 번 빠지면 견고한 신앙심을 가지게 된다는 딸의 애교.


아내에게는 미리 외출 준비해 놓고 내가 들어가면 바로 나가라고 얘기해 놓기는 했지만 그렇게 하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애 둘을 외면한 채 나 홀로 외출 준비를 한다는 건 심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매우 힘든 일이니까. 역시나 아내는 애 둘 전업맘의 모습 그대로였다. 내가 애들을 넘겨받고 부지런히 준비를 마친 아내는 거울을 보면서 못마땅한 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꼴이 말이 아니다. 하나도 안 예뻐"


소윤이의 1차 위로


"엄마. 예뻐"


나의 2차 위로


"여보 괜찮아. 예쁘기만 하구만"


물론 소윤이나 나나 위로라기보다는 사실 그대로의 구술이었다.


아내의 푸념은 좀 정성스레 화장도 하고 예쁜 옷도 골라 입고 몸이며 마음이며 매무새를 가다듬고 여유롭게 준비하고 싶었던 바람이 시간에 쫓기어 허망하게 날아가 버린 것에 대한 토로였을 거다. 그래도 예뻤던 아내는서둘러 집을 나섰다.


시윤이는 엄마의 외출을 눈치채고 아내가 부지런히 준비할 때 약간 질척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노선을 변경했는지 아내가 집에서 나가기도 전에 아빠 검딱지가 되었다. 시윤이의 처세술이란, 참.


낮에 사무실에서 일할 때만 해도


'저녁 먹고 잠깐 밖에 나갔다 올까'

'마트에 가서 소윤이 뭐 좀 사줄까'

'동네 한 바퀴라도 돌고 올까'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육아의 최전선에 투입되고 나니 싹 사라졌다.


'그래, 얼른 재우는 게 나의 살 길이다'


물론 소윤이나 시윤이는 이런 내적 고민의 과정을 알 턱이 없지만 괜히 미안해서 소윤이에게 코코아를 한 잔 타줬다. 미떼(핫초코)를 차가운 우유에 녹여서 아주아주 맛있는 코코아를 만들어줬다. 지지부진한 저녁 먹는 태도 덕분에 약간 꾸지람을 들어서 최상이었던 기분이 살짝 누그러지기도 했었는데 코코아 한 방에 다 원상 복귀됐다. 누나가 마시는 무언가가 대체 무엇인지 궁금증 조차 생기지 않도록 시윤이는 철저히 격리시켰다. 소윤이 코코아 마시는 동안 씻기고, 나와서는 계속 다른 걸로 관심 끌고. 몇 번 누나의 컵에 관심을 가졌지만 바로바로 낚아채서 다른 흥밋거리를 제공했다. 어차피 먹지도 못하는 거 괜히 떼쓰기 시작하면 굉장히 피곤해진다. 소윤이까지 씻기고 일찍 잠자리에 누웠다.


"아빠 오늘은 책 몇 권 읽어줄 거에여?"

"어. 한 권"

"너무 늦었으니까?"

"응"

"알았어여. 오늘은 두 권, 세 권 읽고 싶다고 안 할게여"


기특한 녀석


"소윤아. 책 세 권 읽어줄게"

"으잉? 왜여?"

"소윤이가 어제 아빠랑 한 약속 잘 지켰으니까"


코코아 한 잔, 책 세 권에 감사할 줄 아는 순수함이 오래가야 할 텐데.


둘 다 엄청 금방 잠들었는데 그 엄청 금방의 시간에 나도 살짝 잠들었다. 내가 코 고는 소리에 놀라 깨서 나왔다. 아내는 친구들을 바래다주고 12시가 넘어서 들어왔다. 그때까지 난 소윤이에게 두 번 호출당했다. 두 번 다다. 자기 옆에 와서 누우라고 했고 아빠는 일 해야 되니까 밖에 나가면 안 되냐고 물었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아내가 들어오기 직전에 다시 소윤이의 부름이 있었고 다시 들어갔다.


"소윤아. 아빠 일 해야 되는데 소윤이 자고 있으면 아빠가 일 끝내고 들어와서 소윤이 옆에 누울게"

"아빠. 그럼 한 개만 하고 들어와여?"

"그래 그래. 알았어"


웬일로 소윤이의 허락을 얻었지만 강시윤이 태클을 걸었다. 이 녀석이 잠에서 깨 가지고는 쉽게 잠들지 않았다. 소리만 들으면 자나 싶을 정도로 고요한 숨소리가 들리는데 휴대폰 불빛을 비춰보면 날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 실갱이가 이어졌다. 꽤 시간을 보내고 잠든 것 같아서 조심조심 방을 빠져나왔는데 문을 닫자마자


"으애애애애애애앵"


하아. 순간 짜증 수치가 솟구쳤다. 사실 이미 많이 늦은 시간이었고 그냥 들어가서 자면 되는데. 뭐랄까 맹목적인 행위가 되어버렸다고 해야 되나. 목적은 없었지만 왠지 얘를 재워야만 내가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그런. 다시 들어가서 재우려는데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생기가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다시 잘 생각을 하지 않길래 화딱지가 나서 이마에 손가락 딱밤을 살짝 때렸다. 요즘 시윤이는 엄마 아빠가 하는 말과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 분간을 한다. 이마에 딱밤을 때리는 척만 해도 누가 보면 엄청 세게 맞은 애처럼 서럽게 운다. 말 그대로 서럽다는 거다. 오늘도 나의 가벼운 딱밤에 나라를 잃은 것처럼 베개에 고개를 파묻고 서럽게 울었다. 그러고는 마음이 상해서 그랬는지 열심히 울다 보니 잠이 왔는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다시 탈출했다. 아내랑 앉아서 조금 수다를 떨고 있는데 또 시윤이가 깼다. 흐악. 어차피 자러 들어가려고 한 참이라 그냥 거실로 데리고 나왔다. 아내를 발견하고는 바로 아내 껌딱지가 되어서 나에게는 오지 않았다. 다 같이 자러 들어갔다.


"여보. 얘 좀 봐"

"그러게"


매일 자러 들어가면 자고 있는 두 녀석을 보며 감탄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면 키가 부쩍부쩍 큰 게 느껴진다. 그리고 샘솟는 세상 다정하고 티 없는 사랑.


한밤중에 깊이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는 그때의 마음으로 하루 종일 아이들을 상대할 수 있다면 삼송의 송일국이 따로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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